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3. 이경도(李景陶) 가롤로의 동료(同僚) 8명의 순교자(殉敎者)들
1) 회장 손경윤(孫敬允)
이경도(李景陶) 가롤로의 동료(同僚) 중의 하나인 손경윤(孫敬允)이라는 회장은, 서울의 양가(養家)에서 태어나, 신부(神父)가 입국(入國)하기 전에 천주교에 들어왔었다. 그 후 회장(會長)이 되어 자기 직분(職分)을 매우부지런하고 열성(熱性)있게 수행(遂行)하였다.
그는 굉장히 큰 집을 사서,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며, 많은 외교인(外敎人)들에게 술을 팔았다. 이렇게 요란스러운 외면(外面)으로 효과(效果)있게 보호(保護)를 받아, 안채에 많은 교우(敎友)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가르치고 격려(激勵)하였다.
박해(迫害)가 시작되자 이내 밀고(密告)되어 처음에는 도망을 하였다. 그러나 온 집안 식구가 자기 대신 잡혀갔으므로, 그들을 석방(釋放)시키기 위하여 자수(自首)해야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무서운 형벌(刑罰)을 당해야 했으나, 은총(恩寵)의 도우심으로, 모든 시련(試鍊)을 이기고, 42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관(榮冠)을 받았다 한다.
2) 증거자 김백심(金百心) 시몬
① 김백심(金百心) 시몬도 서울의 양가(養家) 출신으로 같은 용기(勇氣)와 같은 항구심(恒久心)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부(神父)가 거처하는 집에서 얼마동안 심부름을 하였는데, 이 다행한 기회(機會)를 타서 신앙(信仰)을 굳게 하고, 덕을 닦는 훈련(訓練)을 쌓을 수가 있었다.
1801년 봄부터 수사(搜査)의 대상이 되자 도망하여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아버지가 볼모로 붙잡혔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자수(自首)하여, 용감(勇敢)하게 예 수 그리스도를 증거(證據)하였다.
② 그를 석방(釋放)해 달라고 몰래 갖다 주는 돈을 받은 관장(官長)은, 그의 항구(恒久)한 마음을 흔들리게 할 생각으로, 사흘 말미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김백심(金百心) 시몬이 다시오자 관장(官長)은
그래 이제는 마음이 변했느냐?
하고 물었다. 증거자(證據者)는
예
하고 대답하였다.
좋다. 그럼 이제부터는 그 못된 도당(徒黨)을 따르지 않겠지?
하고 관장이 물으니, 김백심(金百心) 시몬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마음을 단단히 고쳤습니다. 그러나 전보다 더 천주교를 잘 신봉하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천주의 법률에 더욱
완전히 회두(回頭)하기로 마음을 고쳤습니다.
관장(官長)은 이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다. 그리고 김백심(金百心) 시몬은 어떠한 조그마한 양보(讓步)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를 않아, 위에서 본 순교자(殉敎者)들과 같이 사형(死刑)을 받고, 처형(處刑)되었다.
3) 증거자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8명의 순교자 중 네 번째는 안당(安堂)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였다. 그가 어디에서 났는지, 집안이 어떠했는지,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다만 얼마 동안 궁궐(宮闕) 옆에 있는 집에서 살며, 주문모(周文謨)신부와 자주 왕래(往來)하였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4) 순교자 최설애(崔雪愛)
이 분에대한 중요한 죄목(罪目)은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에게 상복(喪服)을 만들어 주어, 수사망(搜査網)을 빠져나가게 도와주었다는 것이었다.
이상 살펴본 5명과 함께 처형(處刑)된 나머지 세 동료(同僚)는 알려지지 않았다.
5) 또 다른 순교자(殉敎者)들
①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의 두 사위,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와 이현(李鉉) 야고보, 그리고 여러 가지 증거(證據)로 보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의 아내도 그가 순교한지 얼마 안 있 있어 처형(處刑)되었으나, 그 날짜는 알 수가 없다.
② 또 변득중(邊得中)과 염색업자(染色業者) 김(金)「경서」, 그리고 1839년에 순교한 박(朴)「명관」(厚載)의 아버지 박(朴)이라는 분 등, 세 교우(敎友)가 순교한 날짜도 확실(確實)치가 않다. 다만 그 무렵에 서울에서 형벌(刑罰)을 받았다는 것만 알 뿐이다
4. 지방(地方)에서의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마지막 순교자(殉敎者)들
이 해도 다 저물어 갈 무렵에 정부(政府)의 명에 의하여 지방(地方)에서도 몇몇 분의 처형(處刑)이 있었다.
1) 청주(淸州)의 순교자 김「사집」프란치스꼬
① 청주(청주)에서는 김(金)「사집」프란치스꼬의 순교를 들어야 하겠다. 김(金)「사집」프란치스꼬는 덕산(德山)고을 베방고지의 양가(養家)에서 태어나, 열심히 글을 배워 짧은 시일 안에 과거(科擧)에 응시하여 급제(及第)할만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천주교에 들어오자 인간(人間)의 학문(學問)은 집어치우고, 오직 종교(宗敎)의 학문에만 몰두(沒頭)하였다. 기도(祈禱)와 독서(讀書)가 그의 낙이었다.
타고난 슬기와 보기 드문 총명(聰明)을 가진데다가 모범적(模範的)인 행동을 겸하고 보니, 오래지 않아 이웃간에 큰 명성(名聲)과 권위(權威)를 떨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영향력(影響力)을 전교(傳敎)하는 데 이용하여,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무식한 자들에게 교리(敎理)를 설명하여 주니, 그가 말로 가르치는 것을 먼저 실천(實踐)하는 만큼, 그의 말은 그만큼 더 잘 받아들여졌다.
② 그는 즐겨 희사(喜捨)를 하였다. 새 옷을 장만하면 입던 옷을 곧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는 동네의 곤궁(困窮)한 이들을 자상하게 도와주며, 어떤 산모(産母)나 불쌍한 병자(病者)가 필요한 조그마한 위안(慰安)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그런 것들을 보내 주니, 불쌍한 사람들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아버지처럼 여기게 되었다.
자신의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도 그만 못지않아, 그들에게 대한 본분(本分)을 손톱만큼도 어긴 일이 없었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상중(喪中), 즉 2년 동안을 죽 철저하게 육식(肉食)을 삼갔다.
글씨를 잘 쓰는 그는 천주교서적(天主敎書籍)을 베겨, 책을 살 수 없는 교우(敎友)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책들을 거저 주었다.
③ 이와 같이 착한 행실(行實)이 가득한 생애(生涯)로 김(金)「사집」프란치스꼬는 하느님의 은총(恩寵)을 얻기에 힘썼다. 박해(박해)가 일어나자 그가 베낀 책이 많이 압수(押收)되었으므로, 맨 첫머리에 관헌(官憲)에게 통보되었다.
배반자 두 명이 그의 명성(名聲)에 끌린 것처럼 꾸미고 와서, 책을 몇 권 사겠다는 핑계로 그의 집을 살펴보고 간 뒤 얼마 안 있어, 포졸(捕卒)들을 데리고 그를 잡으러 왔다.
김(金)「사집」프란치스꼬는 우선 자기의 고향(故鄕)인 덕산(德山)으로 압송(押送)되었다. 관장은 그가 배교(背敎)할 의사만 있으면 이내 놓아주마고 약속하였으나, 그는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는 제가 어떻게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관장(官長)은 그에게 몇 가지 고문(拷問)을 시키고 나서, 포졸직(捕卒職)으로 강등(降等)시켜 옥으로 다시 보냈다. 얼마 후 다시 불려나온 김(金) 「사집」프란치스꼬 는 매를 맞으면서도 여전히 굴복(屈服)하지 않자, 이번에는 매질하는 천한 직책(職責)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자기 아이들에게 이런 편지(便紙)를 써 보냈다.
천주와 성모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도록 힘써라. 그리고 나를
다시 볼 생각일랑은 하지 마라.
이것을 보면 그의 결심이 되어있었고, 이미 마음속에는 희생(犧牲)이 이루어졌음을 알수가 있다.
④ 10월에 해미진영(海美鎭營)으로 이송되어 치도곤(治盜棍) 90대를 맞았다. 그러 나 형벌(刑罰)로도 그의 항구한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구해 12월에 도의 병영(兵營)이 있는 청주(淸州)로 이송(移送)되었다.
이 길이 그에게는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이 되었다. 몹시 추운 날씨에 무거운 칼을 쓴 채, 상처(傷處)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몸으로 180리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그의 백발(白髮)은 어깨위에 흐트러지고, 상처(傷處)에서는 피가 흘러내 려 옷을 적시고 그것이 살갗에 말라붙어서, 그가 한발 한발 떼어 놓을 때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심한 고통(苦痛)을 느끼데 되었다. 이 무서운 길이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그동안 김(金)「사집」프란치스꼬는 인종(忍從)과 마음의 평온(平穩)을 잠시도 잃지 않았다.
그는 이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12월 22일(1월 25일) 장터에 끌려나가 구경거리가 된 후, 곤장(棍杖) 81도를 맞은 후에 조용히 영혼(靈魂)을 하느님께 바쳤다. 목격한(目擊)한 증인(證人)들의 말을 들으면, 그의 신덕(信德)과 망덕(望德)과 애덕(愛德)이 끝까지 가장 열렬한 것 같았으며, 그의 마음은 철석(鐵石)같이 굳었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김(金)「사집」프란치스꼬와 함께 골룸바라는 여교우(女敎友)도 처형(處刑)되었는데, 덕산(德山) 고을 별암에 살던 이모(李某)라는 양반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生涯)와 죽음에 대하여는 믿을 만한 사항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2) 포천(抱川)고을의 홍인(洪인) 레오의 순교
① 김(金)「사집」프란치스꼬가 순교한 후, 5일 후 포천(抱川) 고을에서 홍인(洪인)레오가 순교하였다. 그는 아버지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와 함께, 2월 14일에 붙잡혀, 포천옥(抱川獄)으로 이송되었으나, 그동안 그의 아버지는 그대로 서울에 갇혀있었다.
성품(性品)이 온순하고 조용한 홍인(홍인) 레오는 이 고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장래(將來)에는 가문(家門)과 지위(地位)로 그 길이 열려진, 인간적 명예(名譽)를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성교(聖敎)를 알게 되자 곧 열심히 그것을 받아들였고, 하느님을 섬기고 그 교리(敎理)를 전하는 것밖에는 다른 야심(野心)을 일체 곧 잊어버렸다. 효성(孝誠)은 그에게 자기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라는 의무(義務)를 지워주었으니, 아버지는 천주교를 배웠으면서도 입교(入敎)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홍인(洪인) 레오는 아버지의 의심(疑心)을 풀어드리고, 주저하는 마음을 붙들어 일으켜, 마침내 신앙(信仰)을 굳게 해드릴 수가 있었다.
② 그런 다음 그의 열심은 다른 식구들에게로 향하여 그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냉담교우(冷淡敎友)들에게로 향하는 그들을 참을성 있고 힘차게 격력(激勵)하였으며, 외교인(外敎人)들에 향하여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入敎)시켰다.
특히 그의 겸손(謙遜)은 우러러 볼 만하였으니, 자신에 대해서는 가장 겸손한 말 밖에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장점(長點)과 재주와 착한 행실(行實)에 대해서는 돋보이게 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尊敬)과 사랑을 받았다.
③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다음에는 고향(故鄕)으로 이송(移送)되어 잦은 고문(拷問)을 당해야만 했다. 자신이 입교(入敎)시켰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원으로 그의 마음이 훌륭하게 지탱되었으며, 그의 용기(勇氣)를 보고 포졸(捕卒)들이 감탄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0개월 동안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갖은 고통(苦痛)과 시련(試鍊)을 당하였지만, 그의 신앙(信仰)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형판결(死刑判決)을 받을만하게 되었다. 포천(抱川)에서 12월 27일(1802년 1월 30일) 참수斬首)를 당하니,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그가 죽은 후 며칠 동안 시신(屍身)이 그저 살아있는 것만 같이 보였고, 그 둘레로는 밝은 빛이 둘러있었다. 포졸(捕卒)들과 많은 외교인(外敎人)의 무리가 이 이적(異蹟)을 목격하였다.
3) 양근(楊根) 고을의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의 순교
같은날, 이미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가 흐른 양근(楊根)에서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가 순교하니, 그는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둘째 아들이요,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의 양자(養子)로 들어가서 그의 대를 잇게 되어 있었다.
그의 가문(家門)과 재주와 좋은 자질(資質)로 인하여 그가 이미 얻었던 명망(名望)과, 천주교를 신봉(信奉)하는데 있어서의 그의 열성(熱性)은, 그의 추방(追放)의 원인(原因)이 되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므로 그는 체포(逮捕)되어 우선 양근(楊根)옥에 갇혔는데, 거기에서 어떻게나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당하였던지, 잠시 동안 마음이 흔들려 배교(背敎)한다는 말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서울 법정(法廷)으로 이송(移送)되어 와서는, 전에 한 말을 취소(取消)하고, 아낌없이 가해지는 고문(拷問)중에도 다시 천주교를 증거(證據)하였다. 한 10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처형되기 위하여 다시 양근(楊根)으로 이송되었다. 12월 27일(1월 30일)에 그의 머리는 칼 아래 떨어졌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4) 충주(忠州)의 4명의 증거자(證據者)들
※ 위에서 본 것처럼, 포천(抱川)과 양근(楊根) 고을에서 증거자(證據者)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證據)한 날과 같은 날, 전에 충청도 감영(忠淸道監營)이 있었던 큰 읍내 충주(忠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信仰)은 또 새로운 증거자(證據者)들을 갖게 되었다.
① 첫째는 이기연(李箕延)이라는 양반이었는데, 그는 그 전해가 끝날 무렵에 배교(背敎)를 한 후, 귀양을 갔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그는 더 용감(勇敢)하게 새로운 신문(訊問)을 당하였고, 이번에는 다행히도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그는 63세에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② 이기연(李箕延)이 입교시키고 교리를 가르쳐 주었던 다른 세 증거자(證據者)가 그와 함께 형장(刑場)으로 나아가니, 이부춘(李富春)과 이석중(李石中) 그리고 이아지연(李阿只連)이라는 여인(女人)이었다.
③ 그 읍내에서 아전(衙前)노릇을 하던 이부춘(李富春)은, 약간의 학식(學識)이 있고, 언변(言辯)이 매우 좋으며 인물(人物)이 잘 생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앙(信仰)에 매우 집착하고, 교회의 본분(本分)을 지키는 데 충실(忠實)하였다.
이석중(李石中)은 이부춘(李富春)의 아들로, 아버지와 같이 열심한 교우였다. 이석중(李石中)은 이 나라에서 양심상(良心上) 매우 위험(危險)한 직업인장사를 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혼(靈魂)의 이익(利益)을 위할 줄을 알아서, 없어질 재물(財物)을 모으기보다는 천국(天國)을 얻는 것에 더 마음을 썼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다른 시기에 체포(逮捕)되었으나, 형벌(刑罰) 중에 그들이 보여준 항구한 마음은 똑같았고, 하느님의 은총(恩寵)이 신자들 마음에 어떤 기적(奇蹟)을 행할 수 있는지를 아직 알지 못하는 외교인(外敎人)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들은 함께 참수(斬首)를 당하였는데, 아버지의 나이는 68세였고, 아들의 나이는 29세였다.
④ 아전(衙前)의 딸인 이아지연(李阿只連)은 같은 계층의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아들 둘을 낳은 후 남편(男便)을 잃었다. 비록 두 아들은 천주교를 신봉(信奉)하기를 거절하였지만, 과부교우(寡婦敎友)는 그래도 자기의 본분(本分)을 충실(充實)히 함으로써, 모범이 되었다.
어떤 조가마한 냉담(冷淡)도, 조그마한 게으름도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고귀한 항구심(恒久心)을 상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녀가 천주교인으로 붙잡혀, 무서운 혹형(酷刑)가운데서, 그녀의 평온平穩)과 용기(勇氣)로, 천주교의 영광(榮光)이 되기를 허락하셨다. 그녀는 위에서 소개한 다른 순교자(殉敎者)들과 함께 12월 27일(1월30일)에 참수(斬首)되었다
5)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에서의 두 순교자(殉敎者)
① 첫 째는 우덕운(禹德運)인데,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극히 명백(明白)한 그의 결안(結案)을 보면, 그는 매우 결기(決起)있는 사람으로서, 여러 차례 순교자(殉敎者)들을 장사지내는 일을 보살폈고, 또 배교자(背敎者)들에게는 그 비겁(卑怯)한 나약(懦弱)을 공공연하게 엄히 꾸짖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12월 28일(1월 31일)에 50세의 나이로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② 둘째는 한(韓)「덕원」토마스였다. 그는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고을 양반집에서 태어나, 광주(廣州) 지방으로 이사를 갔었다. 그는 근엄(謹嚴)하고 성실(誠實)하였으며, 기도(祈禱)와 독서(讀書)를 부지런히 하였다.
그는 교우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격려(激勵)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당시의 기록(記錄)을 보면, 그럴 경우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그가 가장 힘쓰는 것은, 무슨 일에 있어서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변함없이 꾸준히 행하였다.
1801년에 광주 포졸(廣州捕卒)들에게 붙잡혀 본관(本官) 앞에 불려나가니, 관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다른 교우(敎友)들 밀고(密告)케 하려 했다. 그는 교우(敎友)들의 이름을 한 사람도 대기를 거부(拒否)하고, 얼굴빛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거룩한 기쁨으로 고문(拷問)을 참아 받았다.
얼마 후에 다시 형벌(刑罰)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관장(官長)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대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겠다면 서슴지 않고 대겠습니다. 그러나 상
을 주기는 고사하고 그 사람들을 잡아다가 목을 졸라 숨이 막힐 지경을 만들
고, 잡혀오는 족족 목을 배실 것이니, 그 누구도 밀고할 수 없습니다.
그의 결안(結案)은 서울로 보내져, 왕의 이름으로 확정(確定)이 되었다. 그는 형장(刑場)으로 기꺼이 나아가서, 목을 괴는 나무토막을 손으로 붙들고 망나니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단칼에 목을 베어주오
하고 말하였다. 망나니는 겁이 나서 벌벌 떨며 헛 칼질을 하여 세 번에야 목이 떨어졌다. 때는 12월 30일(2월 2일)이었고, 한(韓)「덕원」토마스의 나이는 52세였다.
//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