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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 정인준 신부님 ~

4월 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로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배경에서는 하느님은 엄연히 엄위와 절대 성성을 가지고 계셔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 관계를 부자지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은 이어서 유다인들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18절)

구약에서도 하느님을 절대 거룩하신 분으로만 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에서 도식적으로 하느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시는 대목과
또 다르게는 하느님께서 사람처럼 진흙을 빚어 콧구멍에 숨을 불어 넣어서 사람을
만드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간과 거리감 없이 친근한 분이기도 하십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24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일관적으로 ‘아버지로 부터의 파견’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아버지와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고 바로 사랑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정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그 사람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칭찬의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한편 나쁜 감정을
갖고 있다면 그 상대를 깎아 내리거나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가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늘 아버지와의 일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겠어요?

우리는 유대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함부로 부르는 독성죄인으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콩으로 메주를 쓴다’해도 안 믿는다”라는 우리네 말이 있습니다.
분명 메주의 원료는 콩인데도 안 믿는다는 것은 불신이 바닥에 깔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억울한 경험을 다 갖고 있습니다. 사실을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소문만을 갖고 사실이 아닌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서 괴롭히는 이웃을 볼 때 속상한
마음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의 불신 앞에서 참으로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위로며 힘이신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30절)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또한 사랑하십니다.

예언자는 백성을 위로하며 희망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4-15)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인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나시지요.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 제단에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제는 우리 죄인을 위해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 부치신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길 없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