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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스크랩] 고 독

고 독

 

 

 


 

 

변화의 용광로


고독은 변화의 용광로이다. 고독 없이 우리는 우리 사회의 희생자로 남아있고 가짜 자아의 환영 속에 계속 빠져 있게 된다. 예수 자신도 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갔다. 용광로 속에서 그분은 세상의 세 가지 욕망과 대면하게 된다. 인기(“돌을 빵으로 만들라”), 명성(“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리고 권력(“이 세상 모든 왕국을 주겠다”)의 욕망이다. 용광로 속에서 예수는 하느님을 자신의 정체성의 유일한 원천으로 확인했다(“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 고독은 위대한 투쟁과 위대한 만남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가짜 자아의 욕망과 싸우는 투쟁 그리고 새로운 자아의 본질로 그분 자신을 내놓는 사랑의 하느님과의 만남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고독은 사적인 치료의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고독은 회심의 자리이다. 낡은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자리이며 새로운 사람, 인간이 떠오르는 자리이다.

고독 속에서 나는 나의 발판을 치워버린다: 이야기할 친구도 없고, 전화 걸 일도 없으며, 참석해야 할 모임도, 즐겨야 할 음악, 정신없이 빠질 책도 없다. 그냥 나 자신만 있다­. 벌거벗고, 부서지기 쉬우며, 약하고, 죄 많고, 빼앗기고, 부서진 나. ­아무 것도 없다. 나의 고독 속에서 내가 직면해야 할 모습은 이 아무 것도 없음이다. 너무나 공포스러운 없음이어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친구들, 일 그리고 기분 전환꺼리로 달아나고 싶다. 그래서 나의 없음을 잊어버리고 내가 무엇인가 가치 있다고 믿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고독 속에 머물기로 결정을 내리자마자, 혼란스러운 생각들, 귀찮게 하는 영상들, 환영들, 기괴한 연상들이 마치 바나나나무에 매달린 원숭이들처럼 내 마음속에서 날뛴다. 이제 숙제는 내 고독 속에서 견디는 것, 나의 모든 유혹적인 방문자들이 문을 두드리는 데 지쳐서 나를 홀로 내버려두고 떠날 때까지 그냥 나의 방에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가짜 자아에 죽는 투쟁이다. 그러나 이 투쟁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기엔 너무나 역부족이다. 자신의 무기로 악마와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바보이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악의 힘을 무찌를 수 있다. 오직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고독의 시련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사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의 그리스도이고, 그분이 우리의 참다운 자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천천히 우리의 욕망이 사그러 지도록 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매일 물러나 머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사막, 욕망을 떨쳐 버리고 우리 주님의 온화한 치유의 현존 속에 머물 수 있는 사막을 만들어야 한다.  고독은 단지 목적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다. 고독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고독 속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 모상대로 다시 지으며 세상의 욕망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고독은 우리의 구원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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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공동체


고독은 함께 하는 시간과 대조되는 사적인 시간이 아니다. 또한 고독은 우리의 피곤한 정신을 회복하는 때도 아니다. 고독은 공동체 생활의 무슨 중간휴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고독은 공동체가 성장하는 기반이다. 혼자 기도하고 공부하고 책을 읽거나 쓰고 혹은 매일 직접 사람들과 관계를 맺던 자리를 떠나 그냥 조용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더 깊은 친밀함 속으로 들어간다. 오직 우리가 함께 말하고 놀며 일할 때에만 서로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함께 할 때 많은 성장이 일어나지만, 그러한 상호작용은 고독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들이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다른 사람과 맺는 친밀함이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신체적 현존이 만들기 힘들거나 만들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를 발견한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말, 제스츄어, 행동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결속, 우리 자신의 노력이 만들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깊은 사람들 사이의 끈을 깨닫게 된다.

 

고독은 공동체 삶에 있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치시키려는 행동에 앞서 있는 일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함께 있기 전에 이미 함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공동체 삶이 우리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일치되어 있는 실제에 순종하는 응답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고독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을 목격하며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요한Ⅰ서 4,19)서로 사랑한다고 선포한다. 고독은 구경꾼들이 “그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라”고 말하게 만드는 자유의 공동체를 창조한다. 



훈 련


자연을 거니는 것, 예수기도 같은 짧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 간단한 노래, 어떤 움직임이나자세들. ­이런 것들과 수많은 작은 것들이 고독을 훈련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형태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지, 또한 충실하게 계속 될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 가끔씩 한 시간을 채우며 하는 것보다 매일 10분간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낫다. 또한 다른 자세들을 계속 실험해 보는 것보다 한 가지 자세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좋다. 단순함과 일정함이 우리의 길을 찾아가는데 최상의 안내자들이다. 단순하고 정규적으로 고독을 훈련하여 마치 먹고 자는 것처럼 일상 행위가 되도록 해 보라.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시끄러운 걱정들은 천천히 위력을 잃게 될 것이고 하느님 성령의 새롭게 만드는 역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비록 고독의 훈련은 우리에게 별도로 시간과 공간을 내도록 요청하지만,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서 머물 수 있는 고요한 방처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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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으로부터 나오는 창조


나는 모든 창조가 우리의 외로움과 어느 정도 맞닿는 것을 요구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외로움과 직면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자기 표현은 심각한 한계를 갖게 된다. 글을 써야 할 때 그래서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종이를 보게 될 때에, 나는 나 자신의 글을 종이에 쓰기 전에 또 다른 책을 펼쳐보고 싶은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의자를 꽉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하루를 바쁘게 보낸 후 혼자 자유롭게 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우편함을 살펴보거나, 전화를 한번 더 걸고 친구를 또 만나 몇 시간 보내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한다. 그리고 교육사업이란 것이 온통 강의, 세미나, 회의, 과제, 시험들로 꽉 차 있는데 실상 하나의 거대한 오락에 불과하고 때때로 즐겁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외로운 자아와 직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직면은 탐색과 연구의 중요한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교육기관의 첫 번째 과제는 자신들과 자신들의 세계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유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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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성소


가족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신비스러운 성소는 고독을 제공하는 것이다. 고독은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이 서로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다: “절대로 성령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라”고 바오로사도는 말한다. 고독 속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그분 모습을 드러내고,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늘 기뻐하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창의성이 그 뿌리를 찾고 우리의 진정한 생명력이 솟아 나오는 내적 자리를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우리 존재가 결정된다고 믿도록 요구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어떤 중요한 일을 하면 우리는 중요한 존재이다. 어떤 지적인 일을 하면 지적인 존재가 된다. 가치 있는 일을 하면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야 할 일, 몰두하는 것에 매우 관심을 둔다. 그리고 우리가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걱정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무엇을 하는 것으로 우리 존재가 결정된다고 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영혼을 세상에 파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 존재를 결정하도록 허용한다. 실제로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이 되었고, 늘상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항상 사람들이 우리를 지적이고 가치 있으며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은 그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고독의 선물이다. 가짜 자아에 기반을 둔 가족, 점유와 선입견, 판단과 의견에 얽혀진 자아들로 구성된 가족은 실패하기 쉽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고독 속에서 그들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도록 서로에게 고독을 허용하는 정도에 따라 참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 가족은 고독이 고독에게 입맞추고, 릴케가 말하듯이 “고독들이 서로에게 인사하는” 자리이다. 

 

 

  


출처 : 고 독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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