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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2주간 화요일 / 정인준 신부님 ~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형제 여러분,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11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안식일의 주인”

우리는 난처한 일이 생기면 우선 그 내용보다는 ‘체면이 말이 아니다.’라고 해서 남의 눈치에 나를 맡길 때가 있습니다. 특히 유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허례허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빚을 내서라도 잔치를 크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당장 나는 힘들고 어려운데 남의 눈치에 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비단 우리의 현실에도 있겠지만 복음서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밀밭에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주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안식이라도 배고픈 상황을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밀밭을 지나다가 밀이삭을 뜯어 비벼서 허기를 채우려 합니다. 사실 우리로 말하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항상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흠을 잡으려는 바리사이들에게는 비판할 좋은 기회를 맞았습니다. 비벼먹은 것도 안식일에 일한 것으로 잡아 예수님을 몰아세우며 질문을 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마르 2,24)

사실 안식일 법은 무조건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사회정의의 법 정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에게는 법조항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제자들이 굶어서 허기진 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무엘 서에서 전해주는 것처럼 사울에게 쫒기며 놉이라는 곳에 가서 사제아히멜렉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집에 빵으로 허기를 면합니다.(1사무 21,1-7)

그 사건을 들어 주님께서는 사제만이 먹을 수 있는 규정이 있었지만 사제는 당장 허기진 다윗과 그 일행을 위해 그 빵을 내 놓은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5-26)

재미있는 것은 복음서도 전하는 과정에서 틀리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아히멜렉 사제 때에 그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의 아들 에브야타르가 당시의 사제로 착각한 것입니다. 아히멜렉과 사제들이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도엑의 고자질 때문에 후에 사울에 의해 모두를 살해됩니다. 그 때 용케도 살아남았던 에브야타르는 다윗에게 도망을 가서 유다 왕국의 사제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을 고집할 때 곧잘 법을 들먹입니다. 상대의 입장과 문제보다는 자신의 입지가 더 중요하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모든 법에는 그 정신이 있습니다. 단지 법 조항만 따지면 생명을 죽어버리고 문자만 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0)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문자에 의해서 죽었던 안식일 법의 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주님이야말로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안식일 법을 사랑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주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