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녹)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2,1-5
1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2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3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4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5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4-11
형제 여러분,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8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9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0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1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1
그때에 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9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과 비교해서 ‘표징’이라는 말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카나 마을에서 있었던 혼인잔치에 참여했다가 포도주가 떨어지는 딱한 상황에서 성모님의 주선으로 마침 그곳에 정결례를 위해 있던 독에 물을 채워 주님께서 포도주로 바꾸는 첫 번 째 ‘표징’을 일으키셔서 잔치 주인을 구하고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맛 있는 포도주를 맛보게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줄거리입니다.
여기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특별히 쓰는 표징은 희랍어 원본으로는 ‘세메이온 σημειον ’ 이라고 하고 복수를 ‘세메이아 σημεια’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말이라면 ‘상징’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상징 symbol’이라는 말의 뜻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예로 ‘하트’는 ‘사랑’을 의미하지요. 그 하트 모양은 여러 가지이지만 사람들이 그 하트를 볼 때 다 ‘사랑’으로 해석합니다.
하트 그 자체는 보이는 것이고 사실은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사랑’을 뜻하기 때문에 그 하트도 사람들은 여러모양으로 만들어 보입니다.
요한 복음도 이러한 의미에서 ‘상징’을 중요시하는데 일곱 개의 기적이야기에서 나옵니다. 더 쉽게는 이 ‘상징’은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적을 ‘표징’이나 ‘상징’으로 이해할까요?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특별한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그것도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명을 주지만 그보다는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인 ‘하느님의 아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은 기적만을 보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상징 외에 여섯 가지가 더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왕실 관리이 아들을 살리시는 표징 (4,46-54), 벳자타 못가의 병자를 고치시는 표징 (5,1-18), 오천명을 먹이신 표징 (6,1-15), 물 위를 걸으시는 표징 (6,16-21), [그 사이에 예수님의 형제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7,1-9]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눈 먼이를 고쳐주시는 표징 (9,1-12),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시는 표징 (11,17-27)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의 표징의 뜻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두에서도 전하고 있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서두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 12)
그런데 요한복음의 원래 마감에서도 예수님께서 표징을 베풀어 주신 일들에 대해 이렇게 전하며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20,31)
오늘 본문을 조금 더 볼까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예수님, 성모님, 제자들은 기쁜 일입니다. 우리도 알지만 먹고 마시는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 아닙니까?
오늘 독서 이사야 예언자도 예루살렘의 구원의 날을 두고 기뻐하는 것을 신랑과 신부가 혼인하는 일에 비유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카나에서도 이 기쁜 잔치에 초대 받았으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사람들은 모르지만 포도주가 떨어져 난감한 위기에 처해있는 그 상황을 성모님은 걱정을 하시며 아들에게 이 사정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은 사실 퉁명스러운 것이지요. 다정하면 자식도 아니지요.
오늘 원문은 ‘여인이시여, 당신과 저 사이에 무슨?’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왜 어머니를 ‘여인 (귀나이 γυναι)’이라고 하셨는지를 해석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성모님께 이 용어를 쓰십니다. (요한 19,26)
왜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하셨을까요? 솔직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학자들은 고대 희랍어 문서에서 나타나는 왕이 자신의 부인인 왕후를 부를 때 쓴 이 칭호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왕은 왕궁의 예법에 따라 존경과 사랑의 의미로 왕후를 ‘귀나이’로 불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귀나이’도 우리에게는 어색하게 들리지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과 존경으로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ο τι αν λεγη υμιν ποιησατε Do what ever he tells you.’ (요한 2,5)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아들이신 예수님을 신뢰하십니다. 비록 주님께서 때가 되지 않으셨지만 이런 어려움의 처지에서 구해주시리라 믿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 일곱가지 표징 중에 첫 번 째 표징을 베푸신 카나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에서부터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요한복음을 통한 주님의 가르침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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