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작년보다 많은 200여 명의 교우들이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 백신을 맞은 것처럼 보여서 든든했습니다. 내년 재의 수요일에는 더 많은 교우가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백신’을 이마에 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마에 새겨진 재가 외적인 백신이라면 신부님의 강론은 교우들의 마음에 새겨진 백신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고난과 아픔의 시간일 수도 있지만, 사순시기는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첫사랑’이 시작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말랐을 때 하느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이 샘솟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팠을 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순시기는 회개와 참회의 시간이면서,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저는 단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는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이지만, 기도의 또 다른 의미는 지금 외롭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과 그릇된 신앙생활을 비유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헌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정성 된 마음으로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단식할 때도, 자선을 베풀 때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도 미국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에 비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성인들의 삶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세상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상대적으로 평가하거나, 순위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들의 모습을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 희망을 보게 됩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두어 주신다는 확신을 통해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희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빠지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면 살이 빠지고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생활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조재형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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