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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2. 착한 목자

[그리스도의 생애] - 22. 착한 목자


철학자나 과학자, 현인들은 흔히 각자의 학문체계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주님이나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모두 교사였기 때문에 각자의 교리에 관해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당신이 인간 교사들과 같은 수준에 놓이게 되는 것을 거부하셨다.
주님은 신적인 교사로서 유일하신 분이심을 주장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신적인 교사 이상인 분이셨다. 주님은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교사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기 위해 오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주님은 각자의 교리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주님은 당신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라고 하셨으며 양떼를 지키는 문지기나 수위라고 하셨다. 또한 당신은 양을 지키는 보조자나 목자라고 하셨으며, 결국에는 주님이 양으로서 희생물이 되셨다.
주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정식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양떼를 약탈하려는 자들에 비유하셨으며, 늑대가 달려들 때 도망쳐 버리는 고용인에 비유하셨고 마침내는 양을 잡아 먹는 늑대에 비유하셨다.

주님께서 태생 소경의 시력을 되찾아주신 후로 논쟁이 벌어졌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기적사건에 대해서 조사에 착수했다. 소경이 이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일이 기적일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그의 부모를 찾아갔다. 그의 부모는 그 아이가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증언하였다. 그들은 이미 결심을 굳힌터라 그 어떤 증거도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이렇게 작당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 내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요한 9, 22)

이렇게 해서 이 태생 소경은 회당에서 쫓겨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고백자 가운데 첫 번째가 되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소경을 발견하자 그리스도는 도저히 그런 기적을 행했을리가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역겨운 질문공세와 빤히 보이는 증거도 믿으려하지 않는데 화가 난 소경이었던 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반박했다.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 9, 33)

요셉이 소위 말하는 이집트의 현자들보다 훨씬 더 현명하게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였듯이, 거지가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훨씬 지혜롭게 기적을 이해하였다. 소경의 생각과 신앙의 발전단계는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발전단계와 같았다. 먼저 소경은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

그는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시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기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띄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9, 11)

나중에 계속해서 질문을 하자 그는 우물가의 여인처럼 답변했다.

그들이 눈멀었던 사람에게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니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묻자 그는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9, 17)

마침내 그는 주님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에 틀림없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단계가 마침내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에 도달한 자들이 흔히 밟는 발전단계이다. 치유받은 소경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를 회당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파문으로 인해 이 거지는 민족공동체의 외적인 특권을 박탈당하고 조롱거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잃어 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쉬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그가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나섰다. 직접 그를 만나 주님께서 물으셨다.

눈멀었던 사람이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9, 35)

그러자 거지가 대답했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대답하자 (요한 9, 36)

주께서는 우물가에 있는 여인에게 하셨듯이 답변하셨다.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9, 37)

그 때 소경이었던 그 사람은 주님 앞에 엎드려 흠숭을 드렸다. 그의 태도는 입술로만 고백하는 신앙이 아니라 육화한 진리를 경배하는 신앙이었다. 그의 논리적 사고는 너무도 단순하면서 극히 숭고하였다. 이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셨다면 그분의 증언은 진실임에 틀림없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기적을 철저히 조사했다. 증인들의 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부모와 본인은 위대한 기적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였다. 그것은 시력을 되찾게 한 눈의 기적이었으며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한 영혼의 기적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명백한 증거를 거부했으므로 주님은 그들을 눈먼 지도자들이라고 하셨으며, 또한 주님을 배척하였으므로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의 빛이신 당신의 빛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빛을 받지 않으면 그들의 눈먼 상태는 재앙이 되겠지만 지금은 죄다.

그들은 태생 소경에게 회당문을 닫아 버렸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그는 하느님과 나눌 수 있는 모든 친교를 박탈당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회당의 문은 닫혔을지라도 다른 문은 열려있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 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요한 10, 9)

주님께서는 문들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어느 문을 통해서 보다 숭고한 삶을 추구하든 상관없다고 하시지도 않았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나의 문이라고 하시지 않고 유일한 문이라고 하셨다. 방주에 문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 문을 통해 노아와 그 가족이 들어가 홍수를 피했다. 성막(聖幕)이나 지성소에도 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주님은 당신만이 하느님의 양우리에 들여보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이나 모범이 그 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 속에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홀로 뛰어나신 분이시며 당신의 동료나 모세와도 비교가 되지 않으시며 하물며 조로아스터나 공자, 마호멧이나 그밖에 어느 누구도 주님과 견줄 바 못된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 6)

주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들은 교사가 아니라 눈먼 지도자들이요 낯선 자들이요 고용인이라고 하신 후,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당신은 유일한 교사이실 뿐만 아니라 무한히 더 크신 분이시라고 하셨다. 주님은 사상이나 율법을 주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신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 10)

인간은 존재하고 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생물학적이거나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신적인 생명을 주신다. 자연은 이러한 보다 풍부한 삶을 제시해 줄뿐 주지는 못한다. 동물은 식물보다 더 풍부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인간은 동물보다 더 풍부한 삶을 누린다. 주님은 인간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생명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 식물이 산소가 없으면 식물의 풍부한 삶을 누릴 수 없듯이, 주님께서 하느님의 생명을 주러 내려오시지 않으면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어서 계속 주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 생명을 주심을 증거해 보여 주신다. 주님은 교사이실 뿐만 아니라 우선 구세주이시다. 주님은 당신이 오신 목적을 설명해주기 위해 구약성서를 인용하신다. 당신 백성을 노예산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느님을 묘사하는데 출애굽기는 다른 어떤 표현 보다도 목자의 표현을 많이 쓴다. 예언자들도 훌륭한 목장에서 양떼를 지키는 착한 목자와 그렇지 못한 거짓목자에 대해 자주 말한다.
이사야는 하느님을 당신 팔에 양을 안고 가시는 분으로 묘사했고 에제키엘은 잃어 버린 양을 찾는 목자에 비유하였다. 즈가리야는 메시아-목자가 죽임을 당하며 그 때 양이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가장 비참한 메시아의 모습을 제시한다. 양떼를 푸른 목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그리고 있는 시편 23장은 가장 유명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떤 대가를 치루고 이 푸른 목장을 구입하실지 알려 주신다. 주님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양떼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실 것이기 때문에 착한 목자이시다. 다시 한번 착한 목자의 상징아래 십자가가 보인다. 목자조상인 야곱과 목자왕인 다윗이 목자구세주로 넘어 가며, 막대기가 양치는 지팡이가 되며 이 지팡이는 왕권을 나타내는 홀(忽)이 되고 다시 이 홀은 십자가가 된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요한 10, 11.17-18)

주님의 죽음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전혀 뜻밖의 일도 아니며, 당신의 죽음과 영광을 분리하여 말씀하시지는 않고 목숨을 버리시되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신다. 보통 사람은 어느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이 당신에게 사명을 띄어 보내시어 지상에서 그것을 완수케 하셨음을 입증하셨다. 그러나 이 말은 물에 빠진 자기 아들을 살려 준 사람을 그 부모가 사랑하기 시작하듯이 아버지의 사랑이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은 이미 영원한 사랑의 영원한 대상이셨다. 그러나 이제는 인성을 통하여, 주님은 그 사랑에 대해 부차적인 이유를 제시하시며 돌아가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입증하신다. 주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죽음이 주님께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 당신 생명을 다시 취하는 것은 당신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하느님의 계획에 속하는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봉헌된 희생 양들은 대신 사람들의 죄를 뒤집어 썼지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제단으로 끌려가 말없이 희생당했다. 구약의 사제는 희생될 양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표시로 그 양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베풀어 주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죄를 짊어지셨다. 주님께서 당신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말씀하신 것은 양들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양들을 대신해서 목숨을 바치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당신의 어린 양들과 양떼를 돌보도록 세차례 명령을 하셨을 때 당신처럼 베드로도 당신 양떼를 위해 죽으리라고 예언하셨다.

아버지께서 주님을 사랑하시는데 그것은 단지 당신 목숨을 바치시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님께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다 우월한 세력의 희생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더라면 주님의 역할은 죽으심과 더불어 끝나 버리고 말았을 것이며 주님은 단순한 아름다운 추억거리로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이 보다 더 깊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당신 목숨을 다시 취하여 계속해서 왕권을 행사하시게 될 것이다. 목숨을 다시 취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다른 의미에서 계속 통치하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행동은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요한 10, 18)

이처럼 당신 목숨을 버리고 다시 취하신 것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주님께서 사람이 되실 때 천상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약속과 명령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이 멸하기를 바라시지 않고 오히려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승리하기를 바라셨다. 나중에 올리브 동산에서 고뇌에 빠지셨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유와 아버지의 명령이 뒤섞여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앞서, 청중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요한 6, 38)

이와같이 가르침을 통한 지도력이라는 주제에서 시작한 논쟁은 구원을 통한 생명의 증진이라는 주제로 끝난다. 태생소경에게 시력을 주는 기적은 주님께서 행하신 다른 모든 기적과 같이 인류를 위한 몸값으로 당신 생명을 내주는 일을 가리킨다. 주님의 생애의 매순간마다 십자가가 놓여 있으며, 주님의 가르침이 가치를 갖는 것은 십자가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주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것은 십자가를 직면했을 때 그것을 금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갈바리아 산의 문에 들어가셨다. 바오로는 나중에 죄많은 양떼에 대한 목자의 사랑의 신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 5, 6-8)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2. 착한 목자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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