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이스라엘 만큼 인사가 ‘평화’라고 할 정도로 숱한 사연들을 겪은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이집트, 앗시리아로부터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라는 제국들이 역사에
등장할 때마다 남북의 길목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점령자들에 의해서 억압과 종교의 탄
압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빌론 유배가 끝나고 즈카리야 예언자는 실의와 어둠에 싸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즈카 2,14-15)
이스라엘의 자랑이던 예루살렘과 성전이 적군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고 폐허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도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도성과 성전이 무너지는가?’하는 자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은 선조들의 신앙의 터전이며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부를 때, 예루살렘을 의인화 해서 ‘딸 시온’이며 그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또한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온도 성전도 이스라엘의 생명이며 자존심이었던 것인데, 그것이 모두 무너졌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폐허속에서 즈카리아의 메시지는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던 것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군중은 큰 예언자의 모습으로 과거의 스승들과는 다른 권위로 가르치시는
주님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름과 실망에 절어 있던 사람들은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나자렛에서 평화롭게 유년시절을 보내시던 주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며 집을 떠나
생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이 계시다는 곳을 물어 찾아 왔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식구들은 잠깐이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사람들에 말을 넣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말 전하는 사람들과 식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48)
그리고 이어서 그 대답을 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해도 지친이들의 ‘위로자’, 아니면 ‘예언자’이신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분의 명성은 세례자 요한이 예언한 대로 갈수록 커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는 비례로 사적인 가족에게서 멀어지고 점점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신원, ‘참 인간,’ ‘참 하느님’이 그들에게는 갈등이고 특히 성모님께는 받아들이기가
벅찬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첫 자리에 꼽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성모님께서는 피조물이시지만 하느님의 사랑의 선택에 의해서 하느님의 아들을
임신하시고 낳으시는 그릇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원죄 없이 잉태하신 것처럼, 그 그릇 또한 원죄 없이
태어나시어 하느님께 자헌 한 사실을 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 당신 아들의 시신을 안으신 어머니의 고통을
교회의 신앙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 아드님의 구원사업을 위해서 성모님께서도 자헌하시고 구원의 역사에 참여
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어머니이시며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위로자이시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자유’의 원의를 가지고 구원역사에 참여하시며 교회를 사랑하시고
우리 또한 사랑하십니다.
성모님처럼 직접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기록은 성경에 없지만 예수님과 성모님과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식구로서 역시 구원 역사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형제들에게 직접적인 설명이 없어서 교파마다 ‘친형제들’, 가톨릭에서는 ‘사촌 이상의
형제들’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성모님게서 예수님을 낳으시기 전에도 동정이시고 낳으신 후에도
평생 동정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성모님 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소중하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교회의 전승에 따라 성모님의 부모께서 성모님을 성전에 봉헌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유년시절의 단 한번의 봉헌도 소중하지만 이 보다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일생을
함께 하신 ‘살아 계신 증인’ ‘구원역사’에 참여하신 그 봉헌의 삶을 더욱 기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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