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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스크랩] 축일:11월23일 성 클레멘스 1세 교황 순교자 / 성 골룸바노 아빠스

 

Pope St Clement Adoring the Trinity-TIEPOLO, Giovanni Battista

1737-38. Oil on canvas, 488 x 256 cm. Alte Pinakothek, Munich

 

축일:11월23일

성 클레멘스 1세 교황 순교자

Pope Saint Clement I

St.Clement of Rome

San Clemente I Romano Papa e martire

Martyred 101 during the persecution of Trajan

Papa dal 92 al 101

Canonized: Pre-Congregation

Clemente = indulgente, generoso, dal latino

석공,대리석 석수의 주보

 

 

로마의 클레멘스는 성베드로의 세 번째 후계자이며 1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교황이었던 사람이다.

역사에서 보면 그가 101년에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는 4세기나 5세기에 만들어진 전설이다.

아마도 로마에서 가장 초기 본당 중의 하나인

성클레멘스 대성당은 클레멘스의 집이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던 것 같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클레멘스의 첫번째 편지는(First Epistle of Clement to the Corinthians)

-오늘날 가(假)클레멘스라고 불리는 작가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 널리 읽혔으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많은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에게서 갈라져 나간 분열에 관하여

클레멘스가 고린토에 있는 교회에 쓴 로마 교회의 편지로 되어 있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용납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는 분열을 몹시 슬퍼하면서

그들에게 일치를 호소한다.

그는 그 싸움의 원인을 ’시기와 질투’때문이라고 하였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애덕을 강조한다.

그것은 "애덕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모든 교회는 ’옛 것’과 ’새 것’사이의 양극화를 체험하고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바오로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클레멘스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골로 3,14)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켜 줍니다. …사랑에는 비천한 것도 없고 오만한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아무런 분열도 모르고 아무런 반역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화목한 가운데서 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이 뽑은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49장)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클레멘스의 첫번째 편지(First Epistle of Clement to the Corinthians)

이 편지는 고린토 교회에서 장로 배척운동에 대해

장로,집사 등의 사도적전승과 그 권위를 주장하고,

장로의 추방을 철회하고,회개하여 교회의 올바른 평화를 회복 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교회제도와 전례방식에 관해 서술하며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를 최초로 전하고

당시 교회의 상황, 사상등을 아는 데 귀중한 문헌이며,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적 율법주의 정신이 돋보이는 대표적인 문헌이다.

 

또한 그의 이름을 붙인 고린토인에게 대한 제 2편지(제2 클레멘스서)는 그가 쓴것이 아니고,

후에 로마 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이른바 가(假)클레멘스 문서도 역시 동방에서 그의 전설에 입각하여 후에 쓰여진 것이며,

후대에 이르러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널리 유포되었다고 한다.

 

 

 

 

그는 로마인이었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는 황제의 집사 친구로서, 성 베드로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는 91년에 클레토를 승계하여 교황이 되었으나, 트라얀 황제에 의하여 크리미아로 귀양갔고,

그곳의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 죄수들에게 열렬히 설교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이로 인하여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의 목에는 닻을 달고 바다 속에 던져졌다.

그는 이교를 반박하기 위하여 고린토인들에게 쓴 편지의 저자임을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정한다.

이 편지는 초대 교회의 유명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서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며,

로마의 주교가 지니는 권위를 확인해 주는 중요한 문서이다.(부산교구홈에서)

 

 

Madonna and Sts Clement and Just-MASTER of the Castello Nativity

1450.Panel.Museum of the Cathedral, Prato

 

베드로 사도를 이어 제3대 교황으로서 1세기 말엽 로마교회를 다스렸다.

고린토인들 가운데 평화와 화목을 이루고자 그들에게 유명한 편지를 썼다.

 

 

성 글레멘스 1세 교황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Cap. 35,1-5; 36,1-2; 37,1.4-5; 38,1-2,4: Funk 1,105-109)

 

하느님의 선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선물은 얼마나 복되고도 놀랍습니까!

불사 불멸 안에서의 생명, 정의 안에서의 광휘, 자유 안에서의 진리,

확신 안에서의 신앙, 거룩함 안에서의 절제

-이 모든 것은 이미 우리의 이해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마련된 선물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그것들의 수효와 아름다움은 지극히 거룩하신 창조주이시고 세기의 아버지이신 분만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약속된 그 선물의 참여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희망하는 이들 가운데 있도록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성이 신앙으로 하느님 안에 굳게 서서

마음을 다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라 행동하여 진리의 길을 따르며,

한마디로 온갖 불의와 괴벽, 탐욕과 투쟁, 악의와 기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것은 성취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이 길이 바로 우리 구원이시고

우리 제사의 대사제이시며 우리 연약한 이들의 보호자요 도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게 하는 길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하늘의 드높음을 볼 수 있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순수하고 고귀한 얼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지고 우리의 정신이 암흑과 무지의 상태로부터 빛 속에 새로워지며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불사 불멸의 인식을 맛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천사의 칭호보다 더 높은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심으로써 천사들보다 더 높은 분이십니다."

 

형제들이여, 그분의 오류 없는 계명 아래 힘을 다하여 싸우도록 합시다.

지위 높은 자들은 낮은 사람 없이는 지탱할 수 없고 낮은 사람도 높은 사람 없이는 지탱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이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다 서로 유익한 자가 됩니다.

우리 몸을 예로 들어 봅시다. 머리는 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발은 머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몸의 가장 작은 지체들도 온 몸에 있어 유익하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더욱이 온 몸의 유익을 위해 모든 지체들이 조화되고 같은 목적에 예속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 온 몸이 잘 유지되도록

각자는 받은 은총의 선물에 비례하여 이웃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힘센 자는 약한 자를 돌보아 주고 약한 자는 힘센 자를 공경해 주어야 합니다.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가난한 자는 자신의 궁핍을 해결해 주는 이가 있다는 데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현명한 자는 말로써가 아니라 선행으로 그 지혜를 나타내 보이고

겸허한 자는 자신에 대해 자기 입으로 말하지 말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게끔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서 받았으니 만사에서 그분께 감사 드리도록 합시다.

그분께 영광이 세세에 영원히. 아멘. (가톨릭홈에서)

 

 

예수께서 승천 직전 성 베드로에게 교회의 수위권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들어 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요한 21, 18).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순교에 관한 예언이며 과연 훗날에 로마에서 순교를 했다.

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인 역대의 교황도 초기의 약 30명은 그 같은 순교로 세상을 떠났다.

그 중 특히 유명한 분이 제4대의 교황인 클레멘스 1세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성 베드로에게 직접 주교로 축성되었다 한다.

어찌되었든 성 베드로, 성 바오로와 같은 시대의 출신으로 그 분들에게서 진리를 배웠으며,

그들에게서 하느님께 대한 열애의 정신을 고취 받았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또 성 바오로가 필립비 지방 신자에게 보낸 서한 중에

’나와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자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올라 있습니다"(필립 4,3)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그가 젊었을 때에 얼마나 성 바오로를 도와서 전교에 진력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가 성 리노 및 성 클레토(아나클레토) 두 교황의 뒤를 이어 베드로 성좌에 오르게 된 것도,

그의 교회에 대한 공로가 타인에 비해 컸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클레멘스가 교황이 된 때는 아직 도미시아노 황제의 박해가 끝나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탄압에 떠는 신자들을 격려하며,

또는 적의 손에 잡힌 신자들을 위로해 주며

카나콤바에 숨어 미사를 지내고 성체를 모시어 그들에게 영해 주며,

맡은 바 어린양들의 신앙을 보존키 위한 노고는 보통이 아니었다.

또한 순교자가 날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 형장에 나타나 그들에게 최후의 축복을 주었다.

 

그에게 걱정이 또 하나 늘었다. 즉 고린토 신자간에 불화와 알력이 벌어진 것이다.

교회에는 외부의 박해 보다 내부의 반목이 더 무서운 일이다.

이를 간파한 클레멘스 교황은 노쇠하여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어 정성어린 서한을 써 그들에게 보냈다.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은 두터운 애정으로 그들의 잘못을 밝히며,

그 교회의 창설자 성바오로의 낯을 보아서라도 조속히 반목을 일소하고 평화롭게 일치, 단결할 것을 설득했다.

 

 

고린토 교우들은 20년전에도 그와 같은 불화소동을 일으켰으나,

바오로의 애절한 질책에 겨우 진정을 보았는데,

지금은 클레멘스의 설득에 접하여 크게 마음을 움직이고 곧 화해하게 되었다.

그 편지는 소위 클레멘스의 서한으로서 고린토 교회 내의 알력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

로마의 주교가 교회 초대로부터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온 교회를 통치하는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을 증명한 귀중한 살아있는 역사적 재료인 것이다.

 

그 필치는 깊은 신앙과 애정이 넘치며, 구약, 신약의 지식이 풍부한 점으로는 사도 성 바오로를 방불케 하고,

간결하고 겸손한 인사안에 감히 침범치 못할 박력을 갖고 있는 점으로는 사도 성 베드로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즉 이 서간경은 4세기 말엽까지 성 바오로 서간경과 더불어 미사때 낭독 되었다.

 

도미시아노 황제의 박해에 일단 종지부를 찍고 교회가 안도의 숨을 채 쉬기도 전에,

즉 약 10년경 트리야노 황제가 박해를 가하기 시작해,

다시금 수많은 신자들이 선혈을 흘리게 되었던 중,

이번에는 연로한 클레멘스가 신앙때문에 순교할 차례가 되었다.

그 순교의 전말에 대하여는 유감스럽게도 남은 기록이 없으나,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가 영생의 책에 기록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11월 23일

성 골룸바노 아빠스

ST. COLUMBANUS

Saint Columban

San Colombano Abate

543 at West Leinster, Ireland-

21 November 615 in a cave at Bobbio, Italy of natural causes

Canonized:Pre-Congregation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주보성인

 

 

골룸바노는 유럽 대륙에서 활동한 아일랜드 선교사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청년 시기에 육적 유혹으로 큰 시련을 겪은 후 수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수녀에게 충고를 청했다.

그는 그녀의 충고에서 세상을 떠나라는 부르심을 느꼈다.

그는 먼저 러프언의 어느 섬에 사는 한 수도자에게 갔다가

다음에는 밴고르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대수도원으로 갔다.

 

여러 해 동안 은거와 기도 생활을 한 다음

그는 12명의 동료 선교사들과 더불어 골-오늘의 프랑스-지방으로 갔다.

그들은 그들의 엄격한 규율과 설교로,

그리고 성직자들의 게으름과 시민들의 불화로 특징지을 수 있던 그 당시에

애덕과 수도 생활에 완전히 헌신함으로써 많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콜룸바노는 유럽에 여러 개의 수도원을 세웠으며 그곳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모든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그도 프랑스 주교들의 불평에 대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아일랜드 관습을 인정받기 위해서 교황에게 호소해야 했다.

그는 왕의 결혼을 지적하면서 그의 방탕한 생활을 꾸짖었다.

이것은 황태후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콜룸바노는 아일랜드로 되돌아 가라는 추방령을 받았다.

그의 배는 폭풍에 떠돌다가 유럽에 정착했으므로 다시 그의 일을 계속했으며

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롬바르디아 왕의 호의를 얻었다.

 

이 마지막 해에 그는 유명한 보비오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술에는 참회와 아리아니즘에 관한 논문들이 있으며 설교와 시 그리고 자기 수도원의 규칙서 등이 있다.

 

 

대중의 성적 방종이 그 절정에 이르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콜룸바노만큼 순결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에 대한

교회의 감동적인 기억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안일에 빠진 서구 세계가 수백만의 굶주린 사람들과는 비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현대에서,

우리는 아일랜드 수도자들의 엄격한 생활과 규율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너무 엄격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너무 멀리 나아 갔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나아 갈 수 있을 것인가?

 

 

콜룸바노는 룸바르디아에 있는 이단적 교리에 대하여 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이 세상의 가장 먼 곳에 사는 우리 아일랜드 사람들은 성베드로와 성바오로,

그리고 성령의 인도 아래 거룩한 법전을 기록한 제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이 나라에서 성베드로의 어좌에 대한 나쁜 평판으로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로마는 위대하고 멀리까지 알려졌지만

그것은 오직 이 베드로의 교좌 때문에 우리에게 영광스럽고 위대한 것입니다.

당신의 양떼와 이리 사이에 서서 교회의 평화를 지켜 주십시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6세기 전반기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신학과 일반 학문을 공부한 후 수도 생활을 택하여 프랑스에 갔다.

그 곳에서 많은 수도원을 세우고 엄격한 규율로 다스렸다.

유배형을 받아 이탈리아로 가 보비오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스도교 생활과 수도 생활을 증진시키고 615년 세상을 떠났다.

 

 

성 골룸바노 아빠스의 [지침서]에서

(Instr. 11,1-2: Opera, Dublin 1956,106-107)

 

하느님의 유사성에 따라 창조된 사람의 위엄은 참으로 엄청납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과 유사성으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형제들이여, 이 표현의 위엄에 주목하기를 간청합니다.

전능하시고, 보이지 않으시고 파악할 수 없으며 표현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당신 모상의 위엄으로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사람, 영과 흙 사이에 공통되는 것이 무었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신 영원성의 모상을 주시고

당신 행위의 유사성을 주시는 것은 참으로 관대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그 위엄을 간직할 줄 안다면 하느님의 유사성에 따라 창조된 사람의 위엄은 참으로 엄청납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그 영혼에게 부여하신 기능들을 올바로 사용할 줄 안다면 하느님과 유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심어 주신 그 모든 능력들을

우리가 다시 되돌려 드려야 한다고 계명들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첫 계명은,

태초부터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주님이 우리를 이미 사랑해주셨기에

우리도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안에 그분과의 유사성을 새로이 나타나게 합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켜라." 주님의 계명은 서로간에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위와 진리"로써 실천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형상을 잃지 않고 올바로 간직된 우리의 유사성을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이 유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이 거룩하신 만큼,우리 생활의 거룩함으로써 간직할 것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 되어라."

그 다음 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의 말씀에 따라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그 유사성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선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선과 진리로써 그것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것이 아닌 다른 그림을 그려서는 안되겠습니다.

난폭하고 성을 잘 내고 교만한 사람은 폭군의 유사성을 자기 안에 그려 넣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폭군의 유사성을 그리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상을 우리 안에 새겨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란 좋은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보존하지 못한다면 이득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가장 좋은 것은 또 가장 연약합니다.

귀한 것들은 그것을 간직하는 데 그만큼의 주의와 노력을 요합니다.

말 한마디로 부서지고 사소한 모욕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너무도 연약한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에겐 다른 이들에 대해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일에 대해 참견하며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을 비판하는 일 이상으로 좋아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처럼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솜씨를 익혀 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침묵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만일 무엇을 말하고 싶다면 화평의 말을 해야 합니다.

(가톨릭홈에서)

 

 

6세기 전반기에 아일랜드의 웨스트 렌스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과 일반 학문을 공부한 후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정하고 얼마동안 시넬이란 수도자와 함께 루그 에른섬의 클렌 이니스에서 살다가,

뱅골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12명의 다른 수도자와 함께 590년경 골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이 선교 활동이 성공적이었으므로 뤽세이유와 폰텐느 지방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추종자들이 유럽 전역을 선교하면서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반대를 받았는데, 특히 프랑크계의 주교들로부터 극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는 성좌에 서한을 보내어 실정을 보고하는 한편,

603년에 샬롱에서 개최된 갈리아 시노드에 불참하면서 항의했다.

또한 610년에는 부르군디의 국왕 테오돌기 2세의 결혼을 반대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모든 아일랜드 수도자가 추방당하는 곤경을 겪기도 햇다.

그후 그는 롬바르디의 아리안 왕 아질울프의 영접을 받고 이탈리아 선교에 착수했다.

 

그 당시에 학문과 문화 그리고 영성의 중심지로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이처럼 많은 수도원을 세우고 엄격한 규율로 다스렸으며

그리스도교 생활과 수도 생활을 증진시키고 615년 11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골룸바노는 자신의 수도회 규칙, 강론집, 시 그리고 아리우스 이단 반박문 등 수많은 글을 남겼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골롬반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창립자는 아니지만, 외방선교회(會)의 주보성인입니다.

 

그는 543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560년경 하느님께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치기 위해서 집을 영원히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엎드려 애원하는 어머니의 심한 반대 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곁을 떠나 집을 나섰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수도생활을 하면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서말씀에 따라 부모와 집 뿐만아니라 고향까지도 떠나기로 결정하고

12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배는 프랑스의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골롬반은 외딴 시골 지역에서 수도원을 건립하여 발전시켰으며,

획일적인 교회의 문화에서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여

각자의 방식에 따라 부활절을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그 지역 정치가들의 불의한 일을 반대하여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20년동안 지도했던 수도자 중에서 20명의 성인이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의 발전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나그네’가 되기 위하여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유럽의 여러지역을 다니며 선교를 하였고, 615년 11월 23일 자신이 마지막으로 설립한

북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수도회는 아니지만 성 골롬반이 보여주신 모습처럼 자기의 나라를 떠나,

다른 문화 속에서 살며,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

정의를 위해 일하는 선교활동을 하고자 합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홈에서  www.columban.or.kr,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  www.columban.to

 

 

변방선교.성이시돌 피정의집.임피제파트리치오신부.

2003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 선교70주년 기념 특집호 표지.

 

 

 

* 이오나의 성 골룸바 아빠스  San Columba di Iona Abate (521-597년)

  축일:6월9일.게시판180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사랑과
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
출처 : 축일:11월23일 성 클레멘스 1세 교황 순교자 / 성 골룸바노 아빠스
글쓴이 : jeosah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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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치와 화해의 표시로서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0) 2008.11.22
[스크랩] 영성체를 고대하는 열망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0) 2008.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