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종교가 다른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종교는 ‘진리’라는 바다로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이 진리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오만은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과신하거나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태도입니다. 편견은 충분한 이해 없이 내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입니다.
인류는 ‘오만과 편견’으로 소중한 이웃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거침없이 행하였습니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태입니다. 유럽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힘없는 우리의 이웃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있습니다. 아리안 인종 우월주의와 히틀러의 독재적 태도는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았습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을 열등하거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었습니다.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여성 억압과 성차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고 교육과 일자리에서 배제하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은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예전에 쓰던 모델은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모델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한 후에 하와를 창조하였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지만, 하와는 아담의 뼈로 만드셨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교리를 절대화하고 개인의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이단이나 마법을 행한다는 혐의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종교적 권력이 지나치게 오만해지면서 발생했던 비극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신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무슬림, 유대인, 심지어 동방 정교회 신자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의 종교적 갈등과 상호 불신이 생겼습니다. 종교적 오만과 편견이 평화를 해치고 많은 희생을 초래하였습니다. 종교 개혁과 분열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 그리고 개혁자들의 강경한 태도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상호 배척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류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나갑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 그리고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세리와 레위입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움은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표징과 권위는 마귀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만과 편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놀라운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 없이 풍족하게 살았던 부자는 죽어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껏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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