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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들의 잔을 마시면서

우리들의 잔을 마시면서

 

 

 


우리의 삶을 선택하기


삶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삶이다.” 그러나 또한 “나는 이것이 나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이다. 삶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실존, 그 모든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오랫동안 우리들은 우리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만한 능력이 없다고 느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은 삶 아니면 적어도 다른 삶을 가지려고 애써왔을 것이다. 자주 우리의 “운명”에 대한 저항이 우리 안에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우리 부모를, 우리 피부 색깔을, 우리의 성별을 선택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의 성격, 지성, 신체적 용모 혹은 버릇 따위도 선택하지 않았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삶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온갖 가능한 일을 해보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몸이었기를, 또 다른 때에 살고 또 다른 정신을 가졌으면 한다! 우리의 심연에서 울부짖음이 일어난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나? 나는 그렇게 청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는데 말이야.”


그러나 점차 우리 자신의 실제와 친구가 되어가고, 우리의 슬픔과 기쁨을 연민으로 바라보며,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우리의 고유한 잠재성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게 되면, 항의를 넘어 우리의 삶의 잔을 입에 대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온전히 마실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할 때 자주 이렇게 말한다; “자,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에서 최상을 얻어내세요.” 그러나 “최상을 얻어내는 것”은 잔을 마신다는 것과 다르다. 우리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단지 나쁜 상황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대로 잘 이용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희망이 가득하고 용감하며 자아확신이 있는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의 지식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실제를 직면하며 마음속으로부터 그 실제에 응답하는 것이다.


 

 

 

 

불평하는 것은 자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큰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공격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그 말들은 독선적이고 자기연민, 질투의 말들이다­더 깊은 불평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받아야 할 것을 결코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마음이다. 그것은 끝없이 미묘하고 한편으로 또 그다지 미묘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되는 불평이다. 이런 불평은 인간의 회한을 밑바닥까지 닿게 만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울부짖는 불평이다: “나는 너무 열심히 노력했고, 너무 오래 동안 일했고 너무 많이 했다. 그런데도 나는 남들이 너무나 쉽게 얻는 것을 받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하지 않고, 나를 초대하지도 나와 함께 놀아주지도 않는가? 삶을 너무나 쉽게 너무나 가볍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지나친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왜 나를 존중하지 않는가?”


이렇게 말없이 혹은 말로 하는 불평 속에서 나는 내 안에 있는 큰아들을 알아본다. 작은 거부들, 작은 무례함, 작은 무심함에 대해 불평하는 나 자신을 자주 발견한다. 때때로 나는 내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 투덜대는 소리, 불퉁거리는 소리, 신음하는 소리, 잔소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나오는 것을 깨닫는다. 문제꺼리에 더 머물수록, 내 상태는 더 악화되어간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즉, 불평하는 것은 스스로 계속하는 또한 반(反)생산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동정심을 일으키고 내가 너무나 원하는 어떤 만족감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불평을 표현할 때마다, 결과는 항상 내가 얻으려고 했던 것과 정반대이다. 불평하는 사람하곤 함께 살기가 힘들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내뱉는 불평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비극은 자주, 일단 표현된 불평이 가장 두려워하는 결과, 즉 거부를 더 많이 일으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의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큰아들의 태도는 꽤 이해할만한 것이 된다. 큰아들이 들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음악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집안에 경사가 일어난 것을 알았다. 즉시 그는 의심이 일어났다. 일단 자기 거부적인 불평이 우리 안에서 형성되면 즐거움까지도 더 이상 우리를 즐겁게 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자발적인 응답은 그 힘을 잃는다... 즐거움과 회한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음악과 춤은 기쁨으로 이끌지 못하고 더 큰 위축감을 가져오고 만다.

 

 



빌의 이야기


내가 기억하는 매우 감동적인 기념제는 빌의 인생책이었다. 인생책은 사진들, 이야기들, 편지들을 전기형식으로 함께 모은 책이었다. 빌이 새벽공동체에 왔을 때는 16세였고, 그는 약간의 기억들을 가져왔다. 그는 매우 힘든 유년기를 보냈고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일관된 경험들이 거의 없었다. 그의 과거는 너무나 괴롭고 부서졌으며, 너무 외로운 것이어서 그는 그것을 잊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25년 동안 새벽공동체에 살면서 그는 점차로 새로운,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그는 친구들을 만들었다. 그는 한 가족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주말이나 휴일에 그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보올링 클럽에 가입했고, 나무일을 배우고 나와 함께 멀리 여행을 가기도 한다. 지난 수년간 빌은 기억할만한 풍요로운 삶을 살아 왔다. 심지어 고통스러운 유년기 체험들을 기억했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생명과 사랑을 준 사람들로서 돌아간 부모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자유와 용기를 얻기조차 했다.


그러므로 빌의 인생책에는 이제 기억할만한 풍부한 이야기 꺼리들이 있게 되었다. 말하기가 고통스럽긴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많은 친구들은 그들이 그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말해주는 편지를 보냈다. 어떤 친구들은 그에 관한 기사가 난 신문스크랩과 사진들을, 또 다른 이들은 그에 대한 사랑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내기도 했다. 6개월간의 작업이 끝난 후, 책은 마침내 준비가 끝났고 이제는 책만 아니라 그 책이 상징하는 빌의 삶을 기념할 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공동체 경당에 모여 함께 축하했다. 빌은 책을 높이 쳐들어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했다. 책은 예술적으로 디자인된 페이지들과 함께 아름다운 색깔의 링바인더로 묶어졌다. 그것은 빌의 책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작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책과 빌을 축복했다. 나는 이 책으로 빌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며 그가 얼마나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기를 기도했다. 또한 빌이 삶의 모든 순간들­그의 슬픔 뿐만 아니라 즐거움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기를 기도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 빌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도를 끝냈을 때 그는 나를 끌어안고 크게 울었다. 그의 눈물이 내 어깨 위에 떨어질 때에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깊은 감동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빌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들어 올려졌고 이제 그는 그의 삶이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빌은 여행할 때에 그의 인생책을 들고 간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이 부끄러운 삶이 아님을 믿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 책을 보여준다. 그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었다.

 

 

 

 

출처 : 우리들의 잔을 마시면서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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