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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성인의 꿈과희망

[스크랩]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 (2) 책머리에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 (2) 책머리에

 
2. 토마스 첼라노의 작품들
(1) 성 프란치스꼬의 제1 생애 (Vita prima s. Francisci) 
1228년 4월 29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께서는 성 프란치스꼬를 공경하기 위한 성당 건립을 허락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 발표는 3개월 
후인 1228년 7월 16일에 있을 성인의 시성식을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이 발표와 함께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토마스 첼라노에게 이새
로운 성인의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짐작된다. 첼라노 자신도 “위대하신 그레고리오 교황 성하의 명을 받자와” 성프란
치스꼬의 제1 생애를 쓴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토마스 형제는 형제회 창설자의 제1 생애를 집필하는 일에 즉각 착수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작품의 한 필사본에 적혀 있는 주석에 
신빙성을 부여한다면, 명령을 받고 나서 7개월 후인 1229년 2월 25일에 이 저서가 교황께 바쳐졌고, 이어서 공인되었다고 필사본에나타
나기 때문이다. 1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파리 필사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영광스러운 교황 즉위 제2년 2월 25일복되
신 그레고리오 9세 교황 성하께서는 뻬루지아에서 이 전기를 접수하고 확인하셨으며, 출판할 것을 허락하셨다.” 이 파리 필사본이 옳건 
그르건간에 이 전기는 1230년 5월 25일 이전에 완성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는 아씨시의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안치 되어 
있던 성 프란치스꼬의 유해를 새로 건립된 대성당으로 이장하는 중요한 사건이 바로 1230년에 있었는데도 이것을 수록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께서 어떤 이유로 해서 특별히 토마스 첼라노 형제를 지목하여 그에게 이 임무를 맡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그러
나 그가 이 임무에 적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소위 식자(識者)였고, 아마도 그는 성 프란치스꼬가 스페인에서 돌아온 직후에형제회에 
입회한 “교육을 많이 받은 귀족들”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하건대, 토마스 형제는 노련한  문필가
였으며 또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력적인 예술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다른 문학작품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계기로 교황의 
시선을 끌게 되었는지 어쩐지는 알 수가 없다. 
토마스 형제는 제1 생애를 쓰게 된 동기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그 머리말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제1 생
애는 3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적 순서에 따라” 프란치스꼬의 청년기와 회두, 수도회 창설, 그의 거룩한 생
활과 가르침이다. 1223년 그렉치오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예절을 거행하는 프란치스꼬의 이야기로 이를 마감한다. 정확한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는 역사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제2부에서는 프란치스꼬의 마지막 2년간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이 오상과 죽음과 성인의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제3부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은 1228년 7월 16일에 있었던 시성식에 관한 것이고,뒷부분은시성
식 때에 접수되어 낭독되었던 기적들을 다루고 있다. 끝맺음으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간단하게 독자들에게 청한다. 
토마스 형제는 자기의 개인적인 체험과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하여 이 책을 저술한다. 위에서 짧게 소개한 그의 일생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가 실상 성 프란치스꼬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목격자들 중에서 틀림없이 저술 당시에도 살아있던 프란치스꼬의 초기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레오, 루피노, 안젤
로가 그들이다.엘리아 형제에게도 문의할 수 있었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귀도 주교, 그리고 글라라에게도 문의할 수 있었다. 
물론 성 프란치스꼬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도 있다. 
토마스 형제는 프란치스꼬가 쓴 글들을 접할 수 있었고, 제1 회칙이나 제2 회칙, 유언과 태양의 노래, 그리고 성인의 권고와 다른 글들을 
여기저기서 인용하고 암시하는 것을 보면 필경 이 글들을 소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죽음을 알리는 엘리아 
형제의 편지도 인용하고 있고, 시성식 교서도 인용한다. 그가 시성식 연감(年鑑)을 자료로 사용할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이연
감은 그후에 분실되었다. 그가 성녀 글라라의 생애를 저술하는 데에 글라라의 시성식 연감을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가능했다면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를 저술하는 데에도 이를 틀림없이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술삐치오 세베로가 쓴 성 마르띠노 전기와 그레고리
오 대교황이 쓴 성 베네딕또 전기도 틀림없이 참작하였을 것이다. 
첼라노의 이 작품이 성인에 관한 최초의 전기물이다. 이 제1 생애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란치스꼬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며, 성인이 
타계한 직후에 저술된 것이고, 교황의 요청에 의한 성인의 공식 전기다. 
(2) 성 프란치스꼬의 제2생애(Vita secunde s. Francisci) 
1244년 제노아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총봉사자였던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형제가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생활과 오상과 기적에 관하여 확실
하게 알고 있는 바가 있으며,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집필 중에 있는 그에게 보내라”고 모든 형제들에게 명하였다. 모든 형제들이 이 명에 호
응하였다. 특별히 레오, 루피노, 안젤로는 자기들이 겪은 일들과 그밖의 초기 동료들의 경험을 한데 모은 이 자료를 설명서를 곁들여 총봉
사자에게 보냈다. 
이 편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공경하올 사제이며, 형제이고,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총봉사자이신”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그 수신인은 
총봉사자이며, 발신인은 “한때 지극히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동료였던, 그러나 쓸모없는 레오 형제, 루피노 형제, 안젤로 형제”로 되어 있다. 
이 동료들은 제노아 총회에서 내려진 요청에 협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 과정을 피력한다 : “비록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이지만 
그분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터라, 저희가 그분의 많은 행적 가운데 확신하고 있고, 또 우리가 직접 본 것을, 그리고 다른 거룩한 형제들 특별
히 가난한 자매들의 시찰자였던 필립보 형제와 리에띠의 일루미나또 형제와 마리그나노의 마쎄오 형제와 공경하올 에지디오 형제의 동료
였던 그러면서도 에지디오 형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던 요한 형제와,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첫 동료로서 기억해야 할 만한 베르나르도 
형제에게서 들은 것들 중에서 얼마간을 당신의 거룩한 뜻에 맞추어 보내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인 줄로 압니다.” 
이어서 세 동료들이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이룩하신 기적들과 생활들에 관하여 이미 전기 형식으로 저술된 것들”은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빛 밝은 목장에서 모은 꽃송이들”을 모아 보낸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잔꽃송이들이 다른 전기 형식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 “진실에 가득찬 뛰어난 형식 아래 이미 씌여진 전기 안에 들어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생략했으니, 순서에 맞추는 연결된 이야기들은 전하지 않겠습니다.” 어쩐지 이 세 동료들은 단행본으로 새로운 전기 한권이 더 나오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 “만약 이것이 먼저 전기를 쓴 공경하올 분에게 전해진다면, 결코 그분은 이것을 그저지나치지 않을것이며, 
오히려 이것을 알맞게 다듬어 뒤에 들어오는 형제들에게 하나의 기념이 되도록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발신 날짜는, 그렉치오, 1246년 8월 
11일로 되어 있다. 
이 일에 관해서 형제들에 대한 총봉사자의 요청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 총봉사자 끄레쉔찌우스는 토마스 첼라노에게 성 프란치스꼬의 제2 
생애를 저술하라고 떠맡긴다. 아마도 그는 1244년 총회의 회기중에 이 일을 맡았든지 아니면 길게 잡아야 약 2년 후가 된다. 연대 기록자인 
살림베네 형제가 1282년에서 1288년 사이에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이런 것이 있다 : “그가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첫 번째 전기를 쓴 토마스 
첼라노 형제에게 발견 안되었던 사료들만을 주로하여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복되신 프란치스꼬에 관한 또 다른 책을 쓰라고 명하였다.” 
토마스 형제가 제2 생애 서문에서 이에 응한다 : “지난번 총회에서 거룩한 모임에 참석했던 형제들과 지극히 공경하올 총봉사자께서 하늘이 
형제들과 총봉사자께 내리신 신묘한 지혜로 이 작은 자들인 우리에게 분부를 내리시어 우리의 영화로우신 사부 프란치스꼬의 행적과 가르
침을 글로 쓰도록 하셨다. 우리는 프란치스꼬와 오랜 접촉을 가졌었고, 상호 친교가 있었기에 다른 형제들보다 그의 언행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을 그저 지나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 거룩한 명령을 겸손한 마음으로 따르려 한다.” 
성 프란치스꼬의 동료들은 전술한 대로 이 자료들을 1246년 8월 11일에 총봉사자에게 발송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그것이 토마스 형제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형제가 오직 이 자료에만 의존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제1 생애를 완성하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그가 
더 모으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그는 많은 것이 더 첨가되어야 함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총봉사자의 
명(命)도 성 프란치스꼬와 가까웠던 동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고, 전 형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토마스 형제는 세 
동료들에게서 받은 자료말고도 글이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까지 자료를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어떻든 토마스 형제는 이 일에 착수했다.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는바, 토마스 형제는 자기 이름으로 집필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자료들
을 제공해 준 모든 형제들의 대필자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 그는 머리말과 맺는말에서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고, 성 프란치스꼬와 절
친했던 초기 형제들의 이름으로 말을 한다. 더구나 그는 그 동료들과 한 입이 되어 성인에게 바친 동료들의 기도(제2 생애 221번)에서 계속 
1인칭 복수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토마스 첼라노 홀로 저술한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저자의 눈에 띄지 않아” 먼저 작품에서 누락된 것들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이 책의 저자로 밝히고 있다. 그는 작품 전체에 걸쳐 몇 부분을 제외하고 1인칭을 사용한다. 마지막 성인에게 
바친 동료들의 기도에서 그는 여러 동료들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저자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 “지극히 자애
로우신 사부님, 지금이나 전에나 당신께 대한 칭송을 정성껏 써 내려온 당신의 이 아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온 정성을 다하여 당신께 간절히 
청합니다. 그는 우리와 더불어 이 변변치 못한 책을 당신께 바쳐 헌정합니다.” 비록 그 자신도 자료를 제공해 준 형제들의 대필자임을 자처
하지만, 저자는 토마스 한 사람이다. 
제2 생애는 제1부 소제목에서와같이 자주 “간절한 마음의 비망록”이라고 불린다. 즉, 자녀들이 사부님의 말씀이나 행적들을 기억하도록 하
기 위해서 씌여진 것으로써 제1 생애와는 달리 완전한 전기 형식이 아니다. 제1 생애는 신자들을 위해서 씌여진 반면에 제2 생애는 형제들
을 위한 책이다. 따라서 제1 생애는 성인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그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고, 인간적이며 순수하다. 그러나 제2 생애는 
벌써 제1 생애를 집필하고 거의 20년이 경과한 후에 집필한 것이다. 그동안 프란치스꼬의 정신에 대한 해석과 회칙 적응 등 갈등이 많았다. 
영적인 면을 강조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에 또 법적인 면을 강조하는 부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첼라노는 총장으로부터 제2 생애를 
집필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첼라노는 제도화되어 가는 수도회 행정부의 방향에 맞춰 규율, 순종, 질서 등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여
기에 뜻을 같이하면서 이러한 현실에 맞도록 성 프란치스꼬의 말씀을 약간 변경시킨다. 또한 옛 수도원의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런 면에서 
제1 생애의 자율성과 비교된다. 
머리말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그것이 씌여진 경위와 총봉사자께 헌정한다는 내용을 머리말에 싣고 있다. 이 헌정은 끄레쉔찌우스에게 드리
는 기원으로 되어 있다 : “당신의 박식하신 판단으로 옳다고 인정된 것들이 당신의 이름 끄레쉔찌우스와 함께 어디서나 자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를 치게 하십시오. 아멘.” 제2 생애는 2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는 비교적 짧고, 제1 생애의 제1부에서 다루었던 것과 같은 시기
의 이야기들을 내용으로 한다. 프란치스꼬의 본명과 그의 회두, 수도회 창설, 그리고 우골리노 추기경을 형제회의 보호자로 임명한 일 등
이다. 그러나 그는 제1 생애에서 이미 내용으로 다른 것을 보충하여 이것을 쓰고 있는 것이 뚜렷하다. 그는 제1 생애에서 다룬 것을 반복하
지 않으며, 다만 세부적으로 첨가한다. 제2부에서는 구조적이고도 논리적인 배열 안에서 그 주제가 다양하다. 토마스도 자기의 의도를 피력
한다 : “우리는 프란치스꼬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천상적 규율을 실행으로 옮긴 모든 것 안에서, 그리고 그가 
인간에게 모범을 보이며 거룩한 애정으로 이룩한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완덕의 추구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의지라고 생각하였는지를 신중하게 그려 밝히려 한다.” 그리고 기적들도 그때그때 소개하며 끼워넣었다. 제2부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역사적 순서로 돌아가며, 성 프란치스꼬의 질병과 오상, 죽음 그리고 시성과 묘지 이장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내용에서는 이장에 관한 부분
이 빠져있다.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서 새로 지은 대성당으로 이장하는 내용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성식의 생략된 부분을 알려면 제1 
생애에서 알아볼 수 있고, 이장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는 전례용 전기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같이 토마스 형제는 제2 생애를 써서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총장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끄레쉔찌우스는 1247년 7월 13일에 
리옹에서 열린 다음 총회에 개인적인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고,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 전임 봉사자는 토마스의 
제2 생애를 총회에 발송했다. 이때에 새로 선출된 총봉사자인 빠르마의 요한 형제는 이 책을 그 총회에서가 아니면 적어도 짧은 시일 내에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제2 생애가 씌여진 시기는 세 동료들이 총봉사자에게 자료를 보낸 시기인 1246년 8월 11일로부터 1247년 7월 13일, 
리옹에서 개최된 총회 사이인 것이 확실하다. 
세 동료들이 총봉사자에게 보낸 자료들과 관련되어 있는 제2 생애, 세 동료 전기, 완덕의 거울, 뻬루지아 전기간의 상호관계가 지난 90년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위에서 이미 말한 세 동료들의 편지는 세 동료 전기의 서문에 사용되었다. 세 동료 전기는 세 동료들의 편지
를 문서문으로 취하기만 할 뿐이지 그 내용은 세 동료들의 전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18장으로 되어 있는 세 동료 전기는 당시의 전기형식
에 따라 씌여진 것이지, 세 동료들이 그들의 편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빛 밝은 목장에서 수집한 잔 꽃송이들”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1894년까지 세 동료 전기의 저자는 레오와 루피노, 그리고 안젤로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러나 이에 의심이 일기 시작한 것은 스타니슬라
우스 멜키올이 16세기 사본에서 번역한 이태리판을 1856년에 출판하면서부터다. 그런데 이 16세기 사본은 옛 사본을 필사한 것인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라틴어 사본보다 자료들을 훨씬 더 많이 담고 있었다. 그러나 편집자는 이 첨가된 자료들을 필사자가 토마스 첼라노
와 성 보나벤뚜라, 삐사의 바르톨로메오와 완덕의 거울에서 뽑아 첨가한 것이라고 밝힌다. 
폴 사바띠에르가 1894년에 자신의 저서「성 프란치스꼬의 생애」를  출판할 당시에 그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세 동료 전기」는  단
편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총장이 레오 형제나 그 동료들의 뜻과 달라서 그가 삭제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당시에 여러 형제들이 폴 사바띠에르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사바띠에르의 주장에 동조한 프란치스꼬회 회원 마르
첼리노와 테오필로는 멜키올의 이태리 사본을 취하여,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한 다음, 다른 라틴어 사본에서(첼라노, 보나벤뚜라, 삐사의 
바르톨로메오, 완덕의 거울) 내용을 발췌하여 첨가시켜「세 동료의 전기」를 새로 출판하였다. 
1900년에 프란치스꾸스 반 오르뜨로이가「아날렉따 볼란디아나」(Analecta Bollandiana) 잡지에서 원래의「세 동료 전기」는 성 보나벤
뚜라의「성 프란치스꼬 대전기」나 베르나르도 베싸의「성 프란치스꼬의 찬미」와  같이 후대에 저술된 책에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고 밝혔다. 그래서 그는「세 동료 전기」는 결론적으로 어쩔 수 없이 후대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기의 작품이 되므로 세 동료들이 직접 쓴 작품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대하여 토론이 계속되었으나 오늘날에는「세 동료 
전기」가 비록 얼마만큼의 자료들을 1246년의 세 동료들이 기고한 자료에서 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14세기 초의 작품임이 통설로 되었고, 
세 동료들의 편지는 틀림없이 그들이 1246년에 총봉사자에게 보낸 자료 설명서인 편지가「 세 동료 전기」의 서론이 되었다. 그러나 원 
자료들은 분실되었고 아마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사바띠에르는 1445년으로 기입되어 있는「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의 생활의 거울」이라는 제목의 필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정한 형식 없이 자료들을 그저 수집해 놓은 것에 불과하였고, 1504년 베니스에서 첫 출판된 것이었다. 사바띠에르는 이 자료 
뭉치에서 그 형식이 세 동료 전기와 비슷하기만 하면, 그것을 누락된 부분일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발췌하였다. 그가 특히 충격을 받은 
것은 “그분과 함께했던 저희”라는 문구를 심심찮게 접하면서부터다. 이 문구는 세 동료들이 총봉사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용했던 “
그분과 오랜 기간 함께 살았던 보잘 것 없는 저희”라는 문구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이즈음에 파리의 마자렝 도서실에서 
또 다른 필사본을 만났는데, 그 내용이「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의 생활의 거울」의  자료와 같았고, 다만 그 제목이「작은 형제들의 
완덕의 거울」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바띠에르가 여기에서 저지른 하나의 실수는 이 파리 필사본을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 필사본의 연대를 1228년 혹은 1227년으로 잡았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가 모은 자료들을「레오 형제가 쓴 가장 오랜 
전기인 완덕의 거울」이 라는 제목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가 잡은 연대는 여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수인 것이 뚜렷해 
보였고, 얼마 안있어 1318년으로 되어 있는 또 다른「완덕의 거울」필사본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의 추측이 들어맞았다. 
얼마 후에 프란치스꼬회 회원인 레오나르도 렘멘스 형제가 로마의 꼰벤뚜알 성 이시도르 수도원의 문서에서 14세기「완덕의 거울」
필사본을 또 발견하였다. 이 작품은 사바띠에르가 편집한 완덕의 거울과 비교하면 비교적 짧은 편이다. 사바띠에르의 것은 124장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이것은 단지 45항목에 불과하다. 이 필사본은 다음과 같은 서두를 취한다 : “완덕의 거울은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그리고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의향에 맞는 참다운 작은 형제회의 회칙과 서원, 생활과 성소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동료였던 레오 형제의 글에서 발견된 것들과 전기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다른 동료들의 글로 구
성되어 있다.” 
비교적 짧은 이 작품을 어떤 이는 1246년에 세 동료가 총봉사자에게 보낸 최초의 자료들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사본이 직접 말하고 있듯이 1246년도의 세 동료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일 뿐이다. 렘멘스 형제는 그 서문에 주석을 달아 결론하기를 이 책
은 성 보나벤뚜라의 대전기가 어느 정도 형제회 안에서 정식 전기가 된 후에 편집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서문에서도 지시하는 바와
같이 그 작품은 정식 전기를 보충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기적으로 볼 때 사바띠에르가 출판한 완덕의 거울을 앞서
는 것이며, 세 동료들의 최초의 자료에 이어서 이 작품은 자주 최초의 편집판, 혹은 초기 편집판으로 불리운다. 그러므로 자연히 사바띠
에르의 편집판은 후기 편집판이 되며, 최초의 완덕의 거울의 증보판이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세 동료 즉 레오, 루피노, 안젤로의 이름으로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총봉사자에게 보내진 편지는 
그들이 1244년 제노아 총회와 1246년 8월 11일(편지를 발송한 날짜) 사이에 수집할 수 있었던 자료들을 보낸 것이다. 바로 이 자료를 토마스 
첼라노 형제가 제2 생애와 기적 모음집을 저술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세 동료 전기는 13세기 말이나 14세기 초의 저서로써 세 동료
의 자료와 관계가 없으며, 다만 머리말만 그 자료의 편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뻬루지아 전기는 제2 생애와 같은 시대의 저서
로 세 동료의 자료를 일부 인용하였으나, 제2 생애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또한 완덕의 거울은 1318년경의 저서로서 일부는 제2 생애
서, 또 일부는 뻬루지아 전기에서 취한 것이다. 아직도 이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위와같이 결론하고 있다. 
(3)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기적 모음집 
 (Tractatus de Miraculis B. Francisci) 프란치스꼬의 제3생애 
토마스 첼라노 형제의 성 프란치스꼬의 제2 생애의 몇 편의 기적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여기저기 그때그때 끼워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들은 성 프란치스꼬가 살아있을 때에 이룩한 것들이다. 시성식 때에 채택되어 낭독한 기적들을 다루기 위하여 제1 생애에
서는 특별한 장을 마련하고 있고, 제2 생애에서도 몇 편이 들어가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미흡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1247년에서 1257년 
사이의 총장인 빠르마의 요한이 첼라노 형제에게 이 미비점을 보충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총장들의 역대기 24장에 그 지시를 이렇게 기록
하고 있다 : “이 총봉사자께서는 토마스 첼라노 형제에게 거듭 서한을 띄워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생애를 다룬 옛 전기들을 완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왜냐하면 끄레쉐찌우스 총봉사자의 명에 의해서 저술된 제2 생애는 그분의 생활과 말씀만을 다루고 있지 기적들은 빠졌
다는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에는 기적에 대한 관심이 컸다. 따라서 사부님의 기적이 알려지면, 그것은 수도회의 명예와 관련이 
있었고, 사부님의 명성과도 관련이 있었다. 기적은 곧 프란치스꼬가 거룩한 생활을 했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하여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기적 모음집”은 토마스 첼라노에 의하여 빠르마의 요한이 총봉사자일 때인 1250년에서 1253년사이
에 집필되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토마스 형제는 다음과 같은 서두의 편지를 동봉하여 총봉사자에게 그것을 보냈다. “수도자다운 당신의 
걱정이…”라고 시작되는 이 편지는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다. 이 모음집은 1254년 메쯔에서 있었던 다음 총회에서 받아들
여졌고, 인정되었다. 
이 모음집은 제1 생애나 제2 생애와 같이 2부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고, 19장 198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맺음말이 있다. 제1장은 
형제회의 초기에 일어났던 기적들을 다루고 있고, 제2장은 성 프란치스꼬의 오상과 이 오상에 관련된 기적들을 다루고 있다. 나머지 장들
은 제6장을 제외하고 성 프란치스꼬가 이룬 각종의 기적들을 취급하며, 약간은 그의 생전에 있었던 기적들이지만 대부분이사후에 일어난 
기적들이다. 제6장은 성인이 임종하기 직전에 세떼솔리의 야고바 부인의 방문을 다루고 있다. 
모음집에 들어 있는 기적들이 대부분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중의 3분의 1은 이미 제1․2 생애에서 취급한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
에서 취급하는 대부분의 기적들이 그의 사후에 일어난 기적들이기 때문에 이 책은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198항
목 중에서 41개 항목이 생전에 이루신 기적들이고, 나머지 대부분이 제1 생애와 제2 생애에 이미 수록된 것이며, 20여 개만이 새로운 것
들이다. 이 항목들은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에서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이 20여 개의 기적들을 제3 생애로하여 이 책의 마지막에 
첨가하였다.
 (4) 여타 작품들 
 ①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전기(Legenda Sanctae Clarae Assisiensis) 
알렉산델 4세가 새로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서 첫 번째 한 일이 글라라를 1255년 8월 15일에 시성한 것이다. 관례에 따라 그는 성녀의 전
기를 집필케 하였고, 그 집필된 저서가 오랫동안 성 보나벤뚜라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그 문체가 첼라노의 초기 작품들의 특성을 
그대로 닮고 있어 이제는 누구도 그 저자가 첼라노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머리말은 교황 알렉산델 4세께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 “성하께서 이 부족한 저에게 성녀 글라라의 행적을 조사하여 그것을 기초
로 전기를 쓰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그녀의 시성을 위하여 수집한 자료와 칙서를 이 전기의 기초자료로 사용하였음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확실치 않은 기록에 의지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동료들에게 의지한 것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동정녀들의 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누구도 직접 본 사람들을 빼놓고, 그리고 목격자
들의 증언을 받아 들이지 않고 전기를 써서는 안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의 전기는 1255년에 착수하여 대략 1년내에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② 성무일도용 전기 (Legende ad Usum Chori) 
베네딕또 형제로부터 성 프란치스꼬의 제1 생애를 요약하여 성무일도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줄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첼라노가 이에 
서신으로 답하는 모습을 제1항에서 볼 수 있다. “베네딕또 형제여, 그대는 저에게 우리의 지극히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꼬의 전기를 발췌
하여 그것을 9개의 독서로 일목요연하게 배열해서, 우리의 성무일도에 넣어 모든 형제가 소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베네딕또 형제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리스에서 1221년부터 1237년까지 관구봉사자로 지낸 아레쪼의 베네딕또 형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첼라노를 만나게 된 것은 1230년 아씨시에서 개최된 총회, 즉 성 프란치스꼬의 이장(移葬)이 있을 때가 아니었나 
싶고, 그 자리에서 제1 생애를 요약해 달라는 요청을 한 듯하다. 
이 짧은 전기의 작가는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나의 전기에서”라는 구절만이 등장하여, 이를 첼라노 자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더구나 이 전기가 제1 생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어휘나 구절이나 문장이 제1 생애의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발췌한 것이고, 제1 생애를 집약하여 짧게 요약하였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문장의 흐름도 제1 생애와 제2 생애의 저자와 그 다루는 솜씨가 
동일하다. 
이 성무일도용 전기에서 새로운 조목들이 조금 발견된다. 우선 무엇보다도 프란치스꼬가 운명한 때를 정확하게 기입하고 있다 : 
“die sabbati in sero(토요일 밤에)”. 또 하나는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서 새로 지은 대성당으로 프란치스꼬의 시신을 이장했다는 부분이 
들어 있다. 제1 생애의 집필을 완성할 때까지는 이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제1 생애에서 누락된 것이다. 반면에 제1 생애를 집필할 당시에 
저자가 몰랐던 몇 가지 새로운 기적들이 첨가된다. 이 기적들은 후에「복되신 프란치스꼬의 기적 모음집 」을  쓸 때 더 길게 나열된다. 
1230년이나 아니면 1231년에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③ 진노의 날(Dies irae) 
장례미사에 나오는 잘 알려진 고도의 시적인 연송(蓮頌), “진노의 날”의 저자가 토마스 첼라노로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사다.
 
사랑과 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
출처 :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 (2) 책머리에
글쓴이 : jeosah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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