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강론>(2024. 11. 23. 토)(루카 20,27-40)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루카 20,2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루카 20,34-40).” 1) 사도행전 23장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바리사이파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사도 23,6-9)”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믿었고, 유대교에 속해 있었지만, 부활을 안 믿었고, 천사나 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일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복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고, 현세적인 소원을 빌기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일부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세, 부활, 구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갖지 않고, 현세에서 복을 얻어 누리는 것만 생각하고, 눈앞에 있는 일에 대한 소원만 빌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7-19).” <여기서 ‘불쌍하다.’는 ‘어리석다.’이기도 합니다. 현세만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 우리가 ‘부활’을 믿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것이 분명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아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 부활 신앙은 어떤 학문적인 이론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아주 생생한, ‘살아 있는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3) 예수님 말씀에서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이라는 말씀은, ‘아무나’ 다 부활하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인정받는 사람들만 부활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자격을 얻는 일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도 중요하고, 부활 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것,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자격을 얻지 못해서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면,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밖에서 구경만 해도 되는 나라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밖에서 구경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영원히 ‘소멸’됩니다(묵시 20,15).> 신앙생활은 구경만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삶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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