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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 정인준 신부님 ~

2월 13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서 있을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존심 때문에 사람이 괴로워하고 울분에 못 이겨 폭력을 쓰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하면서 ‘자존심이 뭔지...’라는 말을 되 내이곤 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성격도 강해서 잘못하다가는 주위 사람들과 좌충우돌하며
상처도 잘 받고 또 남에게 상처도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직업이 여러 가지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대부분 남을 가르치는 사람,
명령을 일삼는 지휘관들은 쉽게 말해서 남들에게 상처를 쉽게 줍니다.

좀 더 성숙한 인격자이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 지나친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입장을 무시하는 사고와 행동을 저지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강한 성격, 자존심의 소유자는 '저 성질머리하곤..쯧쯧'이라는 소리를
하루에도 몇 차례 사람들에게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롭게 지내기보다는 곧잘 다른 사람들과 마찰을 빚기 일쑤입니다.

‘자존심(自尊心 self-esteem)’이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능력, 적성 등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말하는 것이지요.

자존심에는 강한 것과 약한 것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아예 자존심이
없어지면 자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낮은 경우에는 타인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고 그러다 보면 자기비하,
열등감 등에 빠지기 쉽다고 하지요.

반대로 자존심이 강하면 자만과 강한 허영심에 빠지기 쉽다고 하고요.
그러니 자존심이 약해도 문제요 자존심이 강해도 문제네요.

그러면 원만한 자존심이란 어떻게 해야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사랑이 있을 때에는 그 안에서 자존심은 조화를 이루지요.

오늘 이방인 여자의 경우에서 이 자존심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도시 티로 지역을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페니키아 출신의 한 이교도 여인이 다가와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십사하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이신지, 주님의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게 그 여인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당시 유대인들의 정서에서 자신들은 ‘하느님의 자녀’요 이방인은 ‘개’로 표현하는
정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여인은 오늘 복음 표현대로 ‘강아지’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여인은 인간적인 자존심에 머물지 않고 뜻밖에도 자신을 ‘강아지’로
전제하며 겸손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시고 그 여인의 대답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성경의 이야기에서 가정(假定)이라는 경우를 생각할 수 없지만 이방인 여자가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다고 욱하는 마음이거나 화를 냈다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고 치유의
기적과 연결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자존심 보다는 자신의 딸에 대한 사랑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 유대인들이 갖는 신앙과는 다른 것이었겠지만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머니의 딸에 대한 사랑이 자존심을 조화롭게 만들었고 그녀의 딸은
마귀로부터 자유를 얻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일 수 있어서 내 입맛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어서 변함이 없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사랑으로 인간을 흙의 먼지로 빚어 사람을 만드십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신화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신들은 인간을 자신들의 노리개로 만듭니다.
자신들은 휴식을 취하고 인간들은 노동을 하도록 창조한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삭막한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샘이 있고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시고는 그 가운데 사람을 데려다 놓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최조 인간인 아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저마다 제 성격을 갖고 삽니다.

그런데 그 성격을사랑에 담그며 갈고 닦으면 주님처럼 무한한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겸손이라는 큰 그릇에 성격을 담그면 언제 어디서나 제 성깔대로 살지 않고 부드럽고
친절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함께 멋진 시너지(synergy)를 낼 수가 있지요.

주님께서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당신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의 성격대로 사는 하루가 아니라 우리의 조화로운 자존심과 함께
주님께서 축복을 받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따르며 이웃에게 기쁨과 평화를 전해 주는
뜻 깊은 날이 되시기를 빕니다.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