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4 권 조선교회(朝鮮敎會)의 부흥운동(復興運動)
박해(迫害)가 끝날 때부터 조선교구(朝鮮敎區)를 설정할 때까지(1802~1831)
제 1 장
성직자(聖職者) 영입(迎入)의 청원(請願)
조선교회의 참상(慘狀)
조선신자들이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보낸 편지
조선신자들이 교황(敎皇)에게 보낸 편지- 새 순교자(殉敎者)들
1. 조선교회(朝鮮敎會)의 참상(慘狀) - 박해(迫害)는 멎었지만
① 신유년(辛酉年)의 마지막 날은 또다시 여러 천주교인의 처형(處刑)으로 붉게 물들었는데, 임술(壬戌, 1802)년이 되면서부터는 조선천주교회에 비교적 평온(平穩)한 시기가 시작되어,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이 약간 숨을 돌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평화(平和)도 아니요, 자유(自由)는 더구나 아니었다. 그러나 격심(激甚)하던 박해(迫害)가 다소 누그러졌고, 관원(官員)들과 망나니들은 한동안 행동을 중지(中止)하였다.
박해(迫害)를 치르고 난 바로 뒤의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가 얼마나 어수선하고, 비참(悲慘)하며 붕괴(崩壞)된 상태(狀態)에 있었는지를 이루 다 말하기는 실로 어렵다. 교형(敎兄)들을 지도(指導)하고, 권면(勸勉)하고, 격려(激勵)할만한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가 사형(死刑)을 당하였다.
명문거족(名門巨族) 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만 남아 있는 집안이 많았다. 천주교의 광적(狂的)인 원수(怨讐)들이 애써 잡으려 들지 않았던 가난한 자들과, 천민(賤民)들은 서로 연락(連絡)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적의(敵意)로 가득 찬 외교인(外敎人)들 틈에 끼어 살게 되니, 이 외교인(外敎人)들은 일반 여론(與論)에 큰 힘을 얻어, 신자(信者)들을 천만가지로 괴롭히고 그들을 종과 같이 다루었다.
② 입으로만 신앙(信仰)을 배반(背反)하고,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신앙을 보존(保存)하고 있던 수많은 배교자(背敎者)들은, 다시 신자의 본분(本分)을 지키기가 무서워서, 그저 몰래 몇 가지 기도(祈禱)나 그럭저럭 드리는 형편(形便)이었다.
성물(聖物)과 성경(聖經)은 거의 모두가 파괴(破壞)되었고, 조금 남아 있는 것 마저도, 땅속에 묻거나 담 구멍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아직 신덕(信德)이 굳지 못한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은, 어떤 교훈(敎訓)도 어떤 정신적 원조(援助)도 받지 못하게 되니, 실망(失望)한 나머지, 그들에게 그렇게도 많은 고통(苦痛)을 가져다 주는 천주교(天主敎)를 그만 버리고 마는 일이 많았다.
③ 관청(官廳)에서 귀양을 보낸 사람들이나, 자진하여 아주 멀고 궁벽(窮僻)한 지방으로 이사(移徙)해 간 사람들의 처지(處地)는 훨씬 더 비참(悲慘)한 것이었다.
이들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겪은 시련(試鍊)에 대하여 쓴 것을 소개(紹介)하는 것보다 더 적절(適切)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용감(勇敢)한 신자는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가까이하여, 성사(聖事)를 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성공하지 못하다가(상권 387~388쪽, 本稿 68~89쪽 참조), 이 뒤에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나중에는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받게 되었다.
이 글을 보면, 그 시절에 같은 경우에 처해 있던, 다른 수천 명의 신자(信者)들이 고생(苦生)하는 모습을 속속들이 알게 될 것이다.
※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기록한 글
『㉠ 박해(迫害)가 마침내 가라앉기는 했으나, 우리는 서로 뿔뿔이 헤어져 있었고, 모든 경문책(經文冊)을 잃었었다. 어떻게 신자(信者)의 본분(本分)을 지킬 방법이 있겠는가?
나는 우연히 몇몇 순교자(殉敎者) 집안의 유족(遺族)들이 용인(龍仁)지방에서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찾아내려고 갖은 노력(努力)을 다한 결과, 마침내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나이 먹은 여인(女人)들과, 겨우 아이 티가 가신 몇몇 소년들뿐이었는데, 모두 합하여 서로 친척간(親戚間)이 되는 세 집안이었다.
그들은 어떤 의지할 곳도, 어떤 재산(財産)도 없으며, 외부 사람들과는 감히 말을 건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천주교(天主敎) 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무서워서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그들은 경문책(經文冊) 몇 권과 복음성경해설서(福音聖經解說書)를 가지고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깊숙이 감추어 두었다. 내가 그 책을 보자고 청하니, 내 말을 가로막으며 가만히 있으라.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더 이상 간청하지 않았다.
㉡ 그러나 이 가엾은 여인들은교우 한 명이 와 있다는 말을 아이들에게서 듣자 몹시 기뻐하며, 예의상 나를 만나볼 수는 없으나, 적어도 나하고 이야기는 하고 싶어 하였다. 나는 최근(最近)에 생긴 일과, 교회(敎會)의 형편(形便)과, 또 천주를 섬길 수도 우리의 영혼(靈魂)을 구할 수도 없을, 우리의 공통된 처지(處地)에 대하여 약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여인들은 매우 감동(感動)하여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우리가 서로 힘이 되기 위하여 자주 연락을 했으면 좋겠다.
는 말을 하였다.
㉢ 나는 거기에서 40리 쯤 되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8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서로 찾아 다녔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한 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정이 들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성경(聖經)을 읽기 시작하였고, 주일(主日)과 축일(祝日)의 의무(義務)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들은 신부(神父)에게서 성사(聖事)를 받았었다. 그래서 신부(神父)의 권고(勸告)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니, 신부를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 속에는 기쁨과 행복이 번졌다. 그것은 마치 보물(寶物)을 발견 것이나 진배가 없었다.
나는 이 교우들을 천사(天使)처럼 사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양쪽이 모두 외교인(外敎人)들 가운 데 살고 있었고, 외교인들의 눈이 사방에서 우리를 끊임 없이 감시(監視)하고 있었다.
㉣ 이런 것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우리는 함께 이사(移徙)를 하여, 다른 곳에 가서 외딴 조그만 마을을 이루어 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겐 아들 하나와 딸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 다섯 집을 합치면 40여 명의 식구가 되었고, 각기 재산(財産)이라고는 빚 밖에 없었으므로, 집들을 팔아도 빚을 갚고 나면, 이사여행에 필요한 노비(路費)도 채 되지 못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곳은, 인적(人跡)이 드믄 강원도(江原道) 산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이 성사(成事)가 되든 말든 이사(移徙)는 하기로 결정(決定)이 되었다.
㉤ 우리들 중에서 두 집은 아무 것도 없어서 조석(朝夕) 끼니가 걱정일 지경이었다. 나머지 중 세집은 집과 세간을 팔아 겨우 백량(百兩, 약 2백 프랑)을 마련하였는데, 그 돈 중에서 많은 빚을 갚아야 했다.
떠나는 날짜를 정하려 할 때에, 다섯 집안이 저마다 먼저 가겠다고 하니, 그들은 이 지옥(地獄)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낙원(樂園)을 찾아가겠다는 일념(一念)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나 말다툼이 심했던지, 나중에는 서로 불화(不和)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참말이지 나는 그들이 알아듣도록 타이르기에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아들과 딸을 조카에게 맡기고, 다섯 집안 중에서 한 집안은 나중에 떠나오도록 결정(決定)을 지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빼고도 절대로 지체(遲滯)시킬 수 없는 여인(女人)이 5명이었는데, 이분들은 나이가 많거나 길 걷기를 버릇하지 않아서, 보행(步行)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나는 천신만고(千辛萬苦)끝에, 말 두필을 사고 나중에 한 필을 더 사고 나니, 우리들의 오죽잖은 밑천은 다 떨어지고 말았다. 돈이 한 푼도 없게 되어, 마을의 부자(富者)친구 두 사람을 찾아갔더니, 이들이 가마 다섯 채를 마련하여 주고, 말 두 필을 빌려주었다.
㉥ 이러 차림으로 우리는 길을 떠났다. 말들도 좋고 하인들도 제 직책(職責)을 잘 수행(遂行)하였다. 그러나 첫 날의 행보(行步)는 대단히 어려웠다. 우리의 차림은 매우 수상쩍었다. 그것은 양반(兩班)의 행차(行次)도 아니고, 평민(平民)의 행렬(行列)도 아니었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말들의 차림새가 괴상망측(怪常罔測)하였다.
일행은 둘째 날부터 다른 방법(方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가마 다섯 채를 버리고, 여인(女人)들은 치마를 장옷 모양으로 뒤집어쓰고 가야만 했다. 우리 행차(行次)의 차림새가 그럭저럭 그 지방의 보통 길손들, 아니 그보다도 산골 사람들의 차림새같이 되었다.
그런데도 행인(行人)들이나 주막(酒幕)의 주인들은 언제나 우리가 서울에서 온다고 말하였다. 어떤 자들은 입가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띠우며,
저건 틀림없는 천주학쟁이의 집안이다.
하는 말을 뇌이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正體)가 드러나서 붙잡히지나 않을까 늘 걱정이었다.
㉦ 8일 동안을 무척 고생스러운 길을 걸어서,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目的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새로운 곤란(困難)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 집이 있나, 아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오막살이를 하나 빌어 일행을 들게 하였는데, 말 다섯 필이 거추장스러워, 내 말을 이내 팔아 양식(糧食)을 장만하고, 겨우 다리를 뻗을만한 초가(草家)도 한 채 샀다.
우리는 빌려온 두 필의 말을 모두 돌려보내야 할 것이지만, 돈이 없어 그러지를 못하고, 1 개월 동안을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는데, 먹이가 거의 한 필 값이나 들어갔다. 그러나 마침내 그 말들을 돌려보낼 수가 있게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 뒤에 낙오(落伍)되었던 나머지 가족들도 데려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농사철은 지나가고 겨울이 닥쳐와, 길이란 길은 모두 눈에 파묻혀버렸다. 근처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없고, 이웃과도 내왕(來往)을 할 수가 없는지라, 40명 이상이나 되는 우리는 굶어죽을 지경에 놓여 있었다. 우리에게 남아있던 말 한 필은 굉장히 큰 나무구유를 갉아서 거의 다 먹어버렸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끊임없이 울고, 어른들조차도 불안(不安)하고 초조(焦燥)하게 되었다. 양식(糧食)이 거의 다 떨어져 오는 날, 하루하루가 암담(暗澹)한 미래를 약속하니, 우리는 원망(怨望)스러운 유혹(誘惑), 이렇게 무서운 고통(苦痛)의 원인(原因)이 된 우리의 신앙(信仰)을 증오(憎惡)하고, 천주를 왜 믿었나 하며, 우리 자신을 저주(咀呪)하는 유혹(誘惑)에 빠지곤 하였다.
㉧ 마침내 천주의 인자하신 이적(異蹟)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겨울이 지나고 눈이 녹자, 통행(通行)도 하고 산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약 70리 떨어진 곳에 최초시(最初試)라는 부자(富者)가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이틀을 묵으며, 우리 집안들이 당하는 곤궁(困窮)의 참상(慘狀)을 설명하여, 그의 주선으로 벼 열섬을 얻을 수가 있었 다. 운반비를 덜기 위하여, 그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벼를 찧어 달라고 청하니, 쾌히 승낙(勝諾)을 하였다. 그런 다음, 쌀을 일부분은 팔고, 나머지는 2, 3 일 동안에 운반(運搬)해 오게 하였다. 이 곡식(穀食)은 모두 정한 기한(期限)에 갚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이렇게 처리(處理)하고 나서, 우리 집안 식구들을 다시금 위로(慰 勞)하니, 그제야 내 말을 들었고, 기쁨과 우애(友愛)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가 여기저기에서 꾸어 쓴 돈이 벌써 백량(百兩)이 더 되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비칠 용기(勇氣)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신을 차리고 양식(糧食)을 아껴먹어야 한다는 말을 내가 하기만 했다가는, 모든 이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근심스러워지기 때문이었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