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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3. 무수한 교우(敎友)들이 옥(獄)에 갇히고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3. 무수한 교우(敎友)들이 옥(獄)에 갇히고


① 박해(迫害)가 시작된 후, 처음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서민(庶民)이나 중인(中人)들만 체포(逮捕)해갔다. 새로 권력(權力)을 잡은 당파(黨派)가 자기들의 힘의 무게를 시험(試驗)하여 보는 과정(過程)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결정적(決定的) 타격(打擊)을 가할 만큼 힘이 강함을 깨닫고, 2월 9일에는 정2품(正二品)의 전 판서(判書) 이가환(李家煥), 4품관(四品官)의 정약용(丁若鏞)요한, 전 현감(縣監)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요직(要職)에 있었던 홍락민(洪樂敏) 루가 등에 대하여, 모든 필요한 형식(形式)을 갖춘 체포영장(逮捕令狀)을 발부(發付)하였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의금부(義禁府)로 끌려갔다.  同月 11일에는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와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도 체포(逮捕)되었다. 14일에는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아들 홍인(洪인) 레오와 함께 붙잡혔으나, 그의 아들은 가족(家族)이 살고 있던 포천읍(抱川邑)의 옥(獄)으로 보내졌다.


② 모든 처지(處地)와 모든 연령층(年齡層)의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을 탐색(探索)하여 옥(獄)에 가두었다. 여주(驪州)와 양근(楊根) 읍내에 갇혀있던 교우(敎友)들은 의금부에(義禁府)서 재판(裁判)하기위하여, 서울로 압송(押送)하기까지 하였다.  모든 동네에 포졸(捕卒)들의 왕래(往來)가 낮이나 밤이나 그치지를 않았다.

   의금부(義禁府)와 좌우(左右) 포도청(捕盜廳)과 형조(刑曹)의 옥(獄)은 모두가 초만원(超滿員)을 이루었으니, 그렇게 많은 체포(逮捕)로 시가지는 술렁거렸다.  모두가 공포(恐怖)에 사로잡혀 있었고, 특히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실의(失意)에 차 있었는데, 24일에는 포졸(捕卒)들이 이 나라의 모든 관습(慣習)을 깨뜨린 채, 양반(兩班)집 부인(婦人)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들어가 그의 종(從)들을 잡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공포(恐怖)는 극도(極度)에 달했다. 이 첫걸음을 일단 내디디자, 그날과 그 다음 여러 날에, 다른 많은 양반(兩班)집 부인(婦人)들도 옥(獄)에 갇혔다.


   앞에서 소개된 중요한 인물(人物)들의 대부분은 자주 역사(歷史)에서 언급(言及)되는데, 다른 사람들을 소개(紹介)하기위하여 여기에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③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는 이벽(李檗)이 이 나라에 천주교(天主敎)를 튼튼히 세우기 위하여 선택(選擇)한 권씨(權氏) 가문(家門)의 어른이요, 유명한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형(兄)이었다. 그가 얼마나 큰 지식(知識)과 덕행(德行)의 명망(名望)을 얻었는지는 이미 말한 바 있다(本稿 9쪽 참조).

    그가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그것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심성 있고 신중(愼重)하게 교리(敎理)의 여러 면을 깊이 연구(硏究)한 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일 결심(決心)을 하였다. 그러나 일단 결심(決心)을 하고 난 다음에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부모(父母)에게 대하여는 효도(孝道)의 본분(本分)을 다하고, 사회(社會)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의 너그러움과 헌신적(獻身的)인 행동(行動)으로 모든 이의 신임(信任)을 얻을 수 있어서,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하여 크나큰 존경(尊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의 권위(權威)로 많은 외교인(外敎人)이 복음(福音)으로 끌려왔다.

  ꡒ저 양반이 천주교를 참된 교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가 있겠는가?ꡓ

서로 이렇게들 말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는 직접적(直接的)인 전도(傳導)는 하지 않았고, 천주교(天主敎)의 일에도 결코 관여(關與)하지 않았다. 그는 늘 자기의 집에서 학문(學問)과 종교생활(宗敎生活)에 전심(傳心)하며, 통문(通文)과 공문(公文)으로 자기를 몹시 욕하는 것도 전혀 상관(相關)하지 않고, 王에게 그를 자주 깎아내리는 무함(誣陷)도 도무지 문제(問題)를 삼지 않았다.

     교우(敎友)들이 형벌(刑罰)에 못 이겨 배교(背敎)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ꡒ가련한 인간들, 참으로 애석도 하다. 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반생(半生)의 업적(業績)을 무익(無益)하게 만들고, 그들의 고통(苦痛)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관(榮冠)을 잃는 것이다.ꡓ

   하고 탄식(歎息)하며 말하곤 하였다.

 그 자신이 붙잡혀 재판관(裁判官)들 앞에 끌려 나가자, 그는 천주교(天主敎)와  그 실천(實踐)을 용감(勇敢)하게 변호(辯護)하였다. 형벌(刑罰)을 받는 중에도 그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너무도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직분상(職分上) 그의 신문(訊問)에 참관(參觀)해야만 했던 그의 가장 철저한 원수(怨讐)중의 한 사람이, 법정(法廷)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 지경이었다.

  ꡒ신문을 당할 때 다른 죄인들은 몹시도 당황하는데, 그 사람은  잔치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았소.ꡓ(그러나 이가환추안(李家煥推案)에는 상반되게 기록되어 있다)


④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와 같이 붙잡힌 동료(同僚) 중의 한 사람은,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가 있는 유명한 마재(馬峴) 정씨(丁氏)의 후손(後孫)이며, 정약용(丁若鏞)요한의 형(兄) 중 하나인,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였다.

  그는 성격이 곧고, 머리가 총명(聰明)하였으며 연구심(硏究心)이 강하여, 일찍부터 학문(學問)에 전념(專念)하여 문필(文筆)에서 성공(成功)을 거두었었다. 그는 점잖고 학식(學識)이 있는 인사(人事)들과 교제(交際)하기를 즐겨, 이가환(李家煥)과 같은 당시의 저명(著名)한 선비들의 친구가 되었었다.

     과거(科擧)를 위한 문학(文學)은 너무 무게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완전히 버렸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무런 방해(妨害)도 없이, 철학(哲學)과 윤리(倫理)의 연구에 몰두(沒頭)하기 위하여 미리부터 관직(官職)을 단념한 것이다.

     관직(官職)에 나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쉬웠을 것이나, 얼마동안 그는 추종자(追從者)들에게 알려주기로 약속(約束)한, 불사(不死)의 비법(秘法)을 얻기 위하여 노자(老子)의 도(道)를 연구(硏究)하였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이론(理論)도 알맹이가 없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또 의학(醫學)도 연구(硏究)하여 큰 명성(名聲)을 얻었다.


⑤ 천주교(天主敎)가 조선(朝鮮)에 전파(傳播)되자 그는 곧 그것을 배웠다. 그러나  즉시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이벽(李檗)이 참된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자주 뇌었고, 4~5년 뒤에야 비로소 은총(恩寵)의 권유(勸誘)에 순종(順從)하였다. 그런 후, 자기가 그렇게 주저한 것에서 아우구스띠노 성인(聖人)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영세(領洗)할 때에 이 성인(聖人)을 주보(主保)로 삼기를 원하였다.

  교우(敎友)가 되자 그는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떤 찬사(讚辭)도 미칠 수 없는 열심(熱心)과 항구심(恒久心)으로, 천주교(天主敎)를 봉행(奉行)하였다. 그는 자기 가족(家族)이 박해(迫害)를 당하는데도 동요(動搖)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天主敎)를 봉행(奉行)하는 것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헐뜯고 자식들에게 엄금(嚴禁)하였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효성(孝誠)있고 헌신적(獻身的)인 아들노릇은 계속하면서도, 모든 종교본분(宗敎本分)에 충실(充實)하였고, 아버지의 모든 학대(虐待)를 변치 않는 인내심(忍耐心)으로 참아 받았다.

  그는 결혼(結婚)하였으나 정철상(丁哲祥) 가롤로라는 아들 하나만을 남겨놓고 아내가 일찍 죽었는데, 그 아들에게 교우(敎友)의 모든 본분(本分)을 정성껏 가르쳤다. 집안 식구들의 간청(懇請)에 못 이겨 얼마 후에 재취(再娶)를 하였으나, 자기 아내와 금욕(禁慾)을 하며 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우(敎友)들이 그것을 말려 여러 아이를 두었었는데, 그들에 대하여는 나중에 언급하게 될 것이다

 

⑥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와 절친했던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세속사정(世俗事情)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특히 철학(哲學)과 종교연구(宗敎硏究)를 즐겨 하였다. 교리(敎理)의 어떤 점이 분명(分明)치 않게 생각될 때에는 그것을 연구(硏究)하느라고 침식(寢食)을 잊었었고, 그것을 밝혀내기까지는 휴식(休息)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깊은 묵상(黙想)을 그치지 않았다. 무식(無識)한 사람들을 만나면 온갖 정성(精誠)을 들여 그들을 가르쳤으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 일을 게을리 하고 귀찮아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둔(愚鈍)하더라도 그들에게 자기의 말을 이해(理解)시키는 데 신기(神奇)할 만큼 능숙(能熟)하였다.

   그는 조선말로『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책(冊) 두 권을 저술(著述)하였는데, 거기에는 그가 천주교서적(天主敎書籍)에서 본 것을 모아놓고, 거기에 자기의 생각을 덧붙였으며, 무엇보다도 명쾌(明快)하게 설명(說明)을 하는데 힘썼다. 이 책은 이 나라의 교우(敎友)들에게 아주 귀중(貴重)한 책이며 신부(神父)도 그것을 인정(認定)하였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가 교우(敎友)들을 만나면 관례적(慣例的)인 첫 인사를 나눈 후, 곧 교리(敎理)이야기를 시작하여 온종일을 계속하였으므로, 교리(敎理)이외의 다른 무용(無用)한 이야기는 나눌 수가 없었다.

   그가 통달(通達)하지 못하였던 어떤 어려운 점을 누가 풀어주면, 그는 기쁨이 넘쳐흘러 그 대화자(對話者)에게 뜨겁게 감사(感謝)하였다. 냉담자(冷淡者)나 우둔(愚鈍)한 사람이 구원(救援)의 진리(眞理)를 기꺼이 듣지 않으면, 그는 근심과 걱정을 억제(抑制)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별별 문제를 다 질문(質問)하였는데, 그의 머리의 기막힌 정확성(正確性)과 단순(單純)하고 명료(明瞭)한 그의 말솜씨 덕택으로, 그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信仰)을 굳게 하고 애덕(愛德)을 더하게 하였다. 그의 덕(德)이 총회장(總會長) 최창현(崔昌顯) 요한보다 덜할지도 모르고, 그의 명성(名聲)도 최창현(崔昌顯) 요한의 그것보다 덜 빛날지는 모르나, 자질(資質)과 지식(知識)으로는 그보다 더 우수(優秀)하였다.」


⑦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 방금 인용한 책 외에도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김건순(金健淳) 요사팟과 협력(協力)하여, 천주교(天主敎)의 모든 진리(眞리)를 순서(順序) 있고 체계(體系) 있게 설명하는 성교전서(聖敎全書)라는 책의 저술(著述)에 종사하였다. 그들이 그 책을 겨우 반 밖에 쓰지 못하였을 때, 갑자기 박해(迫害)가 일어났다.

   이 나라 사람들이 지은 이런 종류(種類)의 책은 분명히 이 나라의 백성(百姓)들에게 훨씬 더 쉽게 이해(理解)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不幸)히도 그 책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⑧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매우 자주 연락(連絡)을 하였고, 자기의 집에도 여러 번 맞아들였으며, 周文謨(주문모) 신부에 의하여 명도회(明道會) 회장(會長)으로 임명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체포(逮捕)되기 직전에 역관계층(譯官階層)의 교우(敎友)인 친구 하나가 그를 보러 왔다가, 그의 옷 위에서 무수한 작은 십자가(十字架)가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었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화제(話題)를 교묘하게 돌렸지만, 교우(敎友)들은 그것을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가 머지않아 받게 될 수난(受難)의 전조(前兆)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들의 예측(豫測)은 틀리지 않았다.


⑨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가 1월 11일 마재에서 서울로 말을 타고 오는 중에, 길에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한 사람을 만났다. 그를 이미 지나쳤었는데, 그 관리(官吏)가 자기를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기의 종(從)을 그에게 보내어 누구를 잡으러 가는가를 묻게 하고, 자기를 잡으러 가는 길이면 더 멀리 갈 필요(必要)가 없다고 덧붙였다.

  도사(都事)는 과연 그를 잡으러 가는 길이었고,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그 자리에서 붙잡혀 곧장 옥(獄)으로 끌려갔다.

  신문(訊問)을 받는 동안 그는 점잖게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하고, 관리(官吏)들 앞에서 천주교(天主敎)의 진리(眞理)를 설명(說明)하며,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천주(天主)를 배반(背反)하는 일에 결코 동의(同議)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1월 19일 압수(押收)된 성물상자(聖物箱子)에 대하여, 그는 그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자백(自白)하였으나, 그 속에 들어있던 편지(便紙)에 대하여 질문(質問)을 받자 침묵(沈黙)을 지켰다. 관리(官吏)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으 므로, 꾀를 내어 그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의 가족(家族)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다.

  ꡒ너희 아버지가 신부의 이름과 거처를 대기만 원한다면 그를 죽일 이유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아버지는 입을 열기보다는 차라리 혹독한 형벌을 당하여 죽기를 원한다. 너희들 가족 자녀들은 잘 생각해보고, 너희들의 가장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도록 하라!ꡓ

   그러자 가족(家族)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⑩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다른 교우(敎友)들처럼 법(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불경(不敬)과 모반(謀叛)의 두 가지 죄(罪)를 더 지었다고 기소(起訴)되었다.

    그는 천주교(天主敎)를 변호(辯護)하는 도중에, 그는 천주교를 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主張)하였다. 그것은 王 자신을 부당(不當)하다고 비난(非難)하는 것이었으니, 王의 이름으로 천주교(天主敎)를 금했던 것이었으니, 그러한 주장(主張)은 불경죄(不敬罪)를 범한 죄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그의 책에서 세상(世上)과 육신(肉身)과 마귀(魔鬼)를, 신자(信者)들이 끊임없이 대항(對抗)하여 싸워야 하는 삼구(三仇)라고 말하였었는데, 여기에서 세상(世上)이라는 표현(表現)은 王의 정부(政府)를 가리킬 수밖에 없으므로, 반역(反逆)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재판소(裁判所)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해석(解釋)을 인정(認定)하고 채택(採擇)하였는바, 그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조선(朝鮮)에서도 천주교(天主敎)를 반대하는 어떤 말이나 이의(異議)도,  그것이 어리석고 싱겁고 바보스러울수록 믿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筆者)는 그 시기의 한 관리(官吏)가 지은 천주교반박론(天主敎反駁論)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ꡒ이 교는 부모가 낳아 준 육신을 미워하라고 명령하니 바로 부모를 미워하라고 명령하는 것이고, 왕이 다스리는 세상을 원수라고 고발하니 왕을 원수로 취급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며. 끝으로 동정이 결혼보다 더 완전하다고 가르치니 인류를 멸하려고 하는 것이다ꡓ

    이 문구(文句)는 진지(眞摯)하게 씌어졌으며, 오늘까지도 대부분의 외교인(外敎人)들이 그것을 복음(福音)의 완전한 요약(要約)으로 생각하고 있다.


⑪ 옥에 갇힌 또 한 사람은, 천주교인(天主敎人)들 사이에서는 남양(南陽) 홍씨(洪氏)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이다. 그 역시 오래 전부터 중요(重要)한 직책(職責)을 맡아온 남인(南人)의 양반(兩班)집 자손(子孫)이었다.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일찍부터 공부를 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었고, 그의 점잖고 사려(思慮) 깊은 성격(性格)과 여러 분야에 대한 풍부(豊富)한 지식(知識)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尊敬)을 받았었다.

   얼마동안 서울에서 머무른 다음, 서울에서 80리~백리쯤 되는 포천현(抱川懸)에 가서 살다가, 거기에서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믿음을 들었는데, 아마 그와 사돈지간인 양근(楊根) 권씨(權氏) 집안을 통하여 들었던 것 같다.

   그는 천주교(天主敎)를 곧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아들 레오로부터 설명을 들은 다음 권고(勸告)를 받아들여, 그 진리(眞理)를 알아본 후부터 열심히 실천(實踐)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성세(聖洗)를 받았다.

   비록 훌륭한 지위(地位)에 있었으나, 그는 이때부터 인간(人間)의 영광(榮光)에는 관심(關心)이 없게 되었고, 그의 수많은 외교인(外敎人) 친구들과 교제(交際)를 끊었는데, 그런 행동(行動)으로 받게 될 비난(非難)에 대헤서는 개의(介意)치 않았다.

   자기 본분(本分)과 가족(家族)들을 가르치는데 전심(全心)하였고, 냉담자(冷淡者)들을 회개(悔改)시키고 천주교(天主敎)를 전파(傳播)하는데 힘썼으며, 그의 말을 들으려고 그의 집에 모인 그 지방 교우(敎友)들을 권면(勸勉)하느라고, 여러 밤 동안 오랜 시간을 지내는 일도 자주 있었다.

   박해령(迫害令)이 내렸을 때,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며칠 동안 숨어 있다가, 적(敵)들을 오랫동안 피할 수 없음을 알고서,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기로 결심(決心)하였다. 바로 돌아오는 길에서 포졸(捕卒)들을 만나 그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押送)되었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3. 무수한 교우(敎友)들이 옥(獄)에 갇히고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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