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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라인 계곡의 신비주의자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2월 23일 일요일 (호명환 번역) 여덟 번째 주간: 라인랜드(독일)의 신비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고 고마움을 표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이번 주 묵상에서는 중세 때부터 20세기까지의 유럽의 라인 계곡 신비주의자들 몇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이번 주 주제를 다음의 글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도 많이 있지만, 저는 여전히 하느님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서구인이 비-이원주의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내면의 하느님 체험과 이 세상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 성령의 체험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행하고, 화해하고, 경계를 넘어서고, 이어주는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그런 가치들입니다. 이 가치들은 우리로 하여금 양분법적 정신 구조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정신 구조, 그리고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것과 같은 정신 구조를 넘어서게 해 줍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비-이원론적 생각은 우리의 이성적 정신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불의에 대항하여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신비적이고, 관상적이며, 일치하는 의식 안에서 성장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성장을 이루어갈 때 우리는 세상을 더 넓고 깊고 현명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해 창조적인 해결책을 내는 데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온전하게 통합된 인격체의 모델인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고마움을 표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1]

 

 

제 문화의 뿌리는 북유럽의 라인랜드에 있습니다.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은 대개가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그 지역에서 살았던 독일어권 영성 저술가들, 설교가들, 선생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중요성은 최근에 와서야 재발견되고 있습니다. "알프스 넘어"의 교회(로마에서 볼 때 알프스 북쪽에 있는 교회)는 단순히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늘 로마의 감독과 통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렸고, 그래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교회, 즉 "알프스 안쪽" 교회와는 다른 자료들과 영감들을 이끌어냈습니다.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은 용기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들의 창조적인 관점에서도 특출났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베네딕도회 수녀 빙엔의 힐데가르드(Hildegarde of Bingen: 1098-1179)와 대 젤뚜르다(Gerturde the Great: 1256-1282); 베귄 공동체의 막데부르크의 메흐틸드(Mechthild of Magdeburg: 1212-1282);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와 요한네스 타울러(Johnnes Tauler: 1300-1361), 그리고 하인리이 소이세(헨리 수소라고도 함: Henry Suso: 1295-1366)와 같은 도미니칸들; 쿠사의 니콜라스 추기경(Cardinal Nicholas of Cusa: 1401-1464) 등이 포함됩니다. 이 명단에 제가 포함시키고 싶은 최근의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는 신경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입니다. 그는 힐데라르드와 에크하르트 그리고 쿠사의 니콜라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개신교 개혁 이후에 신비주의자들의 길은 전반적으로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틴 루터(1483-1546)가 하느님에 대한 앎은 오직 성경에만(sola Scriptura) 있다고 강조했기에 이들이 더 억압받았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개인의 영적 체험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던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루터는 초기에 가톨릭교회가 과도하게 영성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것을 바로잡아 주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를 "이성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기여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이끈 개혁 전통 안에서도 나중에는 독일의 구두장이 야콥 뵈메(Jacob Boehme: 1575-1624)와 발명가 엠마누엘 스베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 1688-1772)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나왔습니다.

 

 

그 이후의 시대에서 독일의 신학은 종교개혁 이후의 이성주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꽃을 피웠습니다. 신학 연구가 이 세상에 계속해서 막대한 선물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이런 신학에 집중하다 보면 경험이나 실천에는 별로 강조점을 두지 않은 추상적인 생각들을 갖고 하는 끝없는 논쟁에 쉽사리 갇힐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신비주의자들은 본질적인 신비 체험을 존중하고, 또 하느님을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자기들이 했던 신비 체험으로 초대해 주는 이들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호주의 한 평범한 프란치스칸으로서 언제나 기도 중에 강력하고 기억할 만한 체험들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왔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그런 특별한 내면의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를 주제로 하는(on Mysticism), 매일 묵상과 함께하면서 저는 제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거의 매 순간 제 안에 성령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비록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하느님 안에 있는 놀라운 생명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사랑의 놀라움을 누려 보도록 합시다!

—Sue 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Need for Mysticism,” Daily Meditations, August 2, 2020.

[2]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Rhineland Mystics,” The Mendicant 5, no. 3 (2015): 1, 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gustin Fernandez,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과 더불어 이 땅의 식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우리도 이 위대한 신비로 들어가는 관문에 발을 들여 놓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심 안에서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일) 하실 수 있으면" 하고 자기 아이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신앙 생활의 여정 안에 이 "만일"이라는 것을 들여 놓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붙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 구멍이 얼마나 작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애쓰게 부은 물이 다 새 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만일)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하고 반문하십니다. 이는 마치 "양다리 걸치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라는 말씀으로도 들리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있을 손해에 대비해서 양쪽에 다 내기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의 심리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여정에 "만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께서 직접 해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은 확률을 계산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단어보다는 '신뢰'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두 단어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조금은 미묘한 차이를 지닙니다.

 

 

[믿음]에는 "예" 아니면 "아니오"의 대답만이 요구된다면, [신뢰]에는 여러 등급 혹은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신뢰함으로써 신뢰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니까 신뢰하고 또 신뢰함으로써 더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대개 아는 것이지만, 종교개혁 때 뭔가 잘못 이해했던 것이 가져온 크나큰 비극은 이 '신뢰'라는 것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fiucida인데 이것이 바로 마틴 루터의 신앙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는 말을 했을 때 이 [믿음]에는 [신뢰]가 핵심으로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루터가 '믿음' 혹은 '신앙'이라는 말을 했을 때 거기에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말하는 "희망"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은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창조해 주시면서 성장해 가도록 해 주신 법입니다.

 

 

오래 전에 법륜 스님이 어느 강당에서 강연을 하는 내용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강연에서 어떤 불자(자매)가 스님에게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0년쯤 되었는데 가끔씩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기도 한다고 하면서 과연 극락이 있는지, 그리고 '만일' 극락이 있다면 어머니가 극락에 계신지가 궁금하다며 스님의 말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스님이 그 자매에게 이렇게 따라 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러자 그 자매가 따라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다." (제가 법륜 스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자 그 자매가 그것도 따라서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법륜 스님이 가만히 계시니까 그 자매가 "아니, 그것은 교회에서 하는 말 아닌가요?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는 말씀 아닙니까? 저는 절에서 스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여기 온 건데..."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아니, 지금 목사님이 아니라 스님이 말하고 있잖아요! 교회 목사님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스님'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습에 그곳에 모인 청중이 모두 웃었고 저도 많이 웃었습니다만, 가끔은 법륜 스님의 이 말씀이 진지하게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 해석은 저의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저는 이 말씀이 그냥 그럴 것이니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다는 사실을 더 새기고 새기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신뢰]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신뢰심은 참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에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믿고 되뇌기도 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만, 정말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그 신뢰심을 드리지는 못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를 정말로 신뢰하고 새기면서 더 큰 신뢰심으로 성장시켜가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이원론적 논리, 혹은 흑백의 논리에 가로막혀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하느님 사랑을 받을 만한가 아닌가를 판단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복을 주려 하시는데, 우리가 먼저 그 사랑과 복을 가로막는 셈인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로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란 "하느님 뜻" 즉 "하느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희망과 믿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 신뢰심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하느님께 신뢰심을 드리는데,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서 그 신뢰심을 꺾으실리야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