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제1독서
<우리를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6,1-10
형제 여러분,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이 직분이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6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9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10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알라반의 말씀사랑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일상적인 요구나 갈등 사안들을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들고 있기에 사실 더 곤혹스럽게 다가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태 5,38)
이는 뜻하지 않은 사고나 피해를 당하게 되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복수나 앙갚음을 통해 보상을 받도록 법이 규정해 준 것입니다. 법은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되 복수가 피해 정도를 초과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주는 구실을 했지요.
"맞서지 마라."(마태 5,38)
그런데 예수님께서 앙갚음의 여지를 단호히 잘라내십니다. 받은 피해가 무엇이든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되받아치는 행위조차 막으시니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인간 존재에게 예수님의 요구는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얼마만큼 바보가 되어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걸까요?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 겉옷까지 내주어라. ...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주고 ... 물리치지 마라."(마태 5,39-42) 자기 자신과 가족, 공동체의 안녕과 안위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입장에서는 갑갑한 권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수모는 물론 가진 것마저 다 내줘야 할 판입니다. 어디까지 빈털털이가 되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세속적 시각과 영의 시각에서 대비시켜 서술합니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2코린 6,1,) 자기 일행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듯 보이며, 벌을 받는 자같고, 슬퍼하는 자같고, 가난한 자 같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요. 사도들은 실상 "진실하고, 인정을 받으며, 살아 있고, 죽임을 당하지 않으며, 늘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한결같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이 직분이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애를 씁니다. 그들의 중심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시종일관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대비적으로 제시하는 개념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두 축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세상의 시각과 영의 시각은 여전히 선택에 있어 고민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감정이 거부하거나, 신앙은 독려하지만 본능이 반발하는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모욕이, 중상과 칭찬이 똑같이 우리 인격의 존재 가치를 뒤흔들지 않고 비등한 가치로 다가온다면 사실 예수님 말씀처럼 맞설 필요도 우쭐할 이유도 없겠지요.
뺨을 맞아도 칭송을 받아도 나는 나임을 알기에 동요되지 않습니다. 타인의 대우에 속지 않고 자기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가치를 매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건 개인의 영달이나 발전이 아닌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그분의 뜻대로 투신하니, 호평이든 악평이든, 존경이든 공격이든 그 또한 하느님의 일로 여기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지키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인 만큼 당장의 손해와 직결되니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곤란한 명령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실까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속내는,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중심을 갈아타라는 것! 그동안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었다면, 이제는 중심을 사랑으로 옮기라는 뜻입니다.
곱절로 맞아 아프고 억울하고, 빈털털이 될까봐 두렵고, 부탁보다 더 해줄 때 바보같이 보일까 걱정하는 이면에는 자기에 대한 보호 본능이 자리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무조건반사적인 자기애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중심이 "사랑"으로 옮겨가면, 대응은 크게 달라집니다. 사랑에 집중하고 있다면 영광도 모욕도 중상도 칭찬도 차이가 없습니다.
지켜야 할 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닌) 자존심이나 재산, 안위가 아니라 사랑이고, 그것도 나를 공격하는 이까지 포함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말씀 안에는 "악인을 사랑해 주어라"는 간곡한 청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어떤 권고들은 추상적이어서 구체적 예를 들어줄 때 차라리 실행이 쉬운 반면, 심정적 반발로 구체적 적용이 쉽지 않은 권고들은 오히려 본질을 제시할 때 훨씬 접근이 가능해집니다. 오늘 복음 대목이 그런 경우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어떻게 다른 뺨을 또 내줄지, 빼앗으려는 자에게 뭘 더 속없이 내줄지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이제 내 사전에 '복수'란 말은 없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내 안의 사랑을 지키리라!
아무리 나를 해하려는 자라도 사랑해 보자!"고 미리미리 새 중심에 닻을 내려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심이 사랑에 정박되어 있다면, 오늘의 권고들이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하느님의 일꾼이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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