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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주간 월요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성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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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숨
2025.04.13. 19:28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 필립 2,6-7

리처드 로어 신부는 내려감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당신을 온전히 내맡기신 예수님에 대해 성찰합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풍요로운 주제가 흘러넘치는 가운데, 저는 필립비서 2장에서 말하는 위대한 포물선 모양의 운동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자 합니다. 신약 성서 학자들 대부분은 이 찬가가 본래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부르던 노래였다고 추정합니다. 이 운동에 대해 단도직입적이고 진솔하게 말하기 위해 저는 인생을 바꿀 만한 칼 융(C. G. Jung: 1875-1961)의 이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생의 비밀스러운 절정기가 되면 위로 가던 포물선이 아래로 내려가게 되고 죽음이 탄생합니다. 인생의 후반기는 상승이나 펼쳐짐, 증대, 패기와 같은 것이 중요시되지 않고, 죽음이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이 인생 후반기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충만하게 성취하기를 부정하는 것은 그 마지막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것이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차고 기우는 것은 하나의 곡선(포물선)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1]
 
 
필립비서의 이 찬가는 예술적이고 진솔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칼 융이 말하는 "비밀스러운 시간"을 설명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 찬가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이 포물선이 위로 오르다가 내려가게 하시는 때, 즉 완전히 차서 이제 기울어지게 되는 때를 묘사해 줍니다. 이 포물선은 우리가 육화라고 말하는 것, 즉 위대한 자기-비움 혹은 kenosis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두 개의 신비를 하나의 운동으로 뚜렷하게 연결시켜 줍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또 내려가 피조물과 같이 육화하여, 인간의 깊은 슬픔 속으로 들어가시고 마침내 가장 밑마닥에 있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하게 만드십니다(종신의 신분을 취하시는 하느님" 필립 2,7). 예수님은 마치 "인간적인 것은 아무것도 나에게 절대 혐오스럽지 않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의 상황에 전적으로 연대하시고 또 그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 주십니다.

예수님이 옳다면 하느님은 언제나 올라가고자 하고 성취하고자 하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뭔가를 하고자 하는 우리 인류와는 정반대의 방향, 즉 내려감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 찬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마다하신다고 노래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느님이 "저 위에" 계시니까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을 찾기 위해 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저 위에" 다다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오신 것을 간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유가 얼마나 대단한가요! 그리고 이런 하느님의 자유는 누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필립 2,9). 우리는 이 "들어 높이심"을 부활 혹은 승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희망을 위한 청사진, 곧 우리가 하느님으로 변모되는 희망으로 가득 찬 본보기로 우리에게 주어지신 분입니다.

내려감을 신뢰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라가도록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인류는 생명의 순환 궤도에 연대하며 우리 서로와도 연대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성공담을 창출해내거나 다른 사람의 실패담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인간성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되게 "성령"께로 올라가려고 하는 대신 인간이 되는 자유, 즉 충만한 영혼이 되는 자유를 누리게 해줍니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도록 되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60대 초반 어느 때부터 저는 제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제 삶과 경력, 그리고 가족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제 삶이 실패했다는 느낌으로 인해 제 내면에 위기감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제 삶에서 제가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지나온 모든 것이 저에게 큰 실패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15년간 영적인 추구를 해왔는데, 이 영적인 탐구가 저를 경외감과 고요함으로 가득하게 해주었고, 저 자신을 신앙의 신비에 온전하고 소중하게 내어맡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Carol F.

References

[1] C. G. Jung, Psychological Reflections: A New Anthology of His Writings, 1905–1961, ed. Jolande Jacobi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0), 323.

Adapted from Richard Rohr, Wondrous Encounters: Scripture for Lent (St. Anthony Messenger Press, 2011), 122–12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Unknown, Neom (detail), 2023, photo, Saudi Arab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동굴을 탐험하는 이 사람처럼, 사랑으로 인해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는 것은 때때로 알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