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 둘째 날
사랑의 눈
요한 20,1-10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 떠나 무덤으로 향하였다. 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에 들어 가지는 않았다. 곧 뒤따라온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 가 그도 역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 가서 보고 믿었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제자는 숙소로 다시 돌아 갔다.
해설
사랑한다는 것은 보는 것이다. 사랑은 감수성이 굴절되는 프리즘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눈은 인생의 가장 심오한 현실을 본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관찰해도 두 가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각자가 자기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어둠이나 또는 밝음에 의해서 채색된 시각을 갖고 있다. 진실은 오직 사랑의 눈을 통해서만 빛나며 명료하게 된다.
사랑을 갖고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 사랑은 믿음의(belief) 중심에 있다. 믿음이란 단어는 원래 ‘사랑(love)’을 뜻하는 게르만어인 lief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믿는다는 것은 사랑에 의해 사는 것이다.
사랑이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이른 아침에 예수의 무덤으로 이끌었으며, 동트기 전의 어둠은 그녀 자신의 영혼이 지닌 어둠에 강렬하게 반사된다. 예수의 부재는 그녀의 내면에 살을 에이는 듯한 상실감과 당황감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오직 텅빈 무덤만을 본 것이다. 황망함과 두려움 속에서 그녀는 베드로와 또 한 사람의 제자에게로 달려가 그녀가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난 것을 알렸다.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두려움으로 달음질을 친 마리아의 반응은 예수를 사랑했던 제자들을 신속히 움직이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하여 간절한 심정으로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사랑의 에너지는 그들을 매우 서두르게 하였으며, 그들이 예상 밖의 것을 보게 되리란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그들은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수의를 보았다.
그와 같은 깨달음의 순간에 두 사람의 중요한 제자들이 함께 있었던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그들은 경쟁자들로서가 아니라 친구이자 동료 제자들로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대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후에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 알려지게 된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의 제자는 사랑이 우선함을 보여주었으며 이상적인 제자의 모범상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 사람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큰 사랑 때문에 그는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무덤의 어둠 속에서 더 깊은 뜻을 지닌 공허의 실체를 본 것도 그 제자의 두 눈이었던 것이다. 사랑이 지닌 감수성으로 그는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밝은 빛이 비추는 것과 같은 그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이 실현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믿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랑의 눈을 갖게 된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는 그가 알고, 사랑했고, 가르침을 받아왔던 분인 예수께서는 죽음으로 인해 그로부터 떠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험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예수께서는 영광을 입으시고 그에게 그 언제보다도 더 깊게 현존해 계시는 것을 본 것이다.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는, 사랑의 눈을 통해 땅 위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함께 계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말씀이 사랑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으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는 무덤 속에서, 믿음의 순간에,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된 것을 보았다. “나를 본 것은 곧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기도 안내 : 내면의 눈
+ 매일기도 양식: ‘매일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참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긴장을 풀고 조용히 자신을 가라앉힌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의존성을 분명히 한다.
+ 구하는 은총
부활하신 예수의 기쁨과, 아픔을 낫게 하시는 현존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은총과 그분의 기쁨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 기도 방법: ‘여러가지 형태의 혼자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중에서 [묵상] 참조.
상투적인 문구인, “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네가 얻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 의미를 오해하기 쉽다. “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네가 얻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무슨 일이든 첫 눈에 보았을 때와 항상 같지는 않다. 우리는 오직 내면의 눈, 사랑의 성령의 눈으로만 전체를 볼 수 있다. 때때로 우리의 시야는 좁다. 우리는 편파적이고 선별적인 안목을 가지고 오직 긍정적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보며, 나머지는 부정하거나 또는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는 더 깊은 실체를, 더 큰 잠재력을 놓치고 만다. 온전한 시야를 갖고 생활한 삶은 명확성과 사랑의 조화 속에서 균형잡힌 삶이다.
기대를 갖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확신을 지닌 채, 예수의 무덤이 지닌 공허 속으로 들어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나의 인생에서 겉으로는 긍정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던 상황이나 사건을 자세히 상기한다.
또한 겉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활력을 주는 상황이나 사건을 자세히 상기한다.
각각의 상황이나 사건이 지닌 더 깊은 의미의 현실을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예수의 무덤으로, 나 자신의 내면적인 어둠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내가 추구하는 은총을, 즉 사랑을 통해서 내가 겪었던 모든 체험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볼 수 있는 은총을 의도적으로 상기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가장 감탄하는 긍정적인 자질들을 영적일기에 적는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가장 불쾌해 하는 부정적인 성격들도 적는다.
예를 들어, 친절이나 애교같은 긍정적인 자질들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흐를 때 부정적으로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해 보고 적어 넣는다. 예를 들어, 심술궂음이나 거칠게 표현되는 사랑같은 부정적인 성격들 속에서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긍정적인 에너지의 힘을 생각해 보고 적어 넣는다.
성령의 현존 안에서 기도를 계속한다. 내가 적어 넣은 자질들과 성격들을 하나하나 곰곰이 생각해보고 내 자질들, 그리고 성격들과 동일시되는 것들에 표를 한다. 내 안에서 알아보는 것들을, 용기와 가차 없는 정직성을 갖고 내것으로 받아들인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나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내어 맡긴다. 그분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명확성과 사랑의 조화를 이루도록 어떻게 부르시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내게 방향을 제시해 주십사고 청한다.
사랑의 성령 안에서,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을 결정하고 그것을 영적일기에 적는다. 내 안에 있는 긍정적인 자질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나는......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성격들이 지닌 잠재적인 힘을 개발하기 위해서 나는......
+ 마침기도
나와 함께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내가 포기하고자 하는 것들을 직접 행동으로 보인다.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 기도 후 반성
내가 결정한 행동 과정을, 규칙적으로 다시 읽겠다는 의도를 갖고 영적일기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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