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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연중 제 1주간 화요일 / 기경호 신부님 ~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마르 1,22)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2,5-12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의 말씀나눔 

 

 권위 있는 신앙인의 삶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어 쫓아내시자 사람들은 새로운 가르침이라며 몹시 놀랍니다(1,22.27).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던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1,22).

예수님의 권위는 율법학자들의 그것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직업적인 권위였으나 예수님의 권위는 신적이며 영적인 권위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기 위한 수많은 세부지침을 만든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하느님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들을 내세우기 위한 권위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현세적인 권위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들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버렸고, 결국 율법의 본질인 하느님의 자비와 해방이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는 율법주의의 늪에서 헤맸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적인 권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까닭은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처신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며, 해방을 가져다주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의 권위는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와 생명의 힘을 드러내는 영적인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의 삶이 새로운 권위를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롭다는 것은 그 가르침이 이전의 것이나 다른 사람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을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이 권위 있으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과 권위로 더러운 영을 꾸짖어 쫓아내셨듯이(1,26) 내 힘과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능력에 의탁하여 말하고 처신해야 합니다. 삶의 출발점과 원동력 모두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어야 권위 있게 됩니다. 나를 드러낸다면 세상 명예는 얻을지 몰라도 참 권위는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권위는 세속적인 권위와 달리 사랑의 권위, 생명과 창조와 해방의 권위여야 합니다. 참 권위는 철저히 타자(他者)를 향하고 이롭게 하고 살리며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할 때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권위는 늘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모두가 더불어 성장하고 행복하기 위한 사랑의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언행이 일치되는 삶이야말로 권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의 홍수와 공허함, 언어유희에 빠져 실없는 신앙인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치신 그대로 목숨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심으로써 율법을 재해석하셨습니다.

내 삶은 권위가 있는지 돌아보고, 복음을 사랑의 삶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이들을 살리는 말씀선포를 통해 권위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