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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5주간 화요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사순 제 5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의식(consciousness)의 변화!

 

하느님의 숨

2025.04.07. 16:28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4월 7일 월요일 (호명환 번역) 열다섯 번째 주간: 사막의 지혜

서구 교회는 초기의 사막 그리스도교의 지혜를 도외시하였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는 사막의 신비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활 방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의식(counsciousness)의 변화까지도 추구했는지에 대해 강조하여 말합니다: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은 예수님 이후 초세기에 나타났습니다. 겉보기에 느껴지는 그들의 원시적인 삶의 방식과 금욕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개 보는 이와 보여지는 것 사이의 연결점을 놀라우리만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단순성과 그들과 관련한 이야기들, 그리고 통찰력에 있어 선불교의 스승들과 비슷합니다. 나중에 에니어그램으로 알려지게 된 방법론의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리아의 부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inticus: 345-399)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비-이성적인 차원에서 열정이 일어날 때 지성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말합니다. [1] 그와 다른 많은 이들은 이런 통찰력을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이해 있어 근본적인 통찰력으로 삼습니다.

고대의 독거 수도승들에게는 "감정의 중립"(dispassion) 혹은 apatheia의 추구는 그들이 종종 "고요함의 기도"라고 말하는 것을 심오하게 경험함으로써 발견한 내면의 평화와 만족을 의미하며, 이는 "여러분의 골방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마태 6,6-8 참조)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초기 시대에는 "기도"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 해결을 위한 거래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그저 말씀을 드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도는 오히려, 당시 수녀승들이 주로 말하던 대로, 글자 그대로 "생각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기도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그저 우리가 경험한 순간들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나 반복적인 의견을 써내려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교모들과 교부들에게 있어 기도는 하느님을 어떻게든 기쁘게 해 드리는 거래(기도를 문제 해결로 이해하는 개념은 한참이나 후에 나타남)가 아니라, 기도를 행하는 사람의 의식(consciousness)의 변모로서 이해되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 쪽에서 볼 때 절대 멈추어지지 않는 내면의 대화를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렇게도 종종 "항상" 기도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1테살 5,17). 단순하게 말하자면, 기도는 우리에 대해서나 다른 어떤 것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 바로 앞에 놓여 있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정신(의식)을 바꾸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감정의 중립"(dispassion)은 우리가 한참이나 후에 다른 세상으로의 옮겨 가는 것으로서의 구원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오래 전에 자유와 구원에 대해 사막의 교모들과 교부들이 발전시켰던 개념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에게 있어 하느님은 우리의 정신를 변모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해방시켜 주는 조우된 사랑(Love Encountered)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대피 계획을 위한 파트너로 보이고, - 또 그렇게 이용됩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정의와 우리의 지구, 혹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의 열매가 종종 그들에게 여실하게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그들의 관심 영역안에는 전혀 들어있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제 우리가 참으로 추구하고 있는 다른 현실이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있을 것도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머리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전적으로 다른 정신을 지닌다면 하늘나라는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고, 우리 가운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사막의 교모들과 교부들에 대해 생각할 때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의존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있어 그러한 측면이 그들의 영적 여정에 보태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살았고 의지했던 가르침들을 삶에 적용하는 데 있어 하나의 이상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서로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또 관상적 삶의 지혜가 주는 가장 강력하고도 힘든 교훈들을 삶에 적용하지도 않은 채 그저 머리로만 그러한 삶을 살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Jane M.

References

[1] Evagrius, On Prayer 51. See The Philokalia, vol. 1, ed. and trans. G. E. H. Palmer, Philip Sherrard, Kallistos Ware (Faber and Faber, 1979), 61.

Adapted from Richard Rohr, Just This (CAC Publishing, 2017), 15–1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Krn Kwatra, Untitled (detail), 2022, photo, Om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위 사진은 사막의 교모들과 교부들처럼 어떤 사람이 독거(solitude)와 영감(inspiration)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