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시편 139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통찰들 가운데 하나를 상기시켜 준다.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을 ‘신적인 신비’로 체험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시편 작가의 의도를 확실히 알지는 못하고 있다. 이 시편은 감사의 노래일수도 있고 변호하는 노래였을 지도 모른다.
일부 학자들은 우상 숭배 죄로 고발된 어떤 종교 지도자가 이 시편을 썼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이 시편이 비인격적인 용어들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생생한 체험에서부터 이끌어낸 구체적인 이미지들로서 사방 어디에나 언제나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편 작가는 하느님 앞에 서 있다.
시편 첫 몇 행들을 보면 시편 작가는 자신의 오장육부까지 속속들이 꿰뚫어 알고 계시는 하느님의 눈길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한 하느님의 눈길은 자칫 놓치기 쉬우면서도 치명적일 수 있는 병의 증세를 진단하며 꿰뚫어 보고, 조사하며 식별하는 내과의사의 눈길과 같다.
그것은 자기 앞에 서 있는 학생의 감춰진 잠재 능력을 간파하고 실현되지 않은 꿈의 내적인 충동을 정확히 감지하는 경험 많은 교사의 눈길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관조하는 것이며, 사랑의 품 속에서 창조된 피조물을 창조자가 사랑스럽게 알아보는 것이다.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시인은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있다.
지구를 감싸고 있는 대기권처럼 하느님은 어디에나 현존하신다. 하느님은 하늘을 날듯이 기뻐할 때만이 아니라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신다.
하느님은 인생의 고비마다, 그리고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불충실한 마음 속에도 계신다. 하느님을 피할 곳이란 아무데도 없다.
너무나 엄청난 사랑은 완벽한 응답을 요구한다.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시인은 자기 속을 들여다보며 어머니 태중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생활 속에서도 활동하시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를 경건히 묵상한다. 하느님의 손길은 시인의 인생의 여러 단계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를 누르고 포개고 잡아당기면서 밀가루를 반죽하듯 빚으시고 이 순간까지 그를 인도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