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 조재형 신부님 ~



제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찬미예수님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시대에 활동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예고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라는 표현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모성애적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조건 없고 희생적이며, 자기 존재를 잊을 정도로 아이를 위해 헌신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설령 인간의 어머니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걸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좀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문학 작품을 통해 이 사랑을 더 쉽게, 그리고 깊이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장 발장은 감옥에서 19년을 살고 나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가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납니다. 


우리가 주교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경찰 불러! 저 도둑놈 잡아!" 이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오히려 경찰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도둑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은식기를 주었습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알료사라는 수도승입니다. 알료사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사랑과 용서를 선택합니다. 그의 스승, 조시마 수도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 


하지만 사랑은 고통과 함께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밤, 성냥팔이 소녀는 거리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기억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성냥불을 켜면서 소녀는 할머니의 따뜻한 품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결국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느님은 결코 예수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이 완성됩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의 이야기입니다. 수녀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 사랑이 거창한 게 아닙니다.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것,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마음으로 품어 보는 것, 외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것, 이런 작은 실천이 바로 십자가 사랑의 시작입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지만, 교회에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열정이 잠들어 있는 신앙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런 열정이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계명과 율법이 아닙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소경의 갈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갈망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갈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산에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갈망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조재형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