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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8. 성모 마리아에 관한 주요 교도권 문헌(구세주 어머니)

             X. 성모 마리아에 관한 주요 교도권 문헌

   [X-9] : 구세주의 어머니 Redemptoris Mater (1987.03.25 /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목차

I. 서론

II.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의 마리아
1. 은총이 가득하신 분
2.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
3. 이분이 네 어머니 이시다.

III. 순례하는 교회의 한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어머니 :

1. 지상의 모든 나라들 안에 현존하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2. 교회의 여정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
3. 순례하는 교회의 마니피캇

IV. 어머니의 중재 :

1. 주님의 여종이신 마리아
2.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안에서의 마리아
3. 성모 성년의 의미

V. 결론

[10-9-1] : 서론

1. 구세주의 어머니는 구원 계획안에서 명백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 4,4-6).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관하여 다루면서 인용한 이 성 바오로의 말씀으로 본인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역할과 교회 생활 안에서 그분이 지니시는 적극적이고 모범적인 현존에 대해 묵상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것은 이 말씀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명, 성령의 선물, 구세주를 낳은 여인의 역할,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때가 참"이라고 하는 신비 안에서 한꺼번에 찬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참"은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요한 3,16) 영원으로부터 계획하시어 당신 아들을 보내신 순간을 가리킨다. 이것은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고"(요한 1,1-14) 스스로 우리의 형제가 되신 순간을 말한다. 이것은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이미 충만한 은총을 불어넣으셨던 성령께서 그의 태중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형성하신 순간을 가리킨다.

이 "참"은 영원히 시간 안에 들어옴으로 해서 시간이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신비로 채워져 결정적으로 "구원의 때"가 된 순간을 일컫는다. 끝으로 이 "참"은 감추어진 교회 여정의 시작을 가리킨다. 전례를 통하여 교회는 나자렛의 마리아를 교회의 시작으로 찬미한다.

그것은 교회가 원죄 없으신 잉태 사건을 통하여 빠스카의 구원 은총이 가장 존귀하신 교회의 한 지체 안에서 앞당겨 이루어졌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생의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와 마리아, 곧 교회의 주님이시오 머리이신 그분과 새 계약의 첫 "피앗"(Fiat)을 발언함으로써 신부이자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신분을 예시한 분이 굳게 결합되었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현존에 힘입어(마태 28,20 참조) 교회는 종말을 향하여 살아가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러 간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본인은 이 점을 바로 강조하고자 한다―교회는 "신앙의 나그네길을 걸으셨고, 아드님과의 일치를 십자 정사(釘死)에 이르기까지 충실히 보존하셨던" 동정 마리아께서 이미 걸으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의미가 풍부하고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이 말씀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서 취한 것이다. 교회 헌장은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가 사랑하는 어머니,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에 관한 교회의 교의를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공의회 직후 본인의 위대한 선임자이신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복되신 마리아에 관하여 더 언급하시기를 원하셨고 그리하여 회칙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i Matri) 그리고 이어서 사도적 권고 "위대한 표징"(Signum Magnum)과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께서 교회 안에서 받으시는 특별한 공경의 근거와 기준 및 신앙의 정신에 상응하는 여러 형태의 마리아 신심―전례상, 대중적, 개인적 신심 등―에 대해 설명하셨다.

3. 본인이 이 주제를 다시금 다루도록 만드는 상황은 가까이 다가오는 2000년에 대한 기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2000년의 축제는 우리로 하여금 동시에 그분의 어머니를 바라보게 한다. 지난 몇 년에 걸쳐 그리스도의 탄생 2000년 축제를 마리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로 준비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이 있었다.

실제로 마리아의 탄생일을 연대적으로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마리아께서 그리스도 이전에 구원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항상 주지하고 있었다. "때가 차는" 순간이 결정적으로 다가왔을 때―임마누엘의 구원 사건―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로 예정되었던 그분은 이미 지상에 존재하고 계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분이 그리스도에 "앞서 오신" 사실이 해마다 대림절의 전례에서 묵상된다. 그러므로 구세주께 대한 그 옛날의 역사적 기대와 그리스도의 탄생 후 2000년이 끝나면서 3000년대에 접어드려는 지금을 비교한다면, 이 기간 동안에 대림절의 기다림의 "밤" 가운데 참된 "샛별"처럼 빛나기 시작한 그분께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는 사실은 지극히 자명할 것이다. 이 별이 "새벽"과 함께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빛나는 것처럼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원죄 없으신 잉태된 순간부터 구세주에 앞서, 즉 인류 역사 안에 "정의의 태양"이 뜨기 전에 이미 빛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안에서의 그분의 현존은―그분의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전혀 주의를 끌지 못할 정도로 조용했던 현존―숨겨졌던 "시온의 딸"(스바 3,14; 즈가 2,10 참조)을 인류의 전역사를 포함하는 구원 계획에 연결시키신 영원하신 분에 앞서 아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따라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섭리가 계시와 신앙의 중심 실재임을 알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2000년에 다가서는 이 마지막 몇 년 동안에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특별한 현존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4. 이를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의 하느님의 어머니"를 소개함으로써 우리를 준비시킨다. 공의회가 선언하는 바와 같이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특별히 이 원칙은 예외적인 "인류의 딸",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 그 특별한 "여인"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만 이분의 신비가 완전히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강생의 신비가 자신으로 하여금 강생하신 말씀의 어머니에 관한 신비를 더 깊이 고찰하고 분명하게 밝힐 수 있게 하였다고 이해해 왔다. 에페소 공의회(431년)는 이 점을 명확하게 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바로 이 공의회 중에 마리아의 신적 모성(神的 母性)에 관한 진리가 교회의 믿을 교리로 장엄하게 선포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당신의 동정 품안에 잉태를 하시어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셨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하여 어머니의 신비가 교회의 신앙 안에 완전히 밝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라는 교의는 에페소 공의회와 그후 교회에 있어서, 말씀이 인성(人性)을 버리심 없이 당신 위격(位格)과의 일치속에 참으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강생의 교의에 대한 최종적인 확인과 같은 것이다.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를 소개함으로써 교회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주께서 자신의 몸으로 만드신" 교회와 특별히 결합하여 계신다. 공의회 문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관한 이 진리를 (바오로 서간의 가르침을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 "성령의 힘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진리와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시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말하자면 강생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비 안에서 더 발전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생하신 말씀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강생의 실재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본인은 무엇보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충실히 보존하시면서 앞장서 가셨던 "신앙의 여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림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를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와 결합시키는 "이중의 끈"이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동정녀 마리아의 일생, 그분의 개인적 신앙의 나그네길과 그분이 구원사에서 차지하는 "더 나은 역할"에 대한 문제일 뿐 아니라 동시에 꼭 같은 "신앙의 여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 즉 하느님 백성 전체의 역사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공의회는 또 다른 대목에서 마리아께서 "신앙과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교회의 모델"이 되심으로써 신앙의 나그네길을 "앞장서 가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전형(典刑) 또는 모델로 "앞장서 가심"은 마리아처럼 자신 안에 어머니와 동정녀의 역할을 일치시킴으로써 구원의 사명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교회의 깊은 신비와 관련되는 것이다. 교회는 "신랑에게 바친 신의를 완전하고 깨끗이 지키는" 동정녀이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에게 새로운 불멸의 생명을 줌으로써 스스로도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6.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여정"에 비유될 수 있는 거대한 역사적 과정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의 순례는 내적인 역사, 즉 영혼들의 역사를 가리킨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이 지상에서 잠시 머물 수밖에 없으며 역사적 상황의 지배를 받는 모든 인간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래의 묵상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현재에 대해 전념하고자 한다.

현재가 비록 그 자체로는 아직 역사가 되지 못하지만 구원의 역사라는 의미에서 끊임없이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백성에 "앞장서 가시기를" 계속하시는, 넓은 장이 열리는 것이다. 마리아의 특별한 신앙의 순례는 교회를 위해서, 개인과 공동체들을 위해서 민족들과 국가들을 위해서 그리고 어떤 의미로 전인류를 위해서 끊임없는 기준이 된다.

사실 마리아의 신앙의 순례가 영향을 끼치는 범위를 측도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공의회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이미 교회의 종말적 성취라고 강조한다. "교회는 복되신 동정녀로 말미암아 이미 완덕에 도달하여 티나 주름이 없는 교회가 되었다"(에페 5,27 참조)고 말하면서 동시에 공의회는 이렇게 덧붙여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함으로써 성덕을 함양하도록 더욱 노력한다.

따라서 신도들은 뽑힌 이들 공동체 전체에게 덕행의 모범으로 빛나고 계신 마리아를 바라본다." 신앙의 순례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께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천상에서 당신 아드님의 곁에서 영광을 받으신 마리아는 이미 신앙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는 것(1고린 13,12)과의 경계선을 넘어서신 것이다. 그

러나 이 종말적 완성 안에서도 마리아는 아직도 신앙의 여정 가운데 순례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바다의 별"(Maris Stella)이 되어 주신다.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는 이들이 이 지상에서 그들의 눈을 마리아께 향하게 되는 것은 "그분이 낳으신 아드님이 하느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이로 삼으신 분"(로마 8,29 참조)이기 때문이며 이 형제 자매들을 "낳아 기르시는 데 있어서 마리아께서 모성애로 협력하시기" 때문이다.

[10-9-2] :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의 마리아 /

[1. 은총이 가득하신 분]

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에페 1,3).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이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 구원 계획을 밝혀준다. 이 계획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창세 1,26 참조)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계획이다. "한 처음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모두가 포함되었듯이 "때가 차서" 그리스도께서 결정적으로 오실 때 완전히 계시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도 모두가 영원으로부터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이것은 위에서 인용한 에페소서의 구절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다―"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에페 1,4-7).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완전히 계시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방금 인용한 에페소서와 다른 바오로 서간 등에 들어 있는 가르침에 의하면(골로 1,12-14; 로마 3,24; 갈라 3,13; 2고린 5,18-29 참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이 계획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지만 아버지께서 구원 사업을 맡기신 분의 어머니이신 그 "여인"에게 특별한 자리가 부여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듯이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약속된 뱀에 대한 승리(창세 3,15 참조) 속에 이미 예언적으로 그 여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의하면 "그 여인은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동정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불릴 것이다"(이사 7,14 참조). 이렇게 구약성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양자들로 만드셨을 때" 이루어진 "때의 참"을 준비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루가와 마태오 복음서의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8. 마리아는 천사의 알림이라는 이 사건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들어오셨다. 이 사건은 처음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안에, 나자렛에서 일어났다. 하느님의 사자는 동정녀에게 인사한다.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루가 1,28 참조).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가 1,29). 이 놀라운 말, 특히 "은총이 가득하신"(kecharitom ne)이라는 표현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이 말, 특별히 "은총이 가득하신"이라는 표현에 대해 묵상하고자 한다면 앞서 에페소서에서 인용한 바로 그 대목에서 의미있는 비교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의 알림 후에 나자렛의 동정녀께서 "여인들 중에 복되신 분"(루가 1,42 참조)이라고 불리신다면,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채우신 그 축복 때문이다. 이 축복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며 충만함과 보편성(모든 축복)을 지니는 영적 축복이다. 이 축복은 성령 안에서 동등한 본성을 지니신 아들을 아버지와 결합시키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역사 안에서 끝까지 모든 백성들에게 내려질 축복이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여인들 중에 복되신 분"으로 인사한 대로 이 축복은 특별히 그리고 예외적으로 마리아께 해당되는 것이다.

이 이중의 인사는 어느 의미로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은총의 영광"이 이 "시온의 딸"의 영혼 안에서 밝히 드러난 사실에 기인한다. 사자는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인사한다. 마치 그것이 마리아의 진짜 이름인 것처럼. 사자는 마리아를 지상의 이름인 미르얌(마리아)이 아니라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른다. 이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왜 대천사가 나자렛의 동정녀를 이렇게 부르는가?

성서의 언어에서 "은총"은 특별한 선물을 뜻하는데 이 특별한 선물은 신약성서에 의하면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의 삼위일체적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1요한 4,8 참조). 이 사랑의 열매가 에페소서가 말하는 "선택"이다. 하느님 편에 있어서 이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당신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구원하시려는 영원한 원의(2베드 1,4 참조), 곧 초자연적 생명에의 참여를 통한 구원인 것이다. 이 영원한 선물,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신 이 은총의 효과는 거룩함의 씨앗과 같은 것이며 또한 은총을 통하여 선택된 사람들에게 생명과 거룩함을 주시는 하느님 자신의 선물로 사람 안에서 솟아나는 샘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영적인 축복을 지닌 축복",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딸들이 되는 일"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사자가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인사하는 것을 읽고서, 계시와 옛 약속들을 한데 모아놓고 있는 복음서의 문맥을 살펴볼 때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축복" 중에서도 이것은 특별한 "축복"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는 이미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강생 안에서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뽑으신" 분으로 현존하신다. 나아가서 아버지와 함께 아들도 마리아를 뽑으시어 그를 영원으로부터 거룩하신 성령께 의탁하셨다. 마리아는 온전히 특별하고 예외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며 모든 "은총의 영광"을 소유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드님" 안에서 영원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계신다. 동시에 마리아는 이 "위로부터 오는 선물에"(야고 1,17 참조)자신을 완전히 열으셨고 또한 연 상태로 머물러 계신다. 공의회가 가르치는 대로 마리아는 "신뢰로써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기다리고 받는 주님의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분이시다.

9.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는 인사와 이름이 이 모든 것을 뜻한다면, 성모 영보의 문맥에서 볼 때 이 인사와 이름은 무엇보다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선택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은총이 가득하다"라는 말은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되고 예정됨으로써 받으시는 모든 초자연적 선물을 가리킨다. 이 선택이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선택과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마리아의 선택은 전적으로 예외적이고 유일무이한 것이다. 이 사실에서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위치의 고유성과 유일성이 드러난다.

하느님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리아, 당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십시오. 이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것입니다"(루가 1,30-32 참조). 그리고 동정녀가 이 놀라운 인사에 당황하여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천사로부터 인사에 대한 확인과 설명이 주어진다. 가브리엘은 동정녀에게 말한다. "성령이 당신께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루가 1,35 참조).

그러므로 영보는 강생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 그 첫 순간부터 주어진 강생의 신비에 대한 계시이다.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어느 면으로는 모든 피조물에게,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은 강생의 신비 안에서 정점의 하나에 다다른다. 이것은 정말로 인간과 우주의 역사 안에 주어진 모든 은총의 선물들 가운데서 하나의 정점이다.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말씀의 강생,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성과 실제로 일치되신 것이 바로 마리아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말하듯이, 마리아는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의 가장 사랑하시는 딸이 되셨고 성령의 궁전이 되셨으며 이렇게 탁월한 은총 때문에 마리아는 천상 천하의 다른 모든 피조물을 훨씬 초월하신다."

10. 에페소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영광스러운 은총"에 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에페 1,7)고 덧붙이고 있다. 교회의 공식 문헌들 안에 언명된 가르침에 의하면 이 "영광스러운 은총"은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탁월한 방법으로 구원받으셨다"는 사실을 통하여 드러났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이 내리시는 풍부한 은총과 당신의 아드님이 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구속 공로 때문에 마리아는 원죄의 유산으로부터 보호받으셨다. 이리하여 잉태 순간부터, 즉 존재할 때부터 마리아는 그리스도께 속하며 강생을 통하여 자신의 아드님이 되신, 영원하신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롯된 그 사랑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는 지상 출산의 질서에 따라 당신 자신이 어머니로서 생명을 주신 그분으로부터 신성에의 참여를 뜻하는 은총의 질서 안에서 생명을 받으시는 것이다. 전례는 서슴없이 마리아를 "창조주의 어머니"라 부르며 단체 알리기에리가 성 베르나르도의 입을 통하여 표현한 "당신 아드님의 딸"이라는 말로 마리아를 찬양한다.

마리아는 이 "새 생명"을 어머니께 대한 아드님의 사랑에 상응하도록, 따라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품위에 상응하도록 충만히 받으시기 때문에 천사는 영보 때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구원 계획안에서 강생의 신비는 원죄 후에, 즉 인간의 모든 지상 역사를 짓누르는 첫 범죄 후에, 즉 인간의 모든 지상 역사를 짓누르는 첫 범죄 후에(창세 3,15 참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약속의 충만한 성취를 이루어준다. 그리하여 한 아드님이, 죄의 악을 뿌리째 쳐부수어 버릴 "여자의 후손"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는 뱀의 머리를 쳐부수리라." 이 원초 복음의 말씀에서 보듯이 여인의 아들을 통해 이루어질 승리는 전인류 역사를 통하여 전개될 격렬한 투쟁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초에 예고된 이 "적대"(적대)는 교회와 세상의 종말을 다루는 묵시록에서도 확인된다. 이 묵시록에서 "여자"의 표징이 다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태양을 입고"(묵시 12,1) 나타난다.

강생하신 말씀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지상의 인류 역사와 구원 자체를 동반하는 투쟁인 이 적대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계신다. 이 중심 자리에서 "주님의 약하고 가난한" 사람에 속하는 마리아는 인류의 어느 누구와도 달리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그 영광스러운 은총을"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으며 이 은총은 마리아의 특별한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단언해 준다. 이렇게 마리아는, 바오로의 편지에서 언급되었듯이, 하느님과 인류 전체 앞에서 하느님의 변할 수 없고 침범할 수 없는 선택의 표지로 머무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천지창조 이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뽑으시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4,5). 이 선택은 여하한 악과 죄의 경험보다, 인간 역사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저 "적대"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다. 이 역사안에서 마리아는 확실한 희망의 표지로 머물러 계신다.

[2.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

12. 영보 사건을 들려준 후 루가 복음사가는 곧바로 "유다의 한 동네"(루가 1,39)를 찾아 떠나는 나자렛의 동정녀의 발걸음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동네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산중에 위치한 현재의 아인 카림(Ain-Karim)으로 추측된다.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위하여 "서둘러" 이 동네에 도착하였다. 마리아의 방문 이유는 영보 때 가브리엘이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힘에 의해 남편 즈가리야의 아이를 임신한 엘리사벳에 대해 말한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가씨의 친척 엘리사벳을 보십시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달이나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루가 1,36-37). 하느님의 사자는,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34) 하는 마리아의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일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마리아에게 약속된 것은 엘리사벳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니 더 훌륭히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애덕의 충동을 받아 친척집으로 가신다. 마리아께서 집에 들어서시자 엘리사벳은 그를 반겨 맞이하며 뱃속에 든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낀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 소리로 외치며 마리아에게 인사한다. "모든 여인들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루가 1,40-42 참조). 엘리사벳의 탄성 내지 환호는 천사의 인사에 이어 성모송의 한 부분을 이루며 교회에서 가장 많이 바쳐지는 기도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더욱 의미깊은 것은 곧 이어 나오는 엘리사벳의 물음에 들어 있는 말이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가 1,43). 엘리사벳은 마리아에 대해 증언한다. 엘리사벳은 자기 앞에 주님의 어머니, 메시아의 어머니께서 서 계심을 알아보고 선언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이 뱃속에 데리고 있는 아들도 이 증언에 참여한다.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이 아기는 요르단 강에서 예수를 가리키며 메시아라고 증언할 훗날의 세례자 요한이다.

엘리사벳의 인사 말마디마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지만 그 중에서도 마지막 말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이 말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는 천사의 인사와 연결시킬 수 있다. 이 두 텍스트 모두 본질적인 마리아론의 내용, 즉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참으로 현존하게 된 마리아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 준다. 천사가 말한 "은총이 가득하다"라는 말은 하느님 자신의 선물을 의미한다. 방문 때 엘리사벳이 선언한 마리아의 믿음은 어떻게 나자렛의 동정녀가 이 선물에 응답하였는지를 보여준다.

13. 공의회가 가르치는 대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믿음(로마 16,26; 참조 : 로마 1,5; 2고린 10,5-6)이 요구된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이 의탁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마리아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영보이며,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 하는 엘리사벳의 인사는 근본적으로 이 결정적인 순간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영보 때 마리아는 당신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분께 "순종하는 믿음"을 드러내면서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셨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자신의 전인간적, 여성적 "자아"로 응답하였으며, 이 신앙의 응답은 "이끄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은총"과의 완전한 협력, 그리고 "끊임없이 당신의 선물로 신앙을 완성시키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포함하고 있었다. 천사로부터 마리아에게 전해진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은 마리아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보라,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루가 1,31). 이 알림을 받아들임으로써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게 되어 있었으며 강생의 신적 신비는 마리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자비하신 성부께서는 예정된 어머니의 승낙이 강생에 선행하기를 원하셨다." 마리아는 사자가 한 말을 다 듣고 나서 승낙을 하신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마리아의 이 "피앗"―"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은 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신적 신비의 성취를 위해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 "피앗"의 응답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드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께 하신 말씀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당신은 희생 재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으셨고 저를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5-7). 강생의 신비는 마리아가 "피앗"을 발언하셨을 때 이루어졌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피앗"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마리아께 달려 있던 아드님의 원의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이 피앗을 믿음 안에서 발언하셨다. 신앙 안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무조건 하느님께 내맡기셨으며 "주님의 종으로서 아드님의 인격과 사업에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다." 그리고 이 아들을―교회의 교부들이 가르치는 것처럼―마리아는 당신 뱃속에서 잉태하시기 전에 이미 마음안에, 정확히 말해서 믿음 안에 잉태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은 아주 정확하게 마리아를 찬양하였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이 말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하느님의 어머니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것이 엘리사벳의 기쁨에 찬 발견이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14. 마리아의 믿음은 성 바오로가 "우리 믿음의 아버지"(로마 4,12 참조)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에도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시하신 구원의 섭리 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구약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는 반면 영보에서의 마리아의 믿음은 신약의 시작을 이루고 있다. 아브라함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많은 민족들의 조상이 도리 것을 믿었던 것처럼"(로마 4,18 참조), 마리아도 영보 때 자신의 동정성을 고백하고서("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루가 1,35) 하는 천사의 알림대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 성령의 힘에 의해 자기가 하느님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것을 믿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 하는 엘리사벳의 말은 영보의 한 순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영보는 그리스도를 기다리시는 마리아의 믿음의 정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께 향하는 그분의 전여정", 그분의 신앙의 순례가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길에서 탁월하고 진정 영웅적인 방법으로 그분이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 고백하신 "순종"이 완성될 것이다. 마리아의 모든 여정에서 드러난 "순종하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하느님 백성의 성조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자녀다우면서도 어머니다운 "피앗"의 순례 동안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으셨던 것이다." 특히 이 여정의 특정한 단계에서, "믿으신" 마리아에게 주어진 축복이 생동감있게 드러나게 된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판단이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음을"(로마 11,33) 겸손되이 인정하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주는 진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영원한 뜻에 의해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일"과 "헤아릴 수 없는 판단"의 한가운데 서 있다고 할 수도 있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준비된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희미한 믿음의 빛 안에서 자신을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일과 헤아릴 수 없는 판단에 내맡기시는 것이다.

15. 영보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 "예수(구세주)라고 부르게 될" 아들에 대해 들을 때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라는 사실과 "그는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 (루가 1,32-33)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 전체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약속된 메시아는 "위대한 분"이라야 한다. 그런데 하늘의 사자 역시 "그는 위대한 분"이 되시리라고 예고한다. 위대한 분이 되시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는 이름과 다윗의 왕위를 차지하시리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분은 왕으로서 "야곱의 후손"을 다스리시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이러한 자기 백성의 기대 속에서 자라왔었다. 마리아가 영보의 순간에 천사의 말이 뜻하는 중대한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끝이 없을" 왕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마리아는 믿음을 통하여 영보의 순간에, 자신이 "메시아 왕"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것임에도 불고하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고 대답하였다. 첫 순간부터 마리아는 무엇보다 "순종하는 믿음"을 고백하셨으며, 영보의 말씀을 들려주신 하느님께서 친히 그 말씀에 주신 의미에 자신을 내맡기셨던 것이다.

16. 이 "순종하는 믿음"의 길을 가는 도중 얼마 후에 마리아는 다른 말,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므온이 하는 말을 들으시게 된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지사십 일이 지났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의 법이 명하는 대로 "그를 주님께 봉헌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갔다"(루가 2,22). 예수의 탄생은 극도의 가난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루가 복음서는 로마 황제가 호구 조사 명령을 내렸을 때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으나 "여관에서 머무를 방을 얻지 못하고,"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아 "말구유에 눕혔다"(루가 2,7 참조)고 들려준다.

시므온이라고 불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이 마리아의 신앙의 "여정" 시초에 나타난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그의 말(루가 2,25-27 참조)은 영보의 진리를 확인해 준다. 그는―천사의 명령대로―예수라는 이름이 붙여진(루가 2,21 참조)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았다. 시므온의 말은 구세주, 즉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예수의 이름의 의미와 좋은 조화를 이룬다. 시므온은 주님께 말씀드린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인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루가 2,30-32). 그리고 시므온은 동시에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고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시므온은 직접 마리아에 관하여 덧붙인다.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 2,34-35 참조). 시므온의 말은 마리아께서 천사에게서 들으신 예고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예수는 구세주이시며 인류에게 있어서 "계시의 빛"이시다. 바로 이것이 성탄 밤에, 목자들이 마굿간에 찾아왔을 때(루가 2,8-20 참조) 드러났던 사실이 아닌가? 이것이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올 때(마태 2,1-12 참조) 더 분명하게 드러나야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동시에 마리아의 아드님은 생의 시작에서부터,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함께 시므온의 다른 말, 즉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루가 2,34)을 체험하시게 될 것이다. 시므온의 말은 마리아에게 아드님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는 동안 지나야 할 실제적인 역사적 상황, 즉 오해와 고통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주어진 제2의 영보와 같은 것이다. 이 시므온의 예언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의 성취에 대한 마리아의 믿음을 확인해 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리아께서 고통받으시는 구세주 곁에서 함께 고통 속에 순종하는 믿음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점과 마리아의 어머니 역할은 신비스럽고 비참할 것이라는 점을 밝혀 준다. 그리하여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예를 표하고("그들은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예물을 드리고 떠난 다음(마태 2,11 참조)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했기"(마태 2,13 참조) 때문에 마리아는 아드님과 함께 요셉의 보호 아래 에집트로 피난해야 했었다. 그리고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그들은 에집트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마태 2,15 참조).

17. 헤로데가 죽은 후 성가정이 나자렛에 돌아올 때부터 오랫동안, 감추어진 생활이 시작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루가 1,45) 마리아는 매일 매일 이 믿음을 실천하며 사신다. 그리고 매일 그분의 곁에는 "당신이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아드님이 계신다.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을 부르실 때 이 이름을 사용하신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에서는 옛부터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아드님을 그렇게 부른다 해서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아드님이 천사에 의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루가 1,32 참조)이라 불리운 사실을 알고 있다. 마리아는 자신이 "처녀의 몸이면서도" 성령의 힘에 의해, 모세와 성조들의 시대 때 구름이 하느님의 현존을 덮고 있었듯이(출애 24,16; 40,34-35; 1열왕 8,10-12 참조) 자신을 덮었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에 의해(루가 1,35 참조)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음을 알고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당신이 동정의 몸으로 낳으신 아기가 천사가 말한, 바로 그 "거룩한 분",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계신 것이다.

예수의 생활이 나자렛의 집에서 감추어져 있던 기간동안 마리아의 생활도 믿음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골로 3,3 참조) 있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신비와의 접촉인 것이다. 마리아는 매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곧 구약에서 계시된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강생의 신비와 접촉하고 계셨다. 영보의 순간부터 동정녀 어머니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자기 계시 안에 이끌려 들어갔으며 이 신비를 깨닫고 있었다. 마리아는 어느날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어린 사람들" 중의 첫 번째이시다. "아버지, 당신을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마태 11,25).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마리아께서 "아드님을 아시는가?" 그러나 마리아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계시하시려고 택한 첫 번째 사람이시다"(마태 11,26-27; 1고린 2,11 참조). 영보의 순간부터 아드님―이 아드님을 영원한 "오늘"에 낳으신 아버지께서만 그를 완전히 아신다(시편 2,7 참조)―이 마리아에게 계시되었다 하더라도 아드님의 어머니는 오로지 믿음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만 아드님에 관한 진리와 접촉을 가지고 계신다. "마리아는 믿으셨고" 또 예수의 유년기 동안의 온갖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 그리고 예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며"(루가 2,51) 나자렛에서 감추어진 생활을 하시는 기간 동안에도 매일 끊임없이 믿으시기를 멈추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순종하셨으며 사람들의 눈에는 요셉이 그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요셉에게도 순종하셨다. 이 때문에 마리아의 아들을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마태 13,55)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드님의 어머니는 영보 때에 당신에게 알려진 바를 명심하면서 뒤이은 사건들에서 새 계약의 시작을 뜻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자신 안에 보존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인 복음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 시작 안에서―십자가의 성 요한의 표현을 빌자면―일종의 "신앙의 밤"과 연결된 특별한 마음의 무거움을, 보이지 않는 분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신비와의 친교 상태에서 살 수 있기 위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일종의 "장막"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이 마리아가 여러 해 동안 당신 아들의 신비와의 친교 속에 생활하신 방법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는"(루가 2,52) 동안 당신의 "신앙의 순례"를 계속해 나가셨다. 예수께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은 더할 수 없이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밝혀졌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허락된 맨 첫 인간이 요셉과 함께 같은 나자렛 집에서 사셨던 마리아였다.

그러나 예수를 성전에서 찾아 그의 어머니가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하고 물었을 때 열두 살 된 예수는 대답하였다.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복음사가는 덧붙인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루가 2,48-50). 예수는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른다."(마태 11,27 참조)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신비가 그의 어머니에게는 완전히 계시되었지만 어머니도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 신비와 친교의 상태에서 생활하셨던 것이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당신의 아들과 나란히 살면서, 그리고 "당신 아들과의 일치를" 충실히 보존하면서 마리아는 공의회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앙의 여정을 걸으셨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생활 동안에도(마르 3,21-25 참조) 엘리사벳 방문 때 들었던 축복이 마리아 안에서 매일 매일 성취되었다.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

18. 이 축복의 의미는 마리아께서 당신 아들의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실 때(요한 19,25 참조) 완전히 드러난다. 공의회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 이렇게 하여 마리아는 "아드님과의 일치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충실히 보존하셨던 것이다." 이 일치는 마리아가 영보 때 천사의 계시를 받아들이던 믿음과 똑같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루가 1,32-33).

그런데 지금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천사의 예언에 대한 완전한 부정의 증인으로 서 계신다. 당신의 아들은 단죄받은 자로 십자가의 나무 위에 달려 고통받고 계신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고통을 겪는 사나이…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는 천벌을 받은 자와 같았다…"(이사 53,3-5 참조). 하느님의 이 "헤아릴 수 없는 뜻" 앞에서 마리아가 보여준 순종하는 믿음은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영웅적인가? 마리아는 "그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는"(로마 11,33 참조) 분께 온전히 "자기를 하느님께 의탁하신" 것이다. 또한 마리아의 영혼 안에 작용하는 은총은 지극히 강하며, 성령과 성령의 빛, 그리고 성령의 힘에 의한 영향은 모든 것을 꿰뚫는다.

이 믿음을 통하여 마리아는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정확하게 골고타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5-8 참조). 십자가 밑에서 마리아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비우는 충격적인 신비에 참여한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 역사에서 가장 심오한 신앙의 "케노시스"(Kenosis. 자신을 비움)일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마리아는 당신 아들의 죽음, 구원을 이루어주는 죽음에 참여하신다. 도망친 제자들의 믿음에 비할 때 마리아의 믿음은 한층 빛나는 것이었다. 골고타 위에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이 시므온이 예언한 "반대받는 표적"이심을 결정적으로 확인하셨다. 동시에 골고타 위에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했던 말이 성취되었다.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19. 그렇다. 참으로 "그분은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 영보 후에 엘리사벳이 외친 이 찬미는 여기 십자가 밑에서 최고의 웅변으로 울려퍼지는 듯하며 이 찬미 안에 들어 있는 힘은 더욱 강한 힘이 된다. 십자가로부터, 즉 구속 신비의 깊은 내부로부터 이 축복받는 믿음의 광채가 빛나고 퍼져 나온다. 이 축복받는 믿음은 "시초"에까지 그 효과가 미치며,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참여로서 어느 의미로 우리 첫 조상들의 죄 안에서 드러났던 불순종과 불신에 대한 균형이 된다. 교회의 교부들, 특히 교회 헌장이 인용했던 교부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와의 불순종이 묶어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종이 풀어주었고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맺어놓은 것을 동정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 이렇게 하와와 비교하여 공의회가 말하는 것처럼 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산 사람들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가끔 "하와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라는 표현에서 천사가 "은총이 가득하신 분"으로 마리아가 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현존하고 계셨다면 그분은 지상의 여정 동안 신앙을 통하여 이 신비에 대한 참여자가 된 것이다. 마리아는 "신앙의 나그네길을 걸으셨으며" 동시에 조용하면서도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하여 마리아도 인류 안에 현존하고 계신다. 이렇게 아들의 신비를 통하여 어머니의 신비 역시 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3.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20. 루가 복음은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예수께 외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루가 11,27). 이 말은 육적으로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한 찬미의 표현이다. 아마도 이 여인은 예수의 어머니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으리라. 사실 예수께서 메시아 활동을 시작하셨을 때 마리아는 그를 동행하지 않고 나자렛에 머물러 계셨다. 이 여인의 말이 어느 면으로 마리아를 감추어진 상태에서 이끌어냈으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로써 적어도 한 순간 동안 예수의 유아기에 관한 복음이 군중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다. 이 복음안에서 마리아는 예수를 자신의 뱃속에 잉태하고 낳았으며, 군중 속의 여인이 외치는 것처럼 젖을 먹이는 어머니로 나타나신다. 이 모성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신(루가 1,32 참조) 예수는 참된 "사람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육"이시다. 그는 "육이 되신 말씀이다"(요한 1,14 참조). 그는 마리아의 살과 피에서 나오셨다! 그러나 육적으로 당신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해 여인이 외친 찬미에 관해 예수께서는 의미 깊게 대답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8). 예수께서는 육적인 인연으로만 이해된 모성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으로써 발전하는 신비로운 영적 인연에 주의를 돌리고자 하신다.

이러한 영적 가치로의 이전은 공관복음서들이 들려주는 예수의 다른 대답에서 더욱 분명히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만나려고 밖에 서 있다"는 말을 듣고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루가 8,20-21 참조) 하고 대답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르코 복음(3,34)이 기술하는 대로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또는 마태오 복음(12,49)에서처럼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하셨다.

이러한 표현들은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 후에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았을 때 열두 살 된 예수가 자기 부모에게 준 대답과 좋은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예수께서 나자렛을 떠나 팔레스띠나를 돌아다니시며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 그분은 전적으로 "당신 아버지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셨다"(루가 2,49 참조), 예수는 왕국을 선포하셨다. "하느님의 나라"와 "당신 아버지의 일"은 인간적인 모든 것에,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목적과 의무와 관계되는 모든 인간적인 인연에 새로운 차원과 의미를 넣어준다. 이 새로운 차원 내에서는 "형제"라는 인연도 같은 부모에서 비롯된 "육체상의 형제"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모성"역시 하느님 나라라는 차원과 하느님의 부성(父性)이라는 관점에서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루가가 들려주는 말에서는 예수께서 분명히 이 새로운 모성의 의미를 가르치신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육체상의 어머니로부터 거리를 두시는 것인가? 예수는 당신 어머니를 그녀 스스로 선택한 감추인 생활 속에 내버려두길 원하셨는가? 비록 예수의 말씀에서 이와 같은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새로운 다른 차원의 모성은 정확하게 마리아에게 관련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닌가? 따라서 군중 속에서 외친 여인에게 대답하신 예수의 축복은 우선적으로 마리아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 없이 마리아는 육체상으로 예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사실("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만으로도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나 특별히 이미 영보 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고" "마음속에 간직하며"(루가 1,38. 45; 2,19. 51 참조) 당신의 전 삶을 통하여 그 말씀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축복이 군중 속의 여인이 말한 축복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주님의 종"(루가 1,38)일 뿐이라고 부른 동정녀 어머니의 인격 안에 있는 축복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온 백성이 그분을 복되다 부를 것"(루가 1,48 참조)이 사실이라면 군중 속의 여인은 무의식적으로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의 예언적 구절을 확인하고 모든 세대의 마니피깟을 시작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마리아께서 동정을 보존하면서도 성령의 힘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아들을 낳으시게 되었다면 같은 믿음 안에서 마리아는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아적 사명 기간 중에 계시하신 모성의 다른 차원을 깨닫고 받아들이셨다. 이 모성의 차원은 처음부터, 말하자면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순간부터 마리아에게 속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마리아는 "믿으신 분"이셨다. 그러나 당신의 눈과 정신에 당신 아들의 메시아 사명이 더 분명해져 갈수록 어머니로서 자신도 당신 아들 곁에서 당신의 "역할"이 될 "새로운 모성"에 열린 자세를 보여주셨다. 사실 마리아는 처음부터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고 말하지 않았던가? 마리아는 어느 면에서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에페 3,19)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갈수록 분명하게 해주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간직하기를 계속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어느 의미로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당신 아들의 첫 "제자"가 되셨다. 예수께서 사도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첫 번째로 마리아에게 "나를 따르십시오"(요한 1,43 참조) 하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21.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를 소개하는 요한 복음의 한 대목은 특별히 감동적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의 어머니로 나타나신다.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요한 2,1-2). 성서를 보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초대를 받은 것은 마리아가 혼인 잔치에 계셨기 때문인 듯하다. 즉 아들은 그의 어머니 때문에 초대를 받으신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이 초대로 인해 일어난 사건을 잘 알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정"―물이 포도주로 변한 표징―은 복음사가로 하여금 예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요한 2,11) 하고 말하게 한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서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계시며 당신 아들의 메시아적 권능을 드러내주는 "첫 번째 표징"에 의미 깊은 방법으로 역할을 하신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여인이여,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3-4). 요한 복음에서 "때"는 아들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로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이다(요한 7,30; 8,20; 12,23.27; 13,1; 17,1; 19,27 참조). 당신 어머니께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일종의 거절같이 들림에도 불구하고(특히 질문 자체보다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퉁명스러운 표현을 생각한다면),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큰 항아리들을 물로 가득 채우라고 명하시고 물은 이미 잔치 손님들에게 대접되었던 포도주보다 훨씬 맛 좋은 포도주가 된다.

예수와 그의 어머니 간에는 얼마나 깊은 이해가 현존하고 있었는가?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친밀한 영적 일치를 탐구해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사건 자체가 이를 증명해 준다. 이 사건이 이미 마리아의 모성의 새로운 차원, 새로운 의미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마리아의 모성은 공관복음서들이 전해 주는 예수의 말씀과 여러 에피소드들(루가 11,27-28과 루가 8,19-21; 마태 12,46-50; 마르 3,31-35)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관복음의 대목들에서 예수께서는 무엇보다 출산으로 인해 이루어진 모성과 이 "모성"("형제 관계"도 마찬가지로)이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자부적 구원 계획 안에서 지녀야 할 모습을 대비시키신다. 반면에 요한 복음의 대목에서 가나의 사건에 대한 묘사는 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에 의한 새로운 모성, 즉 인간들과 함께 하는 마리아의 연대성, 인간들의 다양한 원의와 필요에 도움을 주시는 마리아를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는 외면적으로 사소하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인간적 어려움의 단 한 가지 구체적인 면("포도주가 떨어졌다")만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이 인간적 어려움을 도와준다는 것은 동시에 이 어려움을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과 구원 능력의 영역 안에 이끌어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에 중재가 등장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당신 아들과, 요구와 어려움과 고통의 현실에 부딪혀 있는 인간들 사이에 서 계신다. 마리아는 "가운데" 계신다. 이 말은 곧 그분이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위치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함을 의미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중재자로서 당신 아들에게 인간들의 어려움을 알려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계시며 실제로 그렇게 할 "권리를 가지셨다." 따라서 마리아의 중재는 전구와 마찬가지이다. 마리아는 인간들을 위해 "전구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또한 당신 아들의 메시아적 능력이 밝히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이 구원의 능력은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여러 형태로 그 사람의 생활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악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유명한 대목의 내용대로이다. 이 대목을 예수께서는 나자렛의 고향 사람들 앞에서 인용하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루가 4,18 참조).

마리아의 어머니 역할 중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하인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당신 아들의 뜻을 대변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어 메시아의 구원 능력이 드러나기 위해 수행되어야 할 일들을 지시하신다. 예수께서는 가나에서 마리아의 전구와 하인들의 순종에 의해 "당신의 때"를 시작하신다. 가나에서 마리아는 예수를 믿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마리아의 믿음은 예수의 첫 "표징"을 불러일으키며 제자들의 믿음이 타오르도록 도와준다.

22.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요한 복음의 대목에서 마리아의 자모적 보살핌에 관한 진리가 처음으로 드러났음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도 표현되어 있다. 어떻게 공의회가 그리스도의 중재와 관련하여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을 설명하는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들에게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이 유일한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는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1디모 2,5)의 넘치는 공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에 근거를 두고 거기 속하며 거기서 전적으로 힘을 얻는 것이다.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아의 중재에 대한 일종의 첫 알림을 제공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중재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계시하려는 데 있다.

요한 복음서의 대목에서 볼 때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중재임이 분명하다. 공의회가 선언하는 대로 마리아는 "은총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 은총의 질서 안에서의 모성은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섭리 계획에 의해서 구세주를 기르신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각별히 친절한 주님의 동반자요 겸손한 종이 되셨으며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구세주의 구속 사업을 도와드리셨다." 그리고 "이 은총의 질서 속의 마리아의 모성은…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23. 요한이 들려주는 가나 사건의 묘사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활동 초기에 드러난 마리아의 자상한 모성을 소개해 주는 한편, 같은 복음서의 또다른 대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희생으로 그의 빠스카 신비가 완성되던, 절정에 다다른 은총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이 모성을 확인해 준다. 요한의 묘사는 간결하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다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여인이요,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참조).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는 여기서,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슬픔 속에 남겨두고 떠나려는, 당신 어머니께 대한 아들로서의 특별한 배려의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유언"은 이 배려의 의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예수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진리와 현실을 장엄하게 확인하시고 이 관계를 강조하신다. 인간들에 대한 마리아의 모성이 이미 앞에서 윤곽이 잡혀져 있다면 그 모성은 이제 여기서 명확하게 표현되고 확정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구세주의 빠스카 신비의 결정적인 성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개인과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이 신비의 한가운데에 서 계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개인 모두와 전인류에게 어머니로 주어지신 것이다.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다. 그러나 요한 혼자만이 아니다. 전통을 따라 공의회는 서슴없이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요 인류의 어머니"라 부른다. 그것은 마리아께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아담의 혈통에 결합되어 계실뿐더러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며 사랑으로써 교회 안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신도들이 태어나도록 협력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해 태어난 이 "마리아의 새로운 모성"은 당신 아들의 구원하시는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십자가 밑에서 결정적인 완성에 이르게 된 "새로운 사랑의 열매"이다.

24. 따라서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으리라"(창세 3,15 참조)는 원초 복음에 담긴 약속이 성취되는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당신의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의 악을 송두리째 쳐 이기신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당신 어머니에게 말씀하실 때 "연인이여" 하고 부르시는 것은 의미있다. "여인이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가나에서도 예수께서는 당신 어머니를 그렇게 부르셨다(요한 2,4 참조). 이 표현으로 지금 여기 골고타 위에서 마리아의 신비의 핵심이 밝혀지며 마리아께서 구원 섭리 안에서 차지하시는 고유한 자리가 명백해진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공의회가 가르치는 대로 "시온의 훌륭한 딸인 이 여인이 나타날 때에 오래 기다리던 약속의 때가 차고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었으며, 그때에 천주 성자께서 이 여인에게서 혈육을 취하시고 당신 육신의 신비로써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를 낳으신 그분의 모성이, 요한으로 상징되고 대표되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새롭게" 계속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은총이 가득하신 분"은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들어가 그분의 어머니, 즉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가 되셨으며, 교회를 통하여 이 신비 안에서 처음에 창세기가 말하고(3,15) 구원사의 마지막에 묵시록이 말하는 "그 여인"으로 머물러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전통이 진술하는 대로 교회에 확장되어야 한다. 이 전통에 의하면 교회에 대해 마리아께서 지니시는 "모성"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 마리아께서 지니시는 모성의 반영이자 연장이다.

공의회에 의하면 교회가 탄생되고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에 이 마리아의 모성의 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언약하신 성신을 보내시기 전에는 인류 구원의 신비를 장엄하게 나타내시기를 원치 않으셨으므로 성신 강림 전에는 사도들이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과 함께 마음을 합하여 기도에만 힘썼고'(사도 1,14) 마리아도 이미 천사의 아룀을 받으실 때에 당신을 덮어 그느르신 그 성신의 은혜를 당신 기도로써 간구하신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설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은총의 구원 역사 안에서 말씀의 강생 순간과 교회의 탄생 순간간에 고유한 일치를 볼 수 있으며 이 두 순간을 연결시켜 주는 사람이 마리아이시다. 나자렛에서의 마리아와 예루살렘 다락방에서의 마리아, 두 경우에서 모두 조용하면서도 필수적인 마리아의 현존은 "성령에 의한 탄생"의 길을 가리켜 준다. 이렇게 어머니로서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현존하시는 마리아께서 아들의 뜻과 성령의 힘에 의해서 교회의 신비 안에 현존하시게 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리아는 십자가 상의 말씀이 보여주는 것처럼 계속해서 어머니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여인이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10-9-3] : 순례하는 교회의 한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어머니

[1. 지상의 모든 나라들 안에 현존하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25. "교회는 마치 외국 땅에 있는 순례자처럼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안에서 나그네 길을 계속하며 주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을 전한다"(1고린 11,26 참조). "사막을 여행하던 혈연의 이스라엘을 이미 하느님의 교회라고 불렀던 것처럼(2에스 13,1; 민수 20,4; 신명 23,1 이하 참조)… 새 이스라엘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른다(마태 16,18 참조).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당신 피로 획득하셨고(사도 20,28), 당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으며, 가시적이고 사회적인 일치의 수단을 이 교회에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세주이시며 일치와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아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하여 구원을 이룩하는 일치의 가시적 성사 역할을 하게 하시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막을 여행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 비유하면서 순례하는 교회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 여행은 외면적인 특성도 지니고 있다. 즉 역사적으로 진행되는 이 순례는 시간과 장소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지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므로 인류 역사 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시대와 민족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러나 교회의 순례가 지니는 본질적 특성은 내면적인 것, 즉 신앙에 의한 순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보이지 않는 위로자(요한 14,26; 15,26; 16,7 참조)로 교회에 주어진 성령 안에서의 순례이다. "유혹과 고통 사이를 걷고 있는 교회는 주께서 약속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함으로써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꺼질 줄 모르는 빛에 도달할 것이다."

바로 이 장소와 시간을 통한 교회의 여행 내지 순례 안에서 그리고 영혼들이 역사를 통하여 마리아는 "믿었기 때문에 복되신 분으로", 다른 어느 피조물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시면서 신앙의 순례를 앞서 가신 분으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공의회는 "과연 마리아는 구원의 역사 속에 깊이 참여하시므로 신앙의 최대 요소들을 어떤 의미로 자기 안에 종합하여 반영하시는 것이다"하고 언명한다. 모든 믿는 이들 가운데서 마리아는 "거울과 같은 분"으로 그분 안에서 가장 깊고 맑게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사도 2,11)이 반영되는 것이다.

26.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는 오순절에 다락방에 함께 모여 있던 신도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할"(사도 2,4) 때에 이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이 순간부터 신앙의 여정, 즉 개인과 백성들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여정의 시작 때 마리아께서 계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다락방에서 사도들 가운데서 "당신 기도로써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시는" 그분을 본다.

어느 의미로 마리아의 신앙 여정은 한층 더 길다. 성령께서는 이미 이전에 마리아 위에 내려오셨고, 마리아는 영보 때 "성령의 충실한 신부가 되어 참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셨으며",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에 자의로 찬동하며, "순종하는 믿음을 통하여"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 의탁하신 것이다. 이 순종하는 믿음으로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여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천사에게 대답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에서 기도하시던 마리아께서 걸으신 신앙의 여정은 거기 모인 다른 사람들의 신앙 여정보다 훨씬 더 길다. 마리아는 "그들을 앞서 가시며"그들을 "인도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성신 강림의 순간은 나자렛에서의 영보의 순간과 십자가에 의해 준비되었었다. 다락방에서 마리아의 여정은 교회의 신앙 여정과 만난다. 이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성령을 받은 후 "온 세상에"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 중 몇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에서 당신 전교 사업을 시작하실 때부터 점차적으로 "그분으로부터 불린"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 중 열한 명을 사도들로 만드시어 당신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사명을 그들에게 넘겨 주셨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하고 부활 후에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십 일 후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덧붙여 말씀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참조). 사도들의 전교 사명은 그들이 예루살렘의 다락방을 떠나는 그 순간에 시작되었다. 교회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하여 베드로와 사도들이 행한 증언을 통해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이다(사도 2,31-34; 3,15-18; 4,10-12; 5,30-32 참조). 마리아는 이 사도적 사명을 직접 받으신 것은 아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라"(마태 28,19 참조)는 명령과 함께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사도들이 진리의 성령께서 오심을 기다리며 이 사명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다락방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그들 가운데서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계셨다"(사도 1,13-14 참조). 신앙 안에서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던 그 사람들은 예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시며, 예수의 어머니로서 잉태와 출산의 순간부터 예수의 신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와 부활에서 밝히고 드러나고 확인된 그 신비의 유일한 증인이심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첫 순간부터 교회는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를 "보았듯이" 예수를 통하여 마리아를 "보았던" 것이다. 그때와 모든 시대의 교회에게 있어서 마리아는 당신이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셨던"(루가 2,19; 참조 : 루가 2,51) 나자렛에서의 예수의 유년기와 드러나지 않은 생활 기간의 유일한 증인이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때와 모든 시대의 교회 안에서 마리아는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셨고 여전히 복되신 분이시다. 그분은 첫 번째로 믿으신 분이시다. 영보와 잉태의 순간부터,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의 예수의 탄생 순간부터 마리아는 당신의 신앙 순례를 통하여 한걸음 한걸음 예수를 따라가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드러나지 않는 생활을 하실 동안에도 그를 따랐으며 예수께서는 생활을 하실 동안에도 그를 따랐으며 예수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행적과 가르침"(사도 1,1 참조)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집을 떠나신 다음에도 그를 따르셨다. 특히 골고타에서의 비참한 체험 동안에도 마리아는 예수를 따르셨다. 이제 교회가 탄생하려는 순간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마리아께서 사도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 영보의 말씀에서 탄생한 마리아의 믿음이 확증된다. 영보 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십시오. 이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골고타에서 일어난 근자의 사건은 이 약속에 어둠을 던져주었으나, 십자가 밑에서도 마리아의 믿음은 동요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아브라함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로마 4,18) 끝까지 믿으신 분이었다. 그러나 이 희망의 참 모습이 드러나고 "약속이 현실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부활 후부터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참조). 이렇게 당신의 부활로 자신을 죽음에 대한 승리자로, 천사가 말한 대로 "끝이 없는" 왕국을 소유하시는 분으로 드러내신 분께서 말씀하셨다.

27. 이 교회의 여명의 순간에, 예루살렘에서 성신 강림 때 시작한 신앙의 긴 여정 시초에 마리아께서는 "새 이스라엘"의 씨앗이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셨다. 마리아는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특별한 증인으로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마리아와 함께 열심히 기도하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신 말씀의 빛을 받아 마리아를 묵상하였으며, 언제나 그러해야만 했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강생의 최고 신비에 더욱 깊숙이 들어감에" 따라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깊은 존경과 효심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교회의 탄생 그날부터 교회의 신비에도 속하시는 것이다. 교회가 처음부터 지녔고, 지상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세세대대로 계속해 지녀야 할 모습의 바탕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을 발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과 인간간의 영원한 새 계약의 시작을 표시해 주는 것은 분명히 마리아의 믿음이다. 마리아의 이 영웅적인 믿음은 교회의 사도적 증언에 "앞서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시의 특별한 유산처럼 교회 안에 깊숙이 감추인 채 머물러 있다. 세세대대로 교회의 사도적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상속에 그리고 어느 의미로는 마리아의 믿음에 참여한다.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의 이 말은 성신 강림 때도 계속하여 동정녀에게 동반된다. 이 말은 대대로 교회의 사도적 증언과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에 대한 이해가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든지 마리아를 따라다닌다. 이리하여 마니피깟의 예언이 이루어진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루가 1,48-49 참조).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공경이라는 형태로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경은 언제나 마리아의 믿음에 대한 찬양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나자렛의 동정녀는 엘리사벳의 말대로 무엇보다 이 믿음을 통하여 복되신 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세대대로 지상의 서로 다른 민족들과 나라들 가운데서, 강생하신 말씀이시오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마리아를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어머니께 의지할 뿐 아

출처 : 38. 성모 마리아에 관한 주요 교도권 문헌(구세주 어머니)
글쓴이 : 봄처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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