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 셋째 날
듣고 믿는다
요한 20,11-18
한편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 하고 나서 뒤를 돌아다 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에 서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인 줄은 미처 몰랐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 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 서서 히브리말로 "라뽀니" 하고 불렀다. (이 말은 "선생님이여" 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 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 간다' 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 주셨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해설
믿음과 불신이 어찌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며, 사랑과 미움의 거리가 그렇게도 멀까? 희망은 절망에서 오직 한순간의 거리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으며, 기쁨은 눈물과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접촉하고 만나는 곳인 중간 지점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한마디의 말, 생명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 생명을 위한 권능을 풀어낼 무한한 잠재능력을 지닌 한마디의 말이다.
“마리아.”
불신에 싸이고 눈물에 젖은 여인에게 하신 한마디의 말, 그것은 그녀의 이름인 ‘마리아’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믿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분의 목소리에서 그녀는 예수를 알아보았다. 부활이 일어난 동산에서 있었던 이 만남은 의심할 나위없이 모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깨달음의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라뽀니.” 사랑이 깃든 마리아의 꾸밈없는 응답이 아침 공기를 가득 채운다.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슬퍼했던 바로 그 예수께서 그녀 앞에 서 계신 것이다. 용서하심으로써 고통을 낫게 하시어 그녀에게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주셨던 자비로운 예수께서 죽지 않으신 것이다. 그분의 사명을 위해 그녀의 충성을 요구하셨던 강한 힘을 가지신 예수께서 아직 살아계신 것이다.
그분은 “마리아”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 말에 그녀는 “라뽀니”하고 응답하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이 만남은 그분과의 엄청난 우정의 기쁨을 누릴 가능성을 마리아에게 열어주었다.
예수의 부활이 일어난 동산에서, 새로운 시대-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마리아에게 처음에는 참을 수 없는 체험이었을 예수의 죽음이, 이제 그 어느 것도 능가할 수 없는 생명력을 주는 체험이 되었다. 예수께서 영광에 싸여 마리아 앞에 서시자, 그녀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내면적 지식과 사랑의 권능과 에너지로 싸인 것이다.
에덴의 동산에서,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지식을 위해 움켜쥐려고 했다. 모든 야수 중에서 가장 간교한 뱀이 이렇게 약속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리라.” 인간은 그 대신에 어둠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에덴 동산 밖에서, 뱀의 유혹을 벗어나, 어둠-이 ‘죄의 복된 탓’(부활찬송)-밖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의 빛, 볼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진실되고 영광된 빛이 온 것이다.
모세가 사막에서 뱀을 들어올리자,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의 병이 나았다. 역설적으로, 뱀은 병을 낫게 하는 상징이 된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들어오려지셨다. 그분의 말씀을 보고 듣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온전히 다시 살아날 것이다.
에덴 동산의 혼돈과 죄악은 부활의 은총과 기쁨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아담과 이브는 완전한 지식을 움켜쥐려고 하였다. 마리아는, 부활이 있기 전 예수 안에서 보호와 위로를 찾기 위해 그분께 매달리려는 유혹을 받는다. 예수께서는 움켜쥐지도 매달리지도 않는 부드러움(애정)을 마리아에게 주셨다. 부드러움은 생명을 잉태하며 생명을 준다. 움켜쥐는 것과 매달리는 것은 인생의 에너지를 질식시키며 유산시킨다.
그러나 부활의 동산에서는-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성령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사랑의 눈과 귀로 그분께 응답하도록 이끄시며,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분께 매달리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펼쳐지는 하느님의 창조의복음을 전할 힘을 주게 될 것이다.
예수와 마리아 사이에 있었던 이 깨달음의 장면은 모든 삶 안에서 극적으로 일어난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분은 영광 속에서 우리 앞에 서 계시며,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즉 다른 사람들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권능으로 이끄신다.
우리의 이름이 불리우는 것을 듣고 우리가 신뢰 속에서 응답할 때, 깨달음과 화해가 함께 온다. 모든 것이 한 점으로 모이는 매 순간마다, 모든 창조-과거, 현재, 미래의-는 이 위로가 되는 단결에 의해 놓여난 변화의 에너지를 함께 나누며 그것에 의해 강화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시오”라는 메시지를 싣고, 고요한 알렐루야가 다시 울려퍼진다.
기도 안내 : 그리스도께서 내 이름을 부르신다.
+ 매일기도 양식: ‘매일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참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긴장을 풀고 조용히 자신을 가라앉힌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의존성을 분명히 한다.
+ 구하는 은총
부활하신 예수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 기도 방법: ‘여러가지 형태의 혼자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중에서 [관상] 참조.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을 때 그녀와 자리를 함께 한다. 이른 아침이란 것을 깨달으며 주위를 자세히 살펴본다. 떠오르는 해, 아침 기온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아침이 깨어나는 소리들, 대기의 내음, 날이 밝아짐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색깔들......
돌이 굴려나 있는 것에 주의하면서 무덤으로 다가가 벽이 거칠은지 매끈한지 만져본다.
마리아와 함께 몸을 구부리고 무덤 안을 들여다본다. 두 천사를 보며 그들의 이미지를 자세히 그려본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말을 걸며 그녀가 왜 우는지 물어보는 것이 들린다. 누군가가 그녀의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천사들에게 말하는 그녀의 절망적이고 슬픈 대답이 들린다.
우리 가운데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왜 울고 있소?”라고 마리아게 똑같은 질문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그분을 옮겨갔거든 어디다 모셨는지 알려주세요”라고 마리아가 말하자 그가 한마디, “마리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그분이 그녀가 사랑하는 예수임을 깨닫자 마리아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밝아지는 것이 보인다.
예수께서 나를 향해 몸을 돌리신다. 그분은 내가 나의 가슴 어느 구석에서 울고 있는지, 내가 그분의 부재를 체험하는 것이 어디에선지 내게 물으신다. 시간을 갖고 그분의 질문들을 심사숙고하면서, 그것들이 나의 내면 깊숙이 공명하도록 한다.
“ ” 하고 예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소리가 들린다. 그분의 말씀에 신뢰를 갖고 나 자신을 내어 맡긴다. 그분의 음색이 내 몸 전체를 통해서 민감하게 울려퍼지도록 한다.
그분의 목소리가 나의 존재 안으로 스며들자, 내 몸 속의 모든 빈 공간이 그분의 현존으로 가득 채워진다.
+ 마침기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다시 새로워진 현존으로 인한 기쁨 안에서, 그분의 기쁨이 주는 기쁨 안에서 휴식한다.
+ 기도 후 반성
기도 중에 떠오른 느낌과 깨달음들을 영적일기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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