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평화’를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어원상 ‘완전하다’는 뜻으로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 정의와 진실을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한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 완전한 정의를 인간사회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219항; 민족들의 발전 179항 재인용)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 혹은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로,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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