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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이해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이해 
마돈나 [이] Madonna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호칭. '나의 귀부인'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이다. 성모 마리아의 조상이나 성화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상의 의미나 감상적 의미를 강조하여 재현한 작품만을 일컫는다.   
그리스도교 초기 때부터 마리아에 대한 애정은 신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왔다. 자신들의 사소한 일로 인해 예수와 문제가 생기는 것을 주저하였던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가 자신들을 더 잘 이해해 주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아들 예수에게 설명해 줄 것이라고 여겼기에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을 더 쉽게 생각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이런 믿음에 대해 격려해 주었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인 '성모송(Ave Maria)'은 '주님의 기도'와 함께 바쳐졌다. 또한 중세의 많은 주교좌 성당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고, 그 안에는 항상 마리아 경당이 만들어졌다.   
마돈나는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항상 널리 사용된 주제이다. 로마 카타콤바의 벽에서도 비록 투박한 모습이지만 마돈나는 나타난다. 3-6세기에는 마돈나와 아기 예수를 함께 주제로 한 작품이 드물었으나,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eotokos)'라고 공식 선언한 이후부터는 이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교회의 장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초기 동방 교회의 미술가들이 그린 마리아는 홀로 장식이 없는 푸른색의 옷을 입거나 또는 금을 입힌 경직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옥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예수를 왕처럼 당당하게 묘사한 '니코포이아 Nikopoia', 성모 마리아가 왼팔에 아기 예수를 안고 서 있는 '호데게트리아 Hodegetria', 성모 마리아가 혼자 기도하는 모습과 마리아의 가슴에 달린 둥근 메달 속에 아기 예수를 그려 넣어 마리아의 중재적 역할을 강조한 '블라케르니오티사 Blachermiotissa' 등으로 발전하였다.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갈락토트로푸사 Galaktotrophousa'의 마리아는 다정다감하고, 아기 예수가 성모 마리아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글리코필루사 Glykophilousa'의 마리아는 앞으로 있을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슬픈 표정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중세 말부터 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동방 교회처럼 엄격한 규정과 신학적 의미는 담고 있지 않지만 아름다움과 온화함을 통하여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13세기에는 호데게트리아 양식을 지닌 조각 작품들이 절정에 이르렀고, 14세기에는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15세기에는 믿음이 깊은 사람들을 망토로 덮어 보호해 주는 자애로운 마리아의 모습이, 그리고 17세기에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성모 영보 등이 주제로 자주 사용되었다. 17세기부터 주요 미술 분야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였지만, 20세기까지도 마돈나라는 주제는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돈나를 주제로 그린 대표적인 화가는 라파엘로(S.Raffaello, 1483-1520)는 1505-1507년에 <오색방울새의 마돈나>, <프라토의 마돈나>, <에스테헤의 마돈나>, <듀크 대공의 마돈나> 등 마돈나 연작을 완성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브누아의 마돈나>, <암굴의 마돈나>, <리타의 마돈나> 역시 중요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그레코(E. Greco), 안젤리코(F. Angelico), 지오토(Giotto), 무리요(B.E.Murillo) 등도 마돈나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2. 피에타 
  
이탈리아어 피에타는 '경건'이라는 뜻이다. 경건한 믿음 '피에타스'와 이웃 사랑 '카리타스'는 기독교의 근간을 떠받치는 두 개의 주춧돌로 손꼽힌다. 그러나 미술에서 말하는 피에타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좁은 의미로 1300년 이후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앞에 눕혀 두거나 품에 끌어안고 있는 경배화의 한 유형을 가리킨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린 뒤 입관하기에 앞서 마리아가 잠시 예수의 주검을 끌어안고 애곡하는 장면을 따로 떼어 냈다. 매장을 돕던 니고데모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그리고 어린 요한과 작은 마리아 등 주변 인물들을 물리쳤다. 살아서 통곡하는 어머니와 죽어서 말이 없는 아들만 떨어져 나와 피에타의 독립유형을 이루었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마리아의 애곡이 저물 무렵의 저녁 시간에 이루어졌으므로, 수도원의 승려들도 저녁 기도 시간을 빌려서 죽은 예수의 다섯 상처를 내보이는 어머니의 애통한 모습을 담은 조각이나 그림을 보고 명상에 잠겼다. 그래서 독일에서 이 장면을 '저물 무렵'을 뜻하는 '베스퍼'라고 부르게 되었다. 베스퍼 주제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수입되면서 명칭이 '피에타'로 바뀌었다. 굳이 저녁 기도 의식과 상관을 두지 않더라도,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힘이 있어서 금세 경배화의 한 갈래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료출처 : 노성두, 천국을 훔친 화가들, 사계절, 2000>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나와서 조각 작품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 옷을 이용하여 마리아의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조형적인 해결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옷이라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가지며,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수호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   
메인 화면의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에타 상은 한 정신병 환자가 휘두른 망치에 손상을 입고 난 뒤 보수되어 방탄 유리 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다. <자료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피에타"> 
3. 두치오 # 
 
두치오, 부오닌세냐의 Duccio di Buoninsegna (1255-1318) 
13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 화가 중 한 사람. 1255년 이탈리아의 시에나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속한 시에나(Siena) 화파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에나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중세 말기부터 르네상스에 걸쳐서 번영하였던 화파이다. 피렌체(Firenze) 화파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합리적이고 극적 감동을 주는 조형성과 대비하여, 시에나 화파는 소극적인 묘법이면서도 온화하고 정서적인 도행서와 장식성을 매우 중시하였다. 따라서 이 화파에 속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중세적인 신비 속에 인간적인 정감이 깃든 세련된 양식으로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5세기 무렵 피렌체가 르네상스 회화의 중심지로 부각되자 상대적으로 시에나의 영향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시에나 화파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두치오는 청년 시절 치마부에(Cimabue, 1250-1302)의 화풍에 열중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시에나 성당의 제단화인 <루첼라이의 성모 Rucellai Madonna, 1285>를 완성하였다. 두치오는 이 작품으로 인습적인 비잔틴 양식에서 탈피한 우아하고 정서적인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시에나 화파의 신비스러운 부드러움을 적절히 조화시켜 이 화파의 전형적인 화풍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이 작품은 피렌체의 우피치(Uffizi)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 하나의 대표적 <왕자의 성모 Maesta, 1308-13111> 는 칸막이 바깥쪽에는 '성인들과 천사에 둘러싸인 성모자'가, 안쪽에는 '그리스도인 십자가 처형도'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 생애의 여러 장면들이 잘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795년에 해체되어 앞 뒤 양면으로 분리된 뒤 런던, 워싱턴, 뉴욕 등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부는 유실되기도 하여 현재 26점만이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도 <성모와 세 사람의 프란치스코의 수도자> 등의 작품들이 있다.   
같은 시대에 활동한 지오토(Giotto, 1266-1337)가 소박한 화풍으로 현대 화가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면, 두치오는 성숙한 비잔틴 미술의 완성을 이룩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잔틴의 전통에 북방의 고딕 양식을 채택하여 매혹적인 색채와 물결치는 곡선, 정묘한 구도로써 시에나 화파의 도해적이면서도 감미로운 화풍을 창시한 그는, 옛 표현 방식을 본받아 자신만의 새로운 기법으로 적절하게 표현하였는데, 인물상에 위엄 있는 모습을 그려냈으며, 명암의 수법을 사용한 회화법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시에나 성당의 대리석 포도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명암 표현법은 미술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피사(Pisa), 루카(Lucca), 피스토이아(Pistoia) 등 여러 성당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당시에 모두 수준 높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4. 프라 안젤리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 
도미니코회 수도자였던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에는 깊은 신앙적 엄숙 미가 배어 있으며, 대단히 밝은 색조가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은 우아하면서도 힘찬 선과 강렬한 색채는 바로 고딕 전통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는 원근법과 빛의 사용에 관한 회화의 진보적인 경향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으며, 작품에서는 강한 형식적인 유형미를 찾아 볼 수 있고 등장하는 신체들은 모두 사실적인 느낌으로 서로 자연스러운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  
  
5.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예술의 역사 천체를 통틀어 천재라는 칭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 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지방 법률가의 서자로 태어났다. 소위 팔방미인이었던 그는 지나치게 많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위대한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기술자였으며, 식물학, 해부학, 지질학 등의 분야의 전문가였으며 당당한 체구에 상당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재능 때문에 인지 완성된 작품이 별로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특징인 서정적 미술은 자연이 바로 영감의 원천이라는 그의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이 있다. 
<자료출처 : 마리아 동산> 
<성모상 종류에 대하여>  
우리가 모시는 성모상은 주로 4종류를 축성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기도의 지향에 따라 모실수 있습니다  
아래의 성모상 사진을 클릭하시면 상세내용(성모발현내용)을 보실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교회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379회(1984년 현재)의 성모님 발현의 대부분이 18세기(1830년~1984년)이전의 것이며 1984년 이후에도 발현 보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교회는 그 진실성 여부를 가리는데 매우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다.  
지금도 성모님의 발현은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1975년 일본 아끼다의 성체봉사 수녀회에 모셔진 목각 성모상을 통해서, 1985년 우리나라 나주의 한 가정에 모셔진 조그만 성모상을 통해서도 심오한 기적의 사실들이 알려지고 있지만, 지난 150년동안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모님의 발현지로 인정된 곳은 극히 적은 숫자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모님의 발현은 그 외적 상황이 각기 다르더라도 내적인 메세지는 심오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죄악과 절망으로 상처난 인류를 치유하시려는 주님의 어머니시며,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요한 19, 23-29)의 의도를 명백히 밝히고 계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발현때 마다 강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일생을 묵상할 수 있는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실행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할 일 일것이다. 교회가 성모님 발현의 사적 계시에 대하여 신중하게 대처하는 이유도 그 의미를 왜곡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태 리 - 성모설지전 (聖母雪地殿)(Beauraing) 위로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인, 로마의 성 마리아(Santa Maria Maggiore) 대성전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352년 8월 5일, 로마에 요한이라는 독실한 귀족 신자 부부와 교황 리메리오(352 ~366)의 꿈에 동시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위한 성전을 세울 것을 요청하고 그 징표로 8월 한 더위에, 에스퀄리노 언덕에 하얀 눈을 내리셨고 눈의 성마리아 대성전이 세워 진것이다.   
역대 교황들은 이 성전을 개축하고, 성모의 일생을 담은 성화로 실내를 장식, 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체워 로마의 4대 성당의 하나로 만들게 된 것이다,   
  
이 태 리 - 몬티키아리와 폰타넬레(Montichiari Fontanelle) 위로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에서 20km 떨어진 조그만 마을 몬티키아리의 간호원 피에리나 질리는 1947년 12월 8일부터 7차례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보았다. 흰베일에 보라빛 옷을 입으신 성모 마리아는 가슴을 큰칼 셋에 찔려 우시는 모습 또는 흰색, 붉은색, 황금색의 장미가 달린 흰옷을 입으신 모습으로 오시어   
'신비로운 장미'의 호칭으로 공경받기 바란다고 하셨다.   
그리고 세자루의 칼은 대죄 중에 있는 자, 성소를 버릴 뿐만 아니라 교회와 적이 되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상징이며, 세 송이의 장미는 기도와 보속과 희생 정신을 의미한다는 설명도 해주셨다.  
1966년 2월 성모의 발현을 다시 예고받은 피에레나는 몬티키아리의 한 지역인 폰타넬레에서 4월 17일 정오에 마리아를 뵙고, 그곳에 있는 우물에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다.   
1968년 부터 1973년까지 '신비로운 장미'이신 마리아는 믿음과 감사, 사랑과 청원의 기도, 보속을 권하셨다.   
멕 시 코 - 과달루페 (Guadalupe) 위로 
과달루페의 성모님 발현은 시대적으로 450년이나 앞선 것이다.   
1531년 12월 9일 부터 12일까지 동정성모 마리아는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얼마되지 않은 한 맥시코 원주민후안 디에고에게 발현 하셨다.   
아즈텍 인디언 후안이 집에서 약 40리 떨어진 틀라데롤코의 프란치스코의 수도원으로 미사를 드리러 가다가 맥시코시의 북서 테베작 산에 이르렀을 때 태양 같은 옷을 입은 귀부인이 나타나 한 임무를 맡기셨다.  
"나의 자녀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아들아. 나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며 모든 것의 주님이시고, 만사가 그분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참하느님의 어머니, 완전하고 영원한 동정 마리아다.   
나는 이곳에서 나의 사랑, 자비, 도움과 사람들을 위한 나의 보호를 드러낼 것이며, 여기에 성전이 세워지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다. 나는 너의 자비스런 어머니, 이 땅에 결합되어 사는 모든 이의 어머니, 온 인류의 어머니, 나를 신뢰하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며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어머니다.   
나는 여기서 그들의 울부짖음과 슬픔을 들을 것이며, 그들을 치료하고 고통을 완화시키겟다. 나의 의향을 수마라가 주교에게 전하라."   
후안이 전하는 귀부인의 원의를 믿기 위한 징표를 청하는 주교에게 성모 마리아는 카스틸라 장미 한 다발을 보냈다. 한 겨울 테체작산 꼭대기에 피어난 장미를 후안은 틸마(망토) 앞자락에 고이 담아 주교와 둘러선 사람들 앞에 펼첬다. 그러자 더욱 확실한 표징이 나타났다. 꽃들이 흘러 내린 틸마에는 발현하신 귀부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과달루페의 영원한 동정 마리아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신 귀부인의 말씀에 따라 테베직 언덕에는 과달루페의 성모 성전이 건립되었다.   
인디언語로 과달루페는 "돌 뱀을 쳐부수다"라는 뜻이다. 멕시코에 국경이 없고.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지 39년 밖에 안 된 시절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로 말미암아 8년 만에 원주민 800만 명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쟁 포로들의 심장을 파내어 전쟁의 신에게 바치던 풍습과 해마다 2만명 이상의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피의 재물로 바치던 우상, 곧 "돌뱀"이 사졌다. 새 하와인 마리아, 뱀의 머리를 짓 밟은 여인(창세, 3.15; 묵시 12.)은 멕시코 및 남북 아메리카의 수호자가 되었고, 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싼 것이다.   
프 랑 스 - 파리 (Paris) 위로 
1830년 7월 18일 파리의 위드박 (Rue de Bac)에 있는 성 빈첸시오의 애덕자매회의 가타리나 라블레는 잠을 청하던 차에 한 소년의 부름을 들었다.   
"빨리 성당으로 오세요, 동정 마리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망서리던 가타리나가 성당으로 갔을 때 제대위의 초가 모두 켜저 있었고, 잠시 후 비단 옷 끌리던 소리가 나더니, 아름다운 부인이 나타나 사제의 의자 위메 좌정하였다. 부인은 가타리나에게 가까이다가오도록 하시고는 말씀 하셨다.  
"필요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에 이리로 오너라. (왼손으로 감실을 가리키시며) 저곳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단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너는 고통을 당하겠지만 그것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이다......   
프랑스에 위기가 닥치고 있구나. 왕권은 무너질 것이고...... 그때 너는 이 제대로 오너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제대 앞에서 모두들 위로와 힘과 은총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 어느 한 순간 위기는 극에 달할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여길 때 나는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동정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시며 계속하셨다. "십자가는 내동댕이쳐지고 멸시받을 터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다시 여는 것과 같다.   
거리는 온통 피바다가 될 것이고,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예언대로 파리는 7월 혁명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성 빈첸시오 애덕자매회 본원은 그러한 소요에서 보호되었다.   
그 해 11월 27일 오후 5시 30분경 기도하던 가타리나는 소성당 오른편에서 다시 마리아를 뵈었다. 빛나는 흰옷에 베일을 쓰,시고, 작은 지구의를 손에 들고, 뱀에 감긴 지구를 발로 밟고 계신 마리아는, 보석 반지들을 낀 손가락을 통하여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빛을 발하고 계셨다. 모든 시선을 손에 집중하고 있는 가타리나에게 마리아는, "이 빛에는 나에게 간구하는 이들에게 내려줄 은총의 상징이 있다"고 하셨다. 순간적으로 이 환시를 이해하게 된 가타리나는 동시에 마리아를 둘러싼 타원형의 빛 가운데, "오!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달아드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를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모습대로 메달을 주조하라. 이 메달은 은총의 메달로서 이것을 지니는 사람은 누구나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또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이들에게도 은총을 충만히 내릴 것이다."하고 외쳤다. 예수 성심과 성모성심으로 된메달의 뒷면도 나타났다. 한편, 평소 가타리나를 지도하던 알라델 신부는 전에도 성 빈첸시오의 심장에 대한 환시를 보았다고 말한 바 있는   
가타리나를 의심하여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12월 말 다시 발현하신 동정 마리아의 의향을 간절히 전하는 가타리나의 태도에서 진정 성모님의   
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신부는, 수도회 총장신부와 주교의 허락하에 메달 주조에 착수하였다. 1832년 6월 30일에 나온 최초의 메달은 이단에 빠진 어느 주교를 임종석에서 회개시키는 기적을 선두로 갖가지 치유를 일으켰다. '기적의 패'는 놀라운 속도로 퍼져 나갔고, 복된 수녀로서 일생을 마친 가타리나 라블레는 194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프 랑 스 - 라 살레트(La Salette) 위로 
성모 마리아는 고원 목장도 찾아가셨다. 그레노블교구 라 살레트에 있는 해발 1800m의 목장에서 1846년 9월 19일 멜라니 갈바(14세)와 막시민 지로드(11세)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공 모양의 물체에서 나와 우물 가의 돌 위에 앉아서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비통히 우시며 들일을 하면서 주일을 지키지 않은 죄, 거룩한 이름을 불러 함부로 저주하며 대소재를 지키지 않은 죄 때문에 수확이 결딴나고 대기근이 들 것이라 하셨다. 또 7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부모의 품에서 중병으로 죽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보속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며, 아이들에게 각각 한 가지의 비밀도 말씀하셨다. 또한 사람들이 회개하면 돌과 바위들이 곡식 더미로 화할 것이고 풍성한 감자 수확을 거두리라는 희망도 아울러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발현은 그후 프랑스 정체가 제3공화정이 되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직자들의 저지 등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단, 그레노블 주교는 1851년 이 발현이 사실임을 인정하였고, 교황 레오 13세(1878~1903)가 기념 성당을 세웠다. 도시와는 다른 산의 정기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을 위하여 상설 고백소도 마련되어 있다.   
  
프 랑 스 - 루르드(Lourdes) 위로 
루르드는 오트 피레네도의 타르브 평야에서 그치는 산맥의 마지막 기복과 라브당 산의 일곱 계곡의 물이 흐르는 하구에 위치한다. 루르드의 성채는 피레네의 요새였고, 18세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는 1858년 2월부터 7월까지 18회에 걸쳐 벨라뎃다 수비루(14세)에게 발현 하셨다. 연약한 양치기 소녀 벨라뎃다가 친구및 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들로 나가 개울을 건너려고 양말을 벗을 때였다. 아주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부인이 저만치 서 계시는 것이었다. 별 말씀 없이 부인은 아기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결함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을 지닌 채 푸른 띠를 나부끼며 정성스레 합장한 손으로 묵주알을 굴리고 계셨다.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발현에 대해 말하는 벨라뎃다는 정부 당국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발현 장소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의 발현때 '나는 원죄없는 잉태'라 하심으로써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선포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교의를 확인하신 마리아는 기적의 샘을 솟게 하셨다. 즉 벨라뎃다로 하여금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이 귀한 그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에 샘을 파게하시고, 그 물로 불치의 병자들을 속속 치유하기 시작하셨다. 동정 마리아의 루르드 발현은 1862년 공인되었고, 잡목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동굴 속에 '원죄없는 잉태'의 성모상이 1864년 최대의 성황리에 안치되었다. 발현 후 50년 동안 4,000건 이상의 난치병 치유 사실이 보고되었고, 신앙의 기쁨을 찾은 이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1872년부터는 순례자가 더욱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그 수는 연간 200만명을 넘는다. 실로암(요한 9:10)과 베짜타연못 (요한 5:4)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치유능력을 마리아는 오늘도 루르드의   
샘을 통해 드러내고 계신다. 벨라뎃다는 1866년 루르드를 떠나 수녀가 되었으며, 35세를 일기로 1879년 선종하였고 1933년 시성되었다.   
  
프 랑 스 - 풍맹(Pont-main) 위로 
1871년 1월 17일 저녁 날씨가 어떤가 보려고 창고에서 문 밖에 내다보던 바베데트(12세)는 위가 넓은관을 쓰고 5각형의 금별들이 수놓인 푸른 옷차림의 부인을 보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임박으로 프랑스 서부 전체가 공포에 떨 때 성모님은 브르타 마엔 북쪽 풍맹에서 외젠을 비롯한 일곱 어린이들에게만 자신을 보여 주시며, "내 자녀들아, 기도해라. 그러면 단시일 내에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실 것이고, 나의 거룩한 아들이 그 마음을 움직이실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한자한자 찍어내어 아이들로 하여금 군중을 위하여 읽게 하셨다. 발현한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배로 커지면서 글자가 나타난다는 말을 듣고 모였던 6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발현이 계속되는 동안 삼각별 셋만을 볼 수 있었다.다음날 밤 독일군의 진군은 중단되었고, 11일 후인 1월 28일에는 휴전이 조인되었다. 성모님의 보호를 구하며 징집되었던 39명의 풍맹 청년들은 무사히 귀가했다. "항상 기도하라"라는 복음 말씀외에는 한마디도 더 첨부하지 않은 마리아의 메세지가 전해지자, 하루에도 수천 명씩 교회로 몰려왔다. 이 성모 성지는 1872년에 공인되었고, 1900년 성당이 축성되었으며, 성모상이 세워졌다. 그것은 진한 남빛 바탕에 금별이 수놓인 옷차림의 마리아가 슬픔에 잠겨 피범벅의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를 두 손으로 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조금 내미는 모습이다   
아 이 랜 드 - 녹(Knok) 위로 
1845~6년의 기근으로 2백만 명 이상이 죽어가던 아일랜드는, 1879년 또 한 차례의 기근으로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 해 8월 21일 녹 마을의 두소녀와 성당의 가정부는 저녁 7시경 성당 서쪽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입상셋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15명이 모여들었더니, 흰옷을 입은 성모님이 미사를 드리는 사제처럼 손을 든 채 가운데 계시고, 오른편에 손을 합장하고 기도드리는 성 요셉, 왼편에 책을 들고 강론하는 자세의 주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왼쪽에는 소박한 제대 위에 커다란 십자가와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놓여 있으며, 그 주위를 광선과 별들, 공중에 떠 있는 천사들의 무리가 에워싼 것을 9시 넘어까지 볼 수 있었다. 이 짧은 발현의 핵심은 주교를 통해 제대와 결합된 마리아, 희생되신 은총의 중재자 어린 양과 함께 곤경에서 보호하시는 아일랜드의 모후 마리아에게 있다. 성모 마리아는 녹에서 특별히 공경받으시며 은혜를 내리고 계신 것이다.  
포 르 투 칼 - 파티마(Fatima) 위로 
파티마의 성모 발현은 이제까지의 모든 발현보다 세계사와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의미심장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와중이던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서유럽의 역사에 개입하였고, 동유럽에서는 12월 7일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2의 이데올로기 세력을 계획하여 전세계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한편 바티칸에서는 몬시뇰 파젤리(교황비오 12세)의 주교 서품식을 5월13일 거행하고, 그를 독일 대사로 파견하여 평화를 위한 중재를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평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즈음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성 베드로 광장 에서 『사탄이 바티칸을 지배해야 한다. 교황은 사탄의 노예가 될 것이다』라는 깃발과 루치페르가 미카엘 대천사를 내동댕이치는 그림을 나부끼며 창림 200주년 기념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까닭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1982년 시성된 M.콜베는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군주정치에서 셰계 혁명을 거쳐 민주정치로 발돋음하던 역사적 전환기 1917년의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성모 마리아는 6번에 걸쳐 발현하여 세계 평화를 위한 참으로 중요한 메시지들을 남기셨다. 어린 목동들 루치아(10세), 프란치스코(9세)와 히야친타(7세)가 점심을 먹고 묵주의 기도를 끝내려 할때 번개가 번쩍 하였다. 폭풍우가 닥칠까 무서워 급히 양떼를 몰고 내려오던 어린 목동들은 좀더 강한 번개가 다시 치는 것을 본 순간 너도밤나무 위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여인이 서 계시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천국에서 왔으니 무서워하지 말라는 부인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매달 13일 그 발현 장소에 오면 10월에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세계 평화와 전쟁 종식을 위하여 매일 묵주의 기도를 바칠 것을 당부하신 부인은 세번째 발현때 『사람들이 나의 요청을 실천한다면 러시아는 회개하고 평화가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전세계에 악을 행하고 전쟁과 교회에 대한 박해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나의 티없는 성심이 승리라리라. 교황은 러시아를 나에게 봉헌할 것이며, 얼마 동안 세계에는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날 지옥에 대한 환시를 본 세목동들은 전율하였다.  
10월 13일 마지막 발현 때 성모님은 기념 성당을 지을 것과 죄인의 회개및 용서를 위해 보속할 것을 당부하고 두팔을 펼치고 하늘로 오르셨다. 그 발현을 지켜보려고 모였던 7만 명의 군중은 퍼붓던 비가 그치고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태양이 활활 타는 수레바퀴처럼 돌며 색색의 빛줄기를 뿜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치는가 했더니, 멈춘 다음 그들을 향하여 떨어지려는 광경에 접하였다. 모두들 겁에 질려 " 주 예수여, 저희들이 여기서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부르짖자 태양이 정상으로 되돌아갔다.'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난' 하늘의 큰 표징(묵시12장)으로   
종말론적 성격을 띠는 이러한 파티마의 발현을 통하여 평화의 모후는 악의 세력과 부단히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일깨우신 것이다.   
세 어린이에게 주신 세 가지 비밀 중 한 가지는 아직 공개되어 있지 않다.   
파티마의 성모 메시지는 후세 사람들이 언제나 시대의 조류와 함께 검증하고 돌아볼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를 다시 한번 평화의 모후께 봉헌하였다.   
벨 기 에 - 보랭(Beauraing) 위로 
파티마의 성모 메시지가 느리게 전파되는 동안 성모 마리아는 벨기에에서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내셨다. 1932년 11월 29일부터 1933년 1월 3일까지 보랭의 다섯 어린이들에게 잠깐씩 여러 차례 발현하시고는 '원죄없이 잉태된 동정녀, 하느님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인 당신의 성심을 사랑하고 더욱 착한 사람이 될 것, 주님을 위하여 항상 희생을 바치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마지막 발현 때 모여 있던 군중들에게 어둠에 싸인 정원에 불 같은 공을 하늘로 떠올려 찬란한 불꽃으로 폭발하며 쏟아지는 기적을 보이셨다.   
그날 저녁부터 보랭은 은총을 내리시는 마리아의 새로운 성지가 되었다. 1943년 2월 19일 관할 주교 안드레아 샤르는 이 발현을 사실로 인정하였다.   
  
벨 기 에 - 반뇌(Banneux) 위로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 사이에 성모 마리아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로 반뇌에 사는 마리에트(12세)에게 8번 나타나셨다. 당신을 철저히 신뢰할것을 바라시며 루르드처럼 샘터를 지적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치유와 회개의 기적을 일으키는 루베네의 아르덴 고원의 반뇌도 1949년 성지로 공식 발표되었다.   
스 페 인 - 가라반달(Garabandal) 위로 
1961년 6월 18일 스페인의 산골마을 산 세바스티안 데 가라반달에 성 미카엘 대천사가 나타나 남의 사과를 몰래 따먹고 놀던 콘치타(12세),롤리(12세),히야친타(12세)와 마리쿠르스(11세)에게 7월 12일 '가르멜산의 성모'가 발현하리라는 예고를 했다. 과연 7월 12일이 되자 흰옷과 파란 망토에 왕관을 쓰고, 오른판에 스카풀라를 두른 귀부인이 처음 천사가 나타났던 카예하에 나타나셨다. 그후 1965년 11월 3일까지 몇 차례 더 발현하여 사람들이 아이들을 통해 드린 물건에 친구하고 돌려 주시기도 하며, 때로는 갓난아기 예수를 안고 오시어 아이들의 팔에 안겨 주시기도 했다. 어느날 롤리와 히야친타가 사람들이 성모님의 목소리나마 듣고 싶어하므로 말씀하시기를 청하고 사람들이 녹음을 시도하자, 성모님은 "아니, 나는 말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하셨는데, 그것을 많은 사람이 듣고는 깊은 감명을 받아 진실성을 믿었다. 그러나 곧 녹음을 다시 틀었을 때에는 그 음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아직 심사 계류중인 이 발현지에서 탈혼 또는 부르심의 무아경 속에서 목격자들이 행진을 하기도 하고,   
지상의 어느 감실로부터 미카엘 대천사가 날라온 성체가 아이들의 혀 위에 나타나는 것이 비데오 카메라에 담긴 것을 볼 수 있다.이러한 발현에 따른 메세지 중 1965년 6월 18일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미카엘 대천사가 전한 것은 아래와 같다."전에는 잔이 채워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넘치고 있다. 많은 추기경, 주교, 사제들이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 또한 많은 영혼들을 그리로 데려가고 있다. 성체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너희는 너희 자신들의 노력으로 하느님께서 분노를 거두시게 해야한다....너희는 지금 마지막 경고를 받고 있다.....보다 많은 희생을 바치고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라."   
유고슬라비아 - 메주고예(Medugorje) 위로 
1981년 6월 24일부터 시작된 이 발현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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