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고 하시면서 “새 계명”을 주신 다음, 제자들이 보인 세 번째 반응입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라는 필립보의 간청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요한 14,9-11)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실, 필립보의 간청은 마치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과 같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알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도 자신이 헤엄쳐 다닐 수 있는 것이 물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듯,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 쉬는 줄을 모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사람은 아버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길’(신앙의 눈길)로 보는 일,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4항).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진정한 앎의 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음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믿고 청하면,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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