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나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0,8-11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 요한에게 8 말하였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11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묵시록 저자는 하늘로부터 들려 오는 목소리에 따라 천사가 건네주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습니다. 그 천사는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묵시 10,9)라는 말을 전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그랬더니 과연 천사가 말한대로 삼킬 때에는 달더니 삼키고 나서는 배가 쓰린 것입니다.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부르실 때에도 비슷한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꿀처럼 입에 달았다.’라는 부분만 같습니다. (에제 3,1-3) 에제키엘은 두루마리를 삼키니 달다고 했는데, 묵시록 저자는 달았지만 나중에는 쓰다고 했을까요?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의 소명이 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록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의 소명은 달겠지만 그 두루마리의 내용은 세상의 환난과 심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과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경우에는 말씀을 전하는 소명이 달다기 보다는 쓰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 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9)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명칭은 영광스럽고 멋있어 보이지만 보탬도 하느님의 말씀을 빼는 것도 없이 정직하고 그대로 전해야하는 소명이행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따르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달다가도 쓴 것이지요. 묵시록 저자도 천상의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묵시 10,11)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라볼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겠지만 위험하고 미움의 대상이 되는 예언자의 소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의 중심으로 권세와 주도권을 잡고 있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도전의 말씀을 직설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성전을 두고 그들 때문에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심한 모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더욱 자극하는 것은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열광하며 쫒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조, 특히 정치나 종교의 조직이라는 것은 한 사람을 정점으로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더 강한 자가 상대를 제제를 하거나 아예 제거하려는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수석사제들은 성전 부근에서 환전을 하거나 동물 장사를 하는 자들로부터 정기 상납을 받는 것입니다. 그 런데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수입원인 환전상과 장사꾼들을 나무라시는 것은 자기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그들은 예수님을 어떤 수로라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심리적으로 바른 사람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높여주거나 아부하는 말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우리 표현이라면 ‘주는 것 없이 미운’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미운 대상이 두렵지 않겠지요. 주님께서 올바로 예언자의 소명도 사셨으니까요. -정인준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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