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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스테파노) 신부님 말씀 강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양승국 신부님 ~

2025년 1월 11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5,14-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14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내게 부여된 역할을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사가는 그 유명한 세례 원조 논쟁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원조 논쟁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적용됩니다.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에 대한 최초 지평을 개척한 사람은 역사에 길이 남습니다. 기술 분야에서 특허를 낸 사람은 특허청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사용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한 음식단지에 갔다가 요란스런 간판들을 보고 좀 웃었습니다. 그야말로 ‘원조논쟁’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한집 간판이 50년 전통의 원조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조금 더 가니 원조도 모자라 ‘진짜 원조’라고 강조점을 뒀더군요. 좀 더 지나니 그것도 모자라 ‘진짜 오리지널 원조’라고 떡하니 붙여놓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원조’에 대한 집착은 각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역시 한때 원조 논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세례 하면 당연히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이었습니다. 이름도 세례자 요한이지 않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한때 전국민적 세례 갱신 운동을 전개하며 전국구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거침없는 외침에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에게 인품에 매료된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으며 ‘세례자 요하 당(黨)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한때 그렇게 잘 나가던 스승 세례자 요한이었는데...요즘은 파리만 날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최근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훨씬 강력한 빛과 존재감으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이었기에 순식간에 전세는 기울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또 한편으로 억울했으면 이런 표현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보다 늦게 개업해놓고 세례 베푸는 일에 있어 더 큰 성공을 보이는 예수님에게 일종의 반감까지 지니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상황이 그런데도 스승은 별 위기감이나 전세를 뒤집을만한 묘안도 내놓지 않으니 더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이 보인 태도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쇠락과 반비례해서 급격히 떠오르는 예수님의 존재감 앞에 세례자 요한은 전혀 동요되지 않습니다. 억울함이나 적개심도 품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 원조 논쟁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거나 그 무엇 하나도 감추지 않고 명백하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7-30)


요한은 이제 자신이 무대에서 내려올 순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세례자 요한의 뇌리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참으로 위대한 인물인 것은 분노하고 억울해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을 향한 한없는 존경심과 깊은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세주를 위한 자신의 퇴장 앞에서 그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행복해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물러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승국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