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3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초등학교 다닐 때,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두 친구가 교실에서 싸웠는데, 마침 지나가시던 담임선생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두 친구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아주 이상한 벌을 내렸습니다. 상대의 뺨을 서로 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때림의 강도가 약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호통을 치면서 그렇게 약하게 때리면 자신이 직접 세게 때린다고 하셨습니다. 그 뒤 강도가 세졌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세게 때리는 것입니다. 둘의 얼굴은 보기 싫을 정도로 벌겋게 부어올랐습니다.
방과 후, 이 둘은 또 싸웠습니다. 왜 먼저 세게 때렸냐는 이유였습니다. 이 둘은 “네가 먼저 더 세게 때렸잖아.”라면서 싸웠습니다.
아마 서로 상대에게 맞은 강도 그대로 때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맞은 사람은 더 세게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앙갚음을 위해 서로에게 때리는 강도를 높였던 것이지요. 실제로 자기 맞은 것에 40% 정도 세게 때린다고 합니다. 나만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기 머리를 휘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수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이익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과 행동이 과연 자기를 편하게 할까요? 그럴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 보복의 말과 행동이 상대를 통해 더 큰 보복으로 자기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빨리 이를 끊어 버리는 것이 더 큰 이득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이 필요하고, 평화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이기는 삶이 됩니다. 모든 폭력은 결국 지는 삶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말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이미 다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이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갈수록 커가는 예수님의 인기에 사람들은 더 몰려들 것이고, 이 모습이 당시 지배하던 로마를 자극해서 상황이 악화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신앙을 존중해주는 로마였는데, 신앙의 탄압까지 받게 되어 예전의 바빌로니아 유배 생활의 반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들의 속이 타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커다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제거할 마음을 품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없어야 자기들이 산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결국 주님의 양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평화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손해 본다는 생각보다는 자기 마음의 상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기 삶을 잘 사는 일이 곧 자기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다(장자).
사진설명: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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