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3장 초기(初期) 천주교 지도자(指導者)와 신유박해(辛酉迫害)
섭정 ― 전국적 박해 ― 최창현(崔昌顯) 요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
이존창(李存昌) 곤자기 루도비꼬 등의 순교
1. 정조(正祖)의 승하(昇遐)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섭정(攝政)
①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승하(昇遐)는 온 나라의 불행(不幸)이었으니, 그를 잃음으로써, 지혜(智慧)롭고 온건(穩健)하고 백성을 사랑하던 王을 앓은 것이다.
더구나 남인(南人)과 천주교인(天主敎人)들에게는 청천벽력과(靑天霹靂)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적(敵)들의 분노(忿怒)를 견제할 수 있던 마지막 장벽(障壁)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그의 수기(手記)에서 당시 조선(朝鮮)의 각 정파(政派)들이 어떠한 처지(處地)에 있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기록(記錄)해 놓았다.
②『오래 전부터 양반들은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소북(小北)이라는 네 당파(黨派)로 갈라져 있었다. 그 중 주요한 두 당파는 노론(老論)과 남인(南人)이었다. 선왕(先王) 재위(在位) 말년(末年)에 이 당파들은 다시 두 편으로 갈라졌다.
王에게 진심으로 충성(忠誠)을 다하고, 그의 견해(見解)를 따라 그를 도울 태세를 갖춘 여러 당파(黨派)에 속하는 사람들을 시파(時派)라 부르고, 그와는 반대로 자기들 개인적(個人的)인 생각에 집착(執着)하여 언제나 반대(反對)할 용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벽파(辟派)라고 하였다.
③ 천주교인(天主敎人)의 가장 악착같은 원수(怨讐)들은 모두가 벽파(辟派)였다. 남인시파(南人時派)는 그 수가 매우 적었다. 이들 사이에 천주교(天主敎)가 처음으로 전파(傳播)되었고, 비록 목숨과 관직(官職)을 보존(保存)하기 위하여 복음(福音)을 버린 사람이 여럿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은 천주교인들을 근본적으로 적대시(敵對視)하지는 않았다.
남인(南人) 시파(時派)의 지도자(指導者)들은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 등이었고, 남인(南人) 벽파(辟派)는 홍의호(洪義浩), 목만중(睦萬中)을 지도자로 하고 있었다.』
④ 王은 수효가 많고 권력(權力)이 있고, 그 세력(勢力)이 날로 커지는 벽파(辟派)를 두려워하였다. 반대로 거의 모두가 큰 공(功)을 세운 사람들인 남인(南人) 시파(時派) 사람들을 우대(優待)하였다.
이가환(李家煥)은 나라의 첫째가는 학자(學者)였고, 정약용(丁若鏞)은 학자(學者)로서 또는 정치가(政治家)로서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王은 그를 특별히 사랑하여, 두 사람은 1795년 전에 자주 매우 높은 관직(官職)에 올랐다.
벽파(辟派) 사람들은 이 두 사람과 그 일파(一派)를 몹시 미워하였고, 이리하여 이미 본 바와 같이 천주교(天主敎)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그들을 멸망(滅亡)시켰고, 주문모(周文謨) 神父가 조선(朝鮮)에 들어 온 다음에는 그들을 수상한 자라고 하여, 조정(朝廷)에서 물리치는데 성공(成功)하였다. 남인(南人)들은 그때에 그들의 관직(官職)을 잃고 하급직(下級職)으로 쫓겨난 것이다. 그러나 王은 여전히 그들을 보호(保護)하고, 그들에 대한 비난(非難)을 모두 물리쳤다.
⑤ 그러나 이 임금이 승하(昇遐)하였을 때, 왕세자(王世子)가 너무 어려 직접 정사(政事)를 담당(擔當) 할 수 없으므로, 섭정(攝政)은 의당 그의 증조모(曾祖母)가 되는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에게 돌아갔다.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곧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하였다. 그동안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모든 친척(친척)은 노론(노론)과 벽파(벽파)에 속해 있었으므로, 선왕(先王) 치세시(治世時)에는 대부분 공직(公職)에서 쫓겨나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 손아귀에 들어온 절대권력(絶對權力)을 이용하여, 남인(南人)과 천주교(天主敎)를 동시에 멸망(滅亡)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치적(政治的) 종교적(宗敎的) 원한(怨恨)을 풀 준비를 하였다.
⑥ 그러나 풍파(風波)가 곧 일어나지는 않았다. 조선(朝鮮)의 법(法)에서는, 경의(敬意)와 미신(迷信)으로, 승하(僧下)한 왕의 장례식(葬禮式) 전에는 중요한 사건(事件)을 다루는 것을 금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국황제(中國皇帝)의 경우에는 승하(昇遐)로부터 장례식(葬禮式)까지의 기간(期間)이 7개월이었고, 그의 가신(家臣)격인 조선(朝鮮)의 王은 5개월이었으며, 높은 양반(兩班)들에 있어서는 3개월이었다.
그러므로 5개월 동안은 매일같이 승하(昇遐)한 王의 시신(屍身) 앞에서 여러가지 의식(儀式)을 행해야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모든 규칙(規則)에 따른 장례(葬禮)를 지내는데 필요한 어마어마한 준비(準備) 이외의 다른 일은 돌볼 수가 없었다.
⑦ 11월 하순, 장례식(葬禮式)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시파(時派)의 모든 고관(高官)들을 파직(罷職)하고, 그때까지 직(職)에 있던 모든 대신(大臣)들을 파면(罷免)시켰다. 이들은 이병모(李秉模), 감관주(金觀柱), 심환지(沈煥之)로 대치되었는데, 세 사람 다 노론(老論)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이동은 하나의 정변(政變)이었다. 왜냐하면 조선법(朝鮮法)에 의하면, 대신(大臣)은 이렇게 마음대로 급조(急造)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대신(大臣)의 직위(職位)는 종신직(終身職)인 바, 그들이 현직(現職)에 있지 않더라도 그 칭호(稱號)는 늘 가지고 있으며, 이 직(職)을 이미 맡은 경험(經驗)이 있는 사람들만이 王의 포고(布告)만으로 대신(大臣)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새 대신(大臣)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규칙(規則)과 길고 자세한 수속절차(手續節次)를 거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時間)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법(法)과 관습(慣習)을 조금도 상관치 않고, 자기 당파(黨派)에 충실(充實)한 앞잡이들을 즉시 가까이 두기 위하여, 이 모든 장애물(障碍物)을 건너뛰었다.
며칠 후에 어린 임금과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의 이름으로, 전국에 천주교(天主敎)를 금하고 그 신자(信者)들을 불법자(不法者)로 만들며, 모든 관리(官吏)들에게 그들을 체포(逮捕)하도록 명하고, 가차 없이 그들을 판결(判決)하라는 반종교적(反宗敎的)인 법령(法令)이 발표되었다.
서양(西洋)에서 인쇄된 옛 글에 의하면, 그때 한 대신(大臣)이 조정(朝廷)에서용감하게 모 천주교인(天主敎人)을 변호(辯護)하였는데, 그의 용감(勇敢)한 호교(護敎)의 갚음으로 순교(殉敎)의 월계관(月桂冠)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筆者)는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지금까지 이 사실(事實)의 흔적(痕跡)을 발견(發見)하지 못하였으며, 또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