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스크랩] 기도

기도

 

 




 

기도의 교향곡(과테말라에서)


참으로 모든 것은 다 기도이다. 그러나 오직 깊히 투신한 사명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기도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산티아고의 교회에서 일요일 오후 성찬례를 봉헌하는 동안 최고로 뚜렷하게 보여졌다. 죤(죤 베시 신부)은 하얀 장백의를 입고 제단 뒤에 섰고 밝고 다양한 색깔의 영대는 마을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죤 앞에는 2천명이 넘는 여성들, 남성들, 아이들 등 추뚜힐 사람들이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다. 죤이 성찬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은 큰 소리로 자신들의 기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두려움과 희망을 표현하고, 선호하는 것을 청하며, 감사를 드리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교회는 점점 더 커져가는 수천 명 사람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고 탄원과 찬양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기도의 교향곡을 들으면서 나는 모든 인간 존재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 주변에 모여들어 하나의 거대한 성찬기도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사제가 되었고 빵과 포도주와 함께 그들의 삶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은 하나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 십자가위에서 죽고 영광 중에 다시 부활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 비참함과 기쁨, 절망과 희망, 두려움과 사랑, 죽음과 삶 - 모든 것이 이 기도의 물결 속에 하나가 되었고 마침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주의 기도 속에 합쳐졌다. “나는 당신이 와서 나와 내 백성과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하고 죤이 말했다. 이제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고 우리가 우리의 삶을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하나의 기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더 깨닫게 되었다. 



머리로부터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우리 마음을 두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잠자리에 누워 많은 걱정 때문에 잠들 수 없을 때, 잘못 될 수도 있는 모든 것들에 몰두하며 정신 없이 일할 때, 죽어가는 친구에 대한 염려로 마음을 잡을 수 없을 때 -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 나라에 내 마음을 기울인다? 좋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간단한 대답은 할 수 있는 한 주의를 기울여 기도를 천천히 함으로써 머리로부터 마음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도 부러진 다리를 고쳐 달라고 청하는 사람에게 목다리를 주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기도한다면, 기도가 우리를 치유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당신이 마음으로 주의기도, 사도신경, 영광송을 기도한다면, 그게 시작이 될 수 있다. 아마도 당신은 시편 23장을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을지 모른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아니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서간이나 프란치스꼬의 기도도 괜찮다: “주님, 저를 당신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잠자리에 있거나, 차를 운전하고 버스를 기다릴 때, 혹은 개와 함께 산보할 때 당신은 이런 기도들 중의 하나를 천천히 마음속에 새기면서 그냥 존재를 다해 그 기도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보려고 노력해보라. 걱정 때문에 끊임없이 방해를 받겠지만 계속 기도의 말씀에 돌아가보면 점점 걱정들이 덜 강박적이 되고 진짜로 기도를 즐기기 시작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머리로부터 당신 존재의 중심 속으로 내려오게 되면 그 치유하는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


기도 : 세 가지 규칙들


“나의 마음의 기도는 무엇인가?”라는 개인적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가장 개인적인 기도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지 알아야한다. 고유의 역사, 배경, 성격, 영감 그리고 행동할 자유를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과의 친밀함 속으로 들어가도록 초대되었는지 발견하기 위하여 어디를 바라보며 무엇을 하고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우리 마음의 기도에 대한 질문은 실상 우리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소명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 몇 가지 안내지침을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도가 참으로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2)라고 보여주는 사람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세 가지 “규칙들”이 늘 발견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몰두하여 읽는 것, 하느님의 소리에 침묵 속에서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영적 지도자를 믿고 복종하는 것이다. 성서없이, 침묵의 시간 없이, 우리를 지도하는 사람없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성서를 붙들고 읽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자신을 열기 위하여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다. 성서를 읽는 것은 보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학문적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 하나 하나와 모든 것을 다 분석과 토론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를 관상과 묵상으로 이끌어야 한다. 말씀들을 갈라놓기보다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말씀들을 한데 묶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동의하는가 아닌가를 걱정하지 말고 어떤 말씀들이 우리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이며 우리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말씀을 흥미 있는 대화나 글쓰기의 잠정적인 주제로 생각하는 대신, 그 말씀들이 우리 마음의 가장 숨겨진 구석으로 뚫고 들어오도록 기꺼이 허락해야 하며, 아무런 말도 아직 그 입구를 찾지 못한 우리 내면의 심연까지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고요한 시간을 가져야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모든 시간을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내놓고 싶어도, 단 일분, 단 한시간, 오전, 오후, 한 주간, 한 달 등 하느님을 위한 얼만큼의 시간과 그리고 그분만을 위한 시간을 비워두지 않는다면 우리의 바램은 결코 채워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훈련과 모험을 요구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처리해야 할 더 긴급한 일이 있고 “단순히 그곳에 앉아 있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자주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비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무력하게 침묵하는 것이 모든 기도의 핵심이다...

 

성서를 묵상하며 읽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고요한 시간을 가지는 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침묵 속으로 이끈다. 침묵은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준다...

 

그러나 말씀과 침묵은 다 지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속이지 않는지, 우리의 열정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씀들을 그냥 뽑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의 상상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소리를 듣고 비전을 보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느님께로 가는 그들의 길을 발견할 뿐이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 누가 판관이 될 수 있는가? 감정과 영감이 그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과 머리보다 더 큰 존재이다. 너무나 쉽게 우리는 우리 마음의 욕망과 우리 정신의 사고들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느님의 소리와 우리자신의 혼동 혹은 우리가 도저히 좌지우지할 수 없는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다른 모든 소리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도자, 안내인, 상담자를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모든 것을 잊고 그냥 실망 속에 잠겨있고 싶을 때 우리를 격려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언제 말씀을 읽고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 제안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또한 어떤 말씀들을 성찰해야 하며, 침묵이 많은 두려움만 일으키고 평화를 주지 못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침묵과 말씀

 

 

 

침묵으로부터 오는 말씀


오 주님 예수여, 아버지께 드리는 당신의 말씀은 당신의 침묵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이 침묵 속으로 저를 이끄소서. 그래서 제 말이 당신의 이름으로 말해지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십시오. 침묵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입이 침묵하기가 어렵고 제 마음이 침묵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제 안에서 저는 너무나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과, 친구들과 적들, 지지자들, 반대자들, 동료들 그리고 저의 경쟁자들과 항상 내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인 논쟁은 제 마음이 얼마나 당신으로부터 멀리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만일 당신의 발아래 단순히 쉬기만 하고 제가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속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제 주위의 온갖 실제 사람들과 상상 속의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을 쉽게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씨름들은 저의 불안전, 두려움, 걱정들을 보여주며 인정받고 관심을 얻기 위한 제 필요를 드러낼 뿐입니다. 오 주님, 당신은 제가 그저 말하는 것을 그치고 당신께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면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주의를 주실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의 침묵 속에서 당신이 제게 말하고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심을 압니다. 오 주님, 제게 그 침묵을 주십시오. 제가 당신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이 침묵 속에서 천천히 성장하고 인내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말씀의 권능


나의 말까지 포함하여 말들은 그 창의적인 힘을 잃고 있다. 말들의 한없는 증가는 말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하고 자주 “그건 말에 불과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6년, 12년, 18년 그리고 때로 24년 동안 말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주 “그건 단지 말에 불과할 뿐이야”라는 느낌을 경험한다. 설교자들은 매주마다 해를 거듭하며 설교한다. 그러나 본당신자들은 여전히 똑같고 자주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말일 뿐이야.” 정치가들, 기업인들, 장로들, 교황들은 “절기에 맞추어 또한 절기가 아닌 때에도” 연설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냥 말들이야, 또 다른 혼동이고 산만함일 뿐이야!”

 

이런 현상의 결과로 말의 중요한 기능인 의사소통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말은 더 이상 소통시키지 않고 더 이상 공동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은 더 이상 생명을 주지 못한다. 말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사회를 세울 수 있는 믿을만한 바탕을 더 이상 제시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과장인가? 잠시동안 신학적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자. 신학 교육이 우리를 주님이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그래서 그 분을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마태오 22,37)에 더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은 무엇인가? 신학원과 신학교는 신학전공 학생들이 하느님과 더욱 더 일치하고 서로간에 또한 동료인간들간에 더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신학 교육은 우리의 온 인격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갈수록 깊은 일치를 이루도록 양성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기도하는 방식과 믿음의 방식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신학을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우리들은 하느님에 관하여 또한 “하느님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한 복잡한 토론, 논쟁, 대립의 구도 속에 갇혀서 하느님과의 단순한 대화나 하느님께 단순한 현존하는 것이 자주 실제로 불가능하게 된다. 고도화된 어휘적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구분을 가능하게 하지만, 때때로 이런 현상은 생명이신 말씀에 대한 올곧은 투신을 초라하게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학 교육에 있어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먼저 무엇보다도 말의 위기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비판적인 지적 작업과 섬세한 분별이 신학적 훈련에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는 거룩한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고 구원되었는데, 우리의 말이 그 말씀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을 때, 그 말은 기반이 되지 않고 약을 팔기 위한 선전말 처럼 유혹적이며 잘못 인도하는 말이 되고 만다.

신학 교육의 확실한 장소가 수도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말들은 침묵으로부터 나왔고 사람들을 더 깊은 침묵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제 수도원들은 더 이상 신학 교육의 대중적 장소가 아니지만, 침묵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신학 교육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원한 침묵에서 나오며, 우리가 증언하려는 것은 바로 이 침묵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침묵의 순례


티토스 원장이 말했다, “순례란 우리의 혀를 다스려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례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침묵이 미래 세계에 대한 최상의 예견이라는 사막의 교부들의 확신을 말해준다. 침묵에 관한 가장 빈번한 논쟁은 말이 단지 죄로 이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야고보 사도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야고보 3,2).

야고보는 죄짓지 않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영원한 집으로 가는 우리 여정에 있어 죄의 세계에 물들지 않으려면 침묵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베네딕도 성인은 형제들에게 사악한 말을 경고할 뿐만 아니라, 선하고 거룩하며 교훈적인 말도 피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잠언서에서도 그렇게 경고하기 때문이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마련, 지각있는 사람은 입에 재갈을 물린다”(잠언 10,19).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쉽게 우리를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요약하자면 말들은 우리가 여정에서 지나치는 많은 작은 마을들 중의 한 마을에 너무 오랫동안 머무는 느낌을 줄 수 있으며, 섬김보다는 호기심에 더 사로잡히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말들은 우리가 순례자들로서 다른 이들도 우리의 여정에 합류하도록 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자주 잊게 만든다. “침묵하는 것은 우리를 계속 순례자가 되게 한다” 



친구들과 침묵하기


친구들과 침묵하는 것이 그들과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에게 계속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주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나에게 준다.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나누는 것은 자주 가까움 보다 거리를 더 만들어준다. 말들은 마음을 한데 모아주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말들은 우리를 서로 멀어지게 할 수 있다.

 

나는 친구들과 침묵해야겠다는 욕구가 늘어나는 것을 느낀다. 모든 사건에 대하여 다 말하고 모든 생각 하나하나를 다 나누어야 할 필요가 없다. 상호 신뢰의 분위기가 있다면 우리는 함께 침묵할 수 있고 말씀하는 분은 주님이 되도록 할 수 있다. 그분이 부드럽게 온화하게 말씀하도록.

 

예수께 함께 귀기울이는 것은 서로 더 가까워지고 말의 교환이 가져다 줄 수 없는 깊은 친밀함에 다다르는 매우 강력한 방법이다. 예수의 현존 안에서 함께 살아지는 침묵은 또한 미래에 많은 열매를 계속 맺게 해 줄 것이다. 수많은 관심 있는 말들보다 관심 있는 침묵이 더 깊게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 같다. 



변화시키는 말씀


우리는 말이 값싼 취급을 받는 세계에 살고 있다. 말은 우리를 집어삼킨다. 광고, 교통신호판, 팜플렛, 책, 칠판, 화면, 신문 등. 말들은 움직이고 나불거리며, 회전하고 더 커지고 더 번쩍이고 더 뚱뚱해진다. 말은 우리에게 온갖 크기와 색깔로 다가온다­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 말은 그냥 말일 뿐이야.” 말의 숫자는 늘어나지만 말의 가치는 줄어들고 있다. 말의 중요한 가치는 정보를 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말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알려준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며, 어디를 가고 어떻게 그곳에 가는지 알기 위하여 말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성찬례의 말들이 대부분 우리에게 무엇인가 알려주는 말로 들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성찬례의 말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말해주고 가르치며 훈계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말들을 그 전에도 들었으므로 깊은 감동을 받지 못한다. 우리들은 성찬례의 말들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 말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우리는 놀라거나 감동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똑같은 옛 이야기”로 듣는다. 책으로 읽든 제단에서 들리든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면 말이 성사적인 측면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 비극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은 거룩하다. 거룩한 말로서 그것은 의미하는 바를 현존하게 만든다. 예수가 길에서 만난 두 슬픈 여행자들에게 말하고 그분에 관한 성서의 말씀들을 설명했을 때,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즉 그들은 그분의 현존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분 자신에 관해 말하면서 그분은 그들에게 현존하게 되었다. 말씀으로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에 대하여 생각하고 알려주고 기억을 되살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그분은 그들에게 참으로 현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의 성사적 특성이 의미하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가 표현하는 바를 만들어낸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성사적이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것”과 “창조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은 똑같은 말이다.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하느님이 빛을 말했더니 빛이 존재했다.” 하느님에게 있어 말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거룩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이다. 자주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서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라는 어떤 권고로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의 충만한 권능은 그것을 들은 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시키는 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을 때 그 말씀이 거룩한 일을 한다는, 말씀자체의 변화시키는 힘에 있다.

 

복음서들은 그 말씀에 하느님이 현존하는 모습들로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항상 나자렛 회당에 나타난 예수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분은 이사야서를 읽는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3).

 

이 말씀을 읽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갑자기, 가난한 이들, 묶인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은 회당 밖의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로 언젠가 해방될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바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느님은 현존하고 치유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젠가 후에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적용해야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지금 우리가 듣는 것을 통하여 그리고 듣는 가운데에서 우리를 치유하는 말이다. 


출처 : 기도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