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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 정인준 신부님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제1독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9─5,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19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4-22ㄱ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요한 서간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계속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실을 강조하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임을 아울러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 사랑하는 데에는 조건이 따르는데

그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울러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서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형제를

사랑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믿음, 희망, 사랑에 대해 설명하면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라질지라도 사랑만큼은

영원히 남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사 61,1-2; 레위 25,8-13)이 주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처럼 고향을 찾아서 회당에 들려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고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며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순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께 호감의 말을 하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경탄했다고

전하기는 하지만 정작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되는 현재의 순간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향사람들이 더 주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 같은데,

사실은 인간적인 한계를 넘지는 못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메시아를 고대하면 기다리던 이스라엘 동족에게 돌아가신 것을 보면 가까운 사람이

더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더 주님을 알아 뵙고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제자들도 다 유대인들이었으니까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편협된 사고나 선입감에서

자유로워야 하겠지요. 그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겸손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한 것이지요.

 

요한 복음 서두에서도 표현했듯이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라는 말씀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