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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0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5,14-21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라반의  말씀사랑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산 위에서 군중을 향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맹세란, 임무나 약속을 꼭 실행하거나 목표를 반드시 이루겠다고 언명체계를 통해 굳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맹세할 때는 흔히 자기보다 더 높고 공신력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걸고 하는데, 그 존재의 힘과 확실성에 기대어 신뢰를 보장받으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으나 대신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 자기 목숨 등을 두고 맹세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맹세할 때 기대는 존재들 중 어느 것 하나 사람이 제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맹세를 하는 자신도 그 맹세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요. 그저 맹세하는 이의 결연한 말이, 그 말에 언급된 존재의 위상이 믿음을 불러일으켜 그 순간을 넘기는 것입니다.

 

결과나 실행 여부는 맹세를 듣는 순간에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현재로선 말밖에 드러난 게 없으니까요.

여기서 "거짓 맹세"(마태 5,33)의 가능성이 드러납니다. 벗님도 가끔은 겪기도 하시겠지만, 어떤 불의한 목적을 가지고,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짐짓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말로 덕을 보려고, 허세나 허영으로, 뒷일은 나몰라라 하면서 맹세를 남발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맹세는 언급한 존재의 위상을 손상시키는 고의적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꼭 그런 부정적 사안만이 아니더라도, 말한 이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우는 맹세는 종종 맹세한 이의 숨통을 조이는 과도한 굴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아직 완결되지 않은 결과를 입과 말로 먼저 완성하는 듯 보여주는 맹세는 한치 앞도 모르는 무지하고 나약한 인간에게 자칫 짐이 되고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서약도 그럴 위험이 다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입니다. 변명도, 허세도, 호언장담도, 과시도, 약속도 필요 없으니 단순히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 또는 "아니요"라는 솔직담백하고 순수하며 진실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2코린 5,15)라는 말로 예수님의 맹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구구하게 말 잔치로 끝날 맹세가 아니라 실제 희생제사로 완성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은 행동으로 맹세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예!"는 하느님 이름을 팔아 당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거짓 맹세가 아니라, 인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신 하느님께 죽음으로 드린 순명의 응답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진정한 맹세란 말이 아닌 투신과 실행으로 완결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2코린 5,19)

예수님이 내놓으신 목숨이라는 맹세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 되었고, 하느님께서 "잘못을 따지지 않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신"(2코린 5,19) 덕분에, 감히 "그리스도의 사절"(2코린 5,20)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사도 바오로의 어투가 느껴지십니까? 그는 가르치려 들거나 명령하는 게 아니라 "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때문에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로 만드셨고, 그 덕에 우리는 잘잘못도 들춰지지 않고 거저 "의로움"이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을 이루신 하느님과 화해하자고 빌고 또 빌고 있습니다.

이런 사도의 모습에는 예수님의 "예"가, 그분의 맹세가 겹쳐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그치기에"(2코린 5,14) 말뿐이 아닌 진정 변화된 자세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코린토인들의 화해가 사도에게 예수님만큼의 절박하고 간절한 바람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그 맹세가 되어야 하고, "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화해의 말씀이 입과 말이 아닌, 삶과 투신과 변화로 전해져야 "그리스도의 사절"로서의 소명이 완성될 수 있으니까요.

 

어깨에 힘을 빼고,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면서 꾸준히 묵묵히 고요히 충실히 "예" 또는 "아니요" 한 바를 지켜나가다 보면 내면에 들리는 목소리가 있을 겁니다.

바로 오늘 복음 전반에 깔린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맹세가 당장 이 순간은 넘기게 해 주고, 또 지금 불타오르는 의욕을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얼마나 길고 지난한 방향성과 긴장과 실행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좁은 길"인지를 너무도 잘 아시는 그분께서 애틋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나지막히 속삭이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그렇게까지 용쓰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이미 너를 위해 맹세했고 다 이루었단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높고 세고 강한 누군가를 끌어다 대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충분히 증명해 주셨고 보증해 주시는 신분이 우리 영혼에 새겨져 있으니까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리스도의 사절"이며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아멘. 피앗!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