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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신유박해의 종말 -7 - 5. 기록(記錄)에 실리지 못한 순교자들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5. 기록(記錄)에 실리지 못한 순교자들


※ 1801년의 이 소름끼치는 박해(迫害)이야기를 끝맺으면서, 처형장소(處刑場所)와 날짜를 찾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이야기에 기록(記錄)되지 않은 몇몇 다른 순교자(殉敎者)들의 이야기를 좀 더 하기로 하자. 그 이름들은 영원히 천국(天國)에서 영광스러울 것이니, 이 세상에서 완전한 망각(妄覺) 속에 버려둔다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일일 것이다.


1) 열심한 교우 배(裵) 마티아


①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힘과 모든 재력(財力)을, 공동(共同)의 이익을 위하여 바쳤고, 조선 천주교회에 중요한 봉사(奉事)를 하였다.

     그는 1799년에 순교한 배(裵) 프란치스꼬의 동생이었다. 입교(入敎)하는 날부터 배(裵) 마티아의 가장 큰 소원(所願)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부(神父) 들을 조선(朝鮮)에 잠입(潛入)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위험천만(危險千萬)한 북경왕래(北京往來)를 하겠다고 자원(自願)하여, 실제로 여러 번 그곳을 다녀왔으며, 그곳에서 성사(聖事)를 받았고, 또 십중팔구(十中八九) 주신부(周神父)를 입국시킨 교우들 중에 끼었을 것이다.


② 배(裵) 마티아는 그 강직(剛直)과 희생정신(犧牲精神)과 열심으로 인하여, 누구에게나 존경(尊敬)을 받게 되었고, 교우들은 그의 말을 기꺼이 따랐다. 박해(迫害)가 일어나자, 그는 숨어서 여전히 교형(敎兄)들을 권면(勸勉)하고, 순교자들의 용맹(勇猛)을 찬양하며, 그들의 고통(苦痛) 받은 이야기를 널리 알려, 본보기와 격려(激勵)가 되게 하였다.

     자기 자신도 싸울 준비(準備)를 하여, 생활의 고생스러움을 기쁘게 참아 받고, 모든 쾌락(快樂)을 끊어버리고, 아내와는 절대적(絶對的)인 금욕생활(禁慾生活)을 하며 살았다.


③ 배(裵) 마티아는 체포되어 형벌 주에 더 큰 용기(勇氣)를 보여주었다. 4, 5개월 동안 계속된 형벌(刑罰)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자, 관장(官長)은 보통의 수단(手段)으로 그를 꺾겠다는 희망을 버리고, 더욱 간사한 방법을 써봤다. 관장(官長)은 마티아의 가족(家族)과, 또 그와 같이 붙잡혔다가 신앙(信仰)을 배반(背反)한, 부당한 교우(敎友)몇 명을 이용하였다.

     당신 순교자(殉敎者)의 교만(驕慢)의 근원(根源)을 일체 없애버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배(裵) 마티아가 잠깐 동안 본성(本性)의 소리와 친구들의 집념에 굴복(屈服)하여 배교(背敎)의 말을 하게 허락(許諾)하셨다.

     그는 이내 석방(釋放)되었다. 그러나 그가 옥의 문턱을 넘어가기가 무섭게 신앙(信仰)과 은총(恩寵)이 다시 우세하여졌다. 그는 즉시 옥으로 돌아가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기가 방금 지은 죄를 탄식(歎息)하며, 큰소리로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불렀다.

  󰡒네가 미쳤느냐? 바로 조금 전에 그것을 모두 배반하였지 않았느냐?

     하고 관장(官長)이 소리를 지르자,

  󰡒예, 그런 말을 하다니 제가 미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른 정신이 돌아

    아와서, 비록 죽을지라도 우리천주께 대한 신앙을 소리 높여 증거합니다.󰡓

   하고 배(裵) 마티아가 대답하였다.

     그는 곧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옥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2) 보령(保寧)의 무명교우(無名敎友)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보령지벙(保寧地方)의 어떤 교우는 상본(像本)을 사려고 서울에 갔었다. 그러다가 붙잡혀 옥으로 끌려가서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오랫동안 옥에 갇혀 여러 차례 형벌(刑罰)을 받은 뒤에 뛰어나게 굳건한 마음을 계속하여 보여주었으므로 그는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포졸(捕卒)들이 와서 그에게 줄을 목에 직접 걸으라고 하자,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여 결국 포졸(捕卒)들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하느님의 허락(許諾)으로 옆 감방(監房)에 갇혀 있던 교우(敎友) 하나가 이 희생자와 형의 집행 형졸(刑卒)들 사이에 주고받는 이야기를 빠뜨림 없이 듣게 되었다. 이 교우가 옥에서 나와 이 교훈(敎訓)이 될 만한 사실(事實)을 그의 가족(家族)들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3) 경기감사(京畿監司)였던 이익운(李益運) 요한


     명호(明鎬)라 불리기도 하는 이익운(李益運) 요한도 위에서 본 무명순교자(無名殉敎者)와 같은 용기(勇氣)를 보여주었는데, 그의 죽음이 사람들의 눈에 혹 덜 영광(榮光)스럽게 보일지 모르나, 하느님 앞에서는 공로(功勞)가 덜하지 않을 것이다.

     남인 양반(南人兩班)의 자손인 이익운(李益運)은 1801년 박해(迫害) 전과, 박해(迫害) 동안에 경기감사(京畿監司)로 있었다. 천주교에 들어와, 그는 자기의 너무나 괄괄한 성질(性質)을 죽이고, 자기의 모든 행동(行動)을,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聖人)들의 모범(模範)에 따라 조절(調節)하기에 힘썼다.

     그는 끊임없이 식사(食事)에 극기(克己)를 하고, 세속적(世俗的)인 모임에는 발을 끊은 채, 외따로 떨어진 방에서 혼자 살았다. 주일(主日)이 되어야만 집을 나가 몇몇 교우들과 모여서, 그들과 함께 기도(祈禱)를 드리며, 성경(聖經)을 읽고, 거룩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행동(行動)으로 인하여 집안 전체에 미칠 위험(危險)을 생각하고 겁이 나서, 그로 하여금 신앙(信仰)을 배반(背反)케 하려고 별별 짓을 다하였으나, 아무런 성과(成果)도 없었다. 위험은 점점 더욱 급박(急迫)하게 다가왔고, 또 그 집안의 높은 지위(地位)로 보아 도망(逃亡)을 쳐서 그 위험(危險)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공포(恐怖)와 분노(忿怒)로 눈이 어두워져, 요한에게 독약(毒藥)을 마시라고 하였다. 요한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拒絶)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 이 아버지와 합세(合勢)하여, 그를 꼭 붙들어 놓고 억지로 독약(毒藥)을 마시게 하고야 말았다. 요한은 몇 시간 후에 세상을 떠났다.

 

4) 여주(驪州) 읍내의 과부교우(寡婦敎友)


     완산 이씨(完山李氏) 가문 출신의 젊은 과부(寡婦)로 열심한 교우가 있었는데,  친척(親戚) 한 사람과 함께 붙잡혀 처형(處刑)되었다.


5) 충청도(忠淸道) 벽정 고을의 최반(崔班)


     천주교인이 되기 위하여 애첩(愛妾)을 떼어버리고, 여러 해 동안을 모든 본분(本分)을 틀림없이 열심히 지켜, 모범(模範)을 보여준 후 참수(斬首)을 당하였다.


6) 덕산(德山)고을 태생 김 토마스


     주문모(周文謨)신부가 길을 다닐 때에 마부(馬夫)로 따라다니던 사람으로, 그도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7)덕산(德山)고을의 윤(尹) 바오로와 면천(면천)고을 올지구의 한(韓) 토마스


   다같이 홍주(洪州)읍내에서 순교(殉敎)하였다.


8) 공주의 원씨(元氏)


이 집안의 남자(男子) 한 명과 여자(女子) 한 명이 처형(處刑)되었다.


9) 전주감영(全州監營)에서의 순교자들


   정산(定山)고을의 한틔 태생으로, 전주(全州) 근처로 이사를 가서 살던 신「광서」는 전주감영(全州監營)에 잡혀가서, 이(李)「국」과 다른 증거자(證據者) 두 세 사람과 함께 참수(斬首)되었다.


6. 잊혀진 전설(傳說)


① 1801년 박해(迫害)의 희생자(犧牲者)들의 명단(名單)이 아무리 길다 하여도,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다. 박해(迫害)에 대하여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인 정약용(丁若鏞)은 순교자(殉敎者)의 수효를 적어도 2백 명(二百名)은 되리라고 본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말에 의하면, 10월 말에 서울에서만 3백 명(三百名)이 처형(處刑)되었다고 외교인(外敎人)들이 추산(推算)했다고 한다.

     이러한 대량 살육(大量殺戮)은 이 나라의 법정(法廷)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당시의 기록 원본(記錄原本)이 많이 없어졌다. 30년 뒤에 도착한 서양인 선교사(西洋人宣敎師)들은 조선에 들어와서, 순교자(殉敎者)들에 대한 옛 전설(傳說)을 수집(收集)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베르뇌(Berneux) 주교(主敎)가 교황대리 감목(敎皇代理監牧)이 되어, 처음으로 모든 정확한 문서(文書)를 모으기 시작했을 때에는, 순교(殉敎)를 목격(目擊)한 증인(證人)들이 많이 죽어, 무덤으로 추억(追憶)을 가지고 간 뒤라, 그것들을 영원(永遠)히 잃고 말았다.


②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天國)에서나 알려지고 찬양(讚揚)될 수밖에 없는, 많은 교훈적(敎訓的)인 사실(事實)과, 영웅적(英雄的)인 애덕(愛德)의 모범(模範)을 애석(哀惜)하게 여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섭섭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막연한  기억(記憶) 밖에 남아 있지 않는 수많은 기적(奇蹟)을, 이제는 법적(法的)으로 확인(確認)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는 그것이다. 

     이야기를 하여 내려오는 동안에도 필자(筆者)는 어느 정도 정확성(正確性)이  있는 것들만을 적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하여 내려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증거자(證據者)들을 영광(榮光)스럽게 하고 그들의 귀중(貴重)한 유해(遺骸)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 밖에도 많은 기적(奇蹟)을 행하셨다.

     한 가지 의심(疑心)할 수 없는 사실(事實)은, 그 시대에 일어난 이적(異蹟)이 실지로 또 자주 있었다는 것을, 오늘까지도 교우(敎友)들이나 외교인(外敎人)들이 한결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7. 배교자(背敎者)들의 최후(最後)


①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이나 외교인(外敎人)들은 또 몇몇 박해자(迫害者)들이 눈에 띄게 벌을 받은 것도 주목(注目)하였다. 천주교인들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怨讐)요, 언제든지 천주교인들을 반대(反對)하는 데 앞장서서 떠들었던 대신(大臣) 홍락안(洪樂安)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주도(濟州道)로 귀양을 가서 20 년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② 배교자(背敎者)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아우 이치훈(李致薰)도 천주교를 몹시 적대시(敵對視)하던 사람인데, 거제도(巨濟島)로 귀양을 가서 죽었다.


③ 양근 군수(楊根郡守) 정주성(鄭周誠)은 천주교인들을 살육(殺戮)하는 것을 잔인     (殘忍)하게 즐기던 사람인데, 실명(失明)을 하고 외아들을 잃고, 죽기 전에 집안     이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이 집안의 후손(後孫)들이 지금까지도 곤궁(困窮)한      가운데 충주(忠州) 고을에 살고 있는데, 외교인(外敎人)들 까지도 그들을 하늘의     저주(咀呪)를 받은 집안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몹시 싫어한다고 한다.


④ 이(李)「승화」베드로가 그의 수기(手記)에, 만인(萬人)이 다 아는 사실(事實)이라고 하며, 포졸(捕卒)들과 짜고서 교우들을 못살게 굴고, 밀고(密告)하고, 그들의 재산(財産)을 약탈(掠奪)하던 배교자(背敎者)의 이야기를 적었다.

     이 배교자(背敎者)는 나중에 어떤 조를 지어 귀양을 갔었는데, 실망(失望)한  나머지 목을 매어 죽었다. 그의 시체(屍體)는 사고로 불에 타서 매장(埋葬도 하지 못하였으며, 그의 가족(家族)은 제산(財産)을 모두 잃었고, 그 자손(子孫)들은 지금은 거지가 되었다.


⑤ 내포(內浦)지방에서는 조화진(趙和鎭)이라는 배반자(背反者)가 밀고(密告)하여 많은 교우(敎友)들을 죽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오만(傲慢)과 악의(惡意)와 속임수로  어떻게나 주민(住民)들을 분격(奮擊)하게 만들었던지, 이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러 산채로 태워죽이고 말았다. 그의 무모(父母)가 그의 시체(屍體)를 장사지내려고 거두러 와서, 밤 동안 주막(酒幕) 맞은편 개울가에 놓아두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暴雨)가 쏟아져 개울물이 넘쳐 시체(屍體)가 떠내려가 아무런 흔적(痕迹)도 찾을 길이 없었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장(埋葬)이 되지 못하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刑罰)로 생각하는 이 나라에서는 그것은 정말로 두려운 천벌(天罰)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실은 다른 여러 도(道)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 위에서 든 것만으로도 조선(朝鮮)이나 다른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당신의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敎會)의 원수(怨讐)들을 벌주신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기에 충분(充分)하다.



8. 맺는 말


① 정부(政府)의 명확한 명령에 따라 피비린내 나는 처형(處刑)은 신유년(辛酉年)으로 끝을 맺었다. 국왕(國王)의 윤음(윤音)이 설을 앞두고 전국 방방곡곡(坊坊곡 曲)에 나붙었고, 옥에서는 천주교인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니, 형리(刑吏)들은 얼마 동안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박해자(迫害者)들은 확실한 성공(成功)을 거둔 것 같았다. 그들의 정치적 원한(政治的怨恨)과 종교적 증오심(宗敎的憎惡心)이 모두 만족하게 풀렸으며, 그들이 기도(企圖)한 두 가지 전쟁(戰爭)이 마침내 2중(二重)의 승리(勝利)를 거두었다.


② 정치적(政治的)으로 말하면, 그들이 거둔 결과(結果)는 완전한 것이었다. 남인(南人)은 거의 전멸(全滅)되다시피 하여, 그때 받은 타격(打擊)에서 영영 소생(蘇生)할 수가 없었다.

     이 당파(黨派)는 겨우 숨길이 이어져 있을 뿐, 그 영향력(影響力)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노론(老論)은 정권(政權)을 계속 유지(維持)하였으며, 매일같이 세력(勢力)이 늘어나고 강하여져서, 이제는 그들의 만능(萬能)을 뺏으려 들 경쟁자(競爭者)가 없어지고 말았다.


③ 종교적(宗敎的)으로 보아서도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와 그 추종자(追從者)들은 역시 결정적(決定的)인 승리(勝利)를 거두었다고 확신(確信)하였다.

     조선에 있던 단 한 사람의 신부(神父)는 죽었고, 천주교인들의 지도자(指導者)들과 그들 중의 영향력(影響力)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없어졌던 것이다. 살아있는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은 곤궁(困窮)에 빠지고, 다른 주민(住民)들의 눈에는 치욕(恥辱)의 대상(對象)이 되고, 법의 보호(保護)를 받지 못하는 처지라, 지독히 집착(執着)하는 정권(政權)에 조그마한 위협(威脅)도 될 수가 없었으니,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敎會)가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면, 확실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④ 그러나 하님은 어떤 정부(政府)보다도 더 능하시고, 궂은일에서 좋은 결과(結果)를 끌어내신다. 그러므로 박해자(迫害者)들의 극성도, 천주교의 경우에는 그 원수(怨讐)들이 미리 내다보지 못한 결과(結果)를 낳는 것이었다.

     윤음(윤音)과 포고(布告)는 오히려 아무리 활발하고 열심한 전교(傳敎)로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만큼, 더 빠르고 더 보편적으로, 온 나라의 아주 궁벽(窮僻)한 구석에까지 복음(福音)을 알렸다.

     천주교인들이 있는 지방(地方)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순교자(殉敎者)들의 용기(勇氣)가, 또 다른 고을에서는 귀양 간 이들의 인내(忍耐)가, 우상숭배(偶像崇拜)와 물질생활(物質生活)에 빠져있던 이 나라 백성(百姓)에게 하나의 계시(啓示)가 되었다. 관공서(官公署) 문서에 여러 번 인증(引證)한 사실, 이것 자체(自體)가 웅변적(雄辯的)인 호교(護敎)가 된 것이다.


⑤ 끝으로, 박해(迫害)는 신앙(信仰)의 눈으로 보아서는 훨씬 더 귀중(貴重)한 결과(結果)를 낳았다. 천국(天國)에는 새로운 간선자(揀選者)가 많이 생겼고, 조선 천주교는 하느님 앞에 힘 있는 전구자(轉求者)의 무리를 보냈으니, 나중에 갖가지 장애(障碍)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宣敎師)들의 말이 구원(救援)의 열매를 맺은 것은, 순교자(殉敎者)들이 기구(祈求)하여준 덕택(德澤)이다.



   (이상 원서(原書) 제 3권<역서(역書)로는 상권(上卷) 끝)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신유박해의 종말 -7 - 5. 기록(記錄)에 실리지 못한 순교자들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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