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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주간 월요일 / 이수철 신부님 ~

성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환대
“마리아처럼 삽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예수님께서 마음 편히 찾았던 집이 ‘베타니아의 집’입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가 예수님의 각별한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듯 싶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서 예수님을 환대하는 마리아의 사랑이 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환대의 표현에서, 활동가 답게 마르타는 주님께 사랑의 시중을 들고 관상가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음으로 절정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누구보다 주님의 진면목을 깊이 꿰뚫어 통찰한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바로 성주간 월요일,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주님의 종, 예수님을 만납니다. 초대 교회 신도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을 예수님으로 인식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주님의 종, 예수님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이어지는 주님의 종에 대한 묘사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이 깊이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주님의 섬세하고 자비로운 관상가의 면모입니다. 시끄럽지 않고 요란하지 않은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입니다. 이런 주님의 관상적 면모를 닮은 복음의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이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얼마나 매력적인 관상가 예수님의 면모인지요! 분명 복음의 마리아는 이런 주님의 면모에 깊이 감화받았기에 아낌없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주님의 종에 대한 다음 설명이 예수님의 사명 수행을 통해 발휘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여기서 친히 말씀하시는 분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날의 불행은 바로 이런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새삼 창조주 하느님 사랑을 믿고 체험하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특별 사명을 부여받은 주님의 종은 그대로 예수님입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인간 무지와 무명에 대한 궁극의 답은 이런 예수님뿐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하느님을 떠나 무지로 인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요, 무지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무지의 감옥에서 수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무지의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 같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 안에서 살아야 비로소 참 자유인이 됩니다.
 
 
 
역설적으로 문명의 야만시대요 날로 내면의 어둠이 짙어지는 대혼돈의 시대같습니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이 구원하는 희망입니다. 완전히 하느님을 잊은, 잃은 시대 같습니다. 마리아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무지에서 벗어난 빛의 관상가, 사랑의 관상가, 희망의 관상가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환대하는 마리아의 환대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을 측근에 모시고 있던 유다 이스카리옷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다음 환대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의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항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그대로 향유 냄새는 마리아의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 영혼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미사를 봉헌하는 성전안 분위기도 우리의 이런 내면의 향기로, 봉헌의 향기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주님께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됐을 마리아의 전적 사랑의 봉헌입니다. 마리아의 봉헌에 대한 유다의 반응이 그대로 유다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무엇보다 유다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유다는 분명 인색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예수님도 어느 정도는 예감하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써야할 때 써야 하는 돈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아오스팅 성인의 말도 생각납니다. 판단의 잣대는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격하신 주님은 마리아를 적극 두둔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내 사랑하는 마리아를 제발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늘 곁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의 사랑과 더불어, 주님의 결정적인 때를 대비하여 늘 비상용 사랑의 향유를 보관해야 함을 배웁니다. 늘 주님을 맞이할 환대의 사랑을 지니고 준비된 삶을 삽시다. 날마다 주님을 환대하는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환대의 사랑, 관상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