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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연중 제4주간 화요일 강론>(2025. 2. 4. 화)(마르 5,21-43)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1)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여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믿음’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을 믿어서 불치병을 고친 이야기”로만 해석한다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해석하기도 편하고 강론하기도 편하게 되는데, 그런 해석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 라는 오해로 이어집니다. 그 오해는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나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는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또는 “믿음만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같은 말은, 사이비 종교에서 흔히 하는 말입니다.

2)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불치병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만, 병이 치유되지 않고 그 병으로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누구는 고쳐 주시고, 누구는 고쳐 주시지 않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믿음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이 더 필요한 것인가?

<34절에 있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을, 여자의 믿음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기적은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이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긴 한데, “이제부터는 믿음을 더욱 굳게 가지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병자에게 문병을 가서,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잃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격려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병은 주님의 뜻이다.”, 또는 “믿음만 있으면 이 병은 무조건 반드시 낫는다.” 같은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심어 주는 말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무슨 병이든지 간에 그것을 잘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병이 낫지 않더라도...

3)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ㄴ-10).” 바오로 사도는 어떤 병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고 전해집니다. <통증이 무척 심한 불치병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했던 바오로 사도였지만, 그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가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세 번이나’ 간청했는데도, 주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의 병약한 몸이 오히려 주님의 힘을 증언하기 때문이라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체험합니다.

4) 회당장 야이로에게, 또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자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딸이 살아난 것으로 야이로의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졌을까?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까? 여자의 경우에도, 불치병이 완치된 것으로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바랄 것 없는 상태에서 남은 인생이 행복하기만 했을까?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소녀도, 불치병이 완치된 여자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었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몸의 건강’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여행길에 필요한, 또는 중요한 것이긴 한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건강하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면? <지옥은 몸만 건강한 사람들이 가는 곳, 하느님 나라는 몸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만 가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