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
“하(예)닮의 여정”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키시네.”(시편145,13-14)
옛 현자 다산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 하면서 일상에서의 소홀함을 경계한 말씀입니다.
“제 식구는 챙기지 못하면서 밖에서 큰 뜻을 이룰 수 있는가? 먼저 살림을 마련한 다음 시詩와 예술을 배워라.”
“늘 가난하면서 인의를 말하기를 좋아한다면, 그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느님을 찾을수록 지극히 현실적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형이하학形而下學의 기초위에 형이상학形而上學임을, 수덕修德생활의 기초위에 신비神祕생활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하늘 향해 가지들 뻗어나갈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 이들은 모름지기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말씀처럼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그대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장미주일 복음을 묵상하며 통절히 깨달아 경계삼기위해 집무실 게시판에 써 붙인 고백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수도원 숙소는 “자비의 집”이라 부릅니다.
“자비의 집,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43년 정주했는데도, 복음의 큰 아들처럼 여전히 아버지의 자비를 닮지 못했구나! 36년전 3월5일 장미주일 강론 읽으며 통절히 깨닫는 사실이다!”
“내 판단의 잣대는 무조건 루가15장을 소재로한 렘브란트의 그림의 ‘자비로운 아버지의 사랑’이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아버지이심은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기도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고백이 나올 때 마다 고마움에 목이 멘다는 어느 동방수도승의 일화도, 수도원에서 어둡게 우울하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하느님은 아버지가 아닌가!’하는 전광석화같은 깨달음에 이어 늘 기쁘게 살았다는 또 하나 동방 수도승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이시며 친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으며 자비하신 아버지처럼 그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삶의 기준은 언제나 자비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치는 단호한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 영생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밝히신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환히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삶의 멘토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사순시기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행복하게 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길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합니다.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예언자인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영감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한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를 해치지 못하리라.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사야의 외침도 단숨에 읽힙니다. 바로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위로하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즉시 당신 백성인 우리의 착오를 바로 잡으시고 당신을 제대로 알 것을 촉구하는 아버지는 흡사 사랑에 넘치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한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잊으면 잊었지 주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며, 우리가 주님을 떠났지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확약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길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 있을 뿐입니다. 하닮의 여정은 그대로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완전한 거울입니다. 아버지는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활동하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하느님은 그분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생명을 주는 분이며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모두 안에서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 그분만이 우리에게,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하(예)닮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7-18). 아멘.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순 제 4 주간 수요일 / 안동훈 신부님 ~ (0) | 2025.04.02 |
---|---|
~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0) | 2025.04.02 |
~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 이영근 신부님 ~ (0) | 2025.04.02 |
~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 조재형 신부님 ~ (0) | 2025.04.02 |
~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 반영억 신부님 ~ (0) | 2025.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