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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주간 화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성주간 화요일 강론>(2025. 4. 15. 화)(요한 13,21ㄴ-33.36-38)

『누구나 넘어질 수 있는데, 그래도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복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21ㄴ-33.36-38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1)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라는 말씀은, 유다의 선택을 존중하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표현만 보면, ‘어서’ 하라고 재촉하시는, 또는 명령하시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유다의 배반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런 말씀일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를 묵상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유다의 선택을 존중하셨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선택 자체를 존중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반어법’을 사용해서 말씀하신 때가 더러 있기 때문에,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라는 말씀도 ‘반어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러면 이 말씀은, “네가 하려는 그 일을 하지 마라.” 라는 마지막 호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유다가 ‘하려는 일’은 ‘배반’입니다. 그가 그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은 ‘회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늦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고 타이르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하려는 일’과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정말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막무가내로 직진할 때가 있고, 그러다 나중에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과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과 ‘내가 해야 하는 일’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고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영광’을 말씀하신 것은, 당신의 부활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만일에 십자가 수난이 ‘죽음’으로 끝난 일이라면, 십자가는 ‘비참한 굴욕’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부활’의 전 단계였고, 부활은 영광이기 때문에 십자가도 영광이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 보지만, 신앙인들은 십자가에서 사랑, 승리, 생명, 영광을 봅니다.

3)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당신이 가시는 길은 당신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과 제자들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그 길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은, 나중에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실 때, 사도들과 신자들도 모두 함께 죽어버린다면, 증언을 할 사람이 없게 됩니다.

4) 루카복음을 보면 다음 말씀이 더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부인하겠지만, 그가 금방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 사도의 부인은 거의 같은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배반한 일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한 일이고, 베드로 사도의 부인은 아직 믿음과 의지가 약한 상태에서, 외부의 상황에 휩쓸린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만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배반자 유다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회개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그 자신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송영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