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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0. 초막명절에 체포를 시도하다

[그리스도의 생애] - 20. 초막명절에 체포를 시도하다


고통을 당하는 하느님-사람(God-Man)은 하나의 걸림돌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나 그 죄를 보속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들먹이며 사도들 앞에서 십자가의 필요성을 장황하게 설명하실 때 마다 그들은 주님과 싸우거나 그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사도들은 여전히 주님의 왕국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 단단히 믿고 있었다. 주님께서 갈바리아 산에 가신다면, 그 때야말로 그들이 바로 보상을 받고 높은 직위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기라고 생각했다. 주님께서 당신 십자가에 대해 명백히 예언하면 하실수록 그들의 야심과 시기심 그리고 증오심은 커져만 갔다.

주님의 성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겉으로 볼 때의 패배를 승리의 조건으로 보는 씁쓸한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도들을 준비시키신 방법이다.
주님께서 반드시 고통을 당하셔야만 한다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그들은 얼마나 더디 이해하였던가! 주님께서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면서도 겨우 몇 차례밖에 말씀하시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그리스도의 영께서 제자들의 마음 속에 들어오실 때에야 그들이 이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주님은 당신의 죽음에 대해 모호하게 말씀하셨지만 주님께서 당신이 오신 목적을 명확히 밝히신 적이 세 번 있었다. 즉

1. 베드로가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고 주님께서 수위권을 주신 후에,
2. 가파르나움에 가는 도중 영광스러운 변모를 하신 후에,
3.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올라가실 때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반응을 보였던가! 그것은 마치 몰락한 주님의 왕국에서 다소의 권력과 권한을 구하려는 것 같았다. 십자가야말로 하느님 왕국이 시작하는 조건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몰랐다.

첫 번째 언쟁 :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주님께서 성지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유대인과 이교도가 반반 섞여 있는 이 도시에 들어오셔서 당신이 세우실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기 전에 주님은 그 교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체제를 명백히 밝히셔야만 했다. 이러한 지도체제는 세가지 형태로 이뤄질 수 있다.
즉 민주적 체제와 귀족정치 체제, 그리고 신정(神政) 체제를 들 수 있다. 민주적 체제란 권한과 진실이 투표나 산술적인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체제를 말하고, 귀족정치체제란 선택된 소수로부터 권한이 주어지는 체제를 말하며, 신정체제란 하느님께서 몸소 진리와 계시의 근원이시며 관리하시는 체제를 말한다.

먼저 민주적 체제에 호소하여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일반 대중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으셨다.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의 판단에 근거하여 투표나 여론조사를 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어떠한 답변이 나올까?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16, 13)

그들의 답변을 보면 주님의 신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마태오 16, 14)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충하며 반대되고 모순되는 답변밖에 말 할 수 없다. 네 가지 대중들의 생각은 주님께서 민중들 가운데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 주지만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주님이 살아 돌아온 요한 세례자라고 생각하였으며, 혹자는 주님이 하늘에 들려 올라 간 엘리야라 생각했고 또 어떤 이들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오리라 믿고 있던 예레미야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분분한 의견을 바탕으로 해서는 어떤 교회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주께서는 귀족정치체제에 의존하시며 당신의 뽑으신 자들, 즉 당신의 소(小)의회단체인 사도단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16, 15)

이러한 질문은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당신의 기적을 보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졌다. 이 고등의회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서로의 의견이 통일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분쯤 지나면 그들은 언쟁을 벌일 것이다. 유다는 주님의 재정적인 능력을 분명히 의심했으며 필립보는 주님과 천상 아버지와의 관계를 의심하였고, 주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거의 하나같이 자기 나라에서 로마의 악랄한 지배를 끝장내줄 세속적인 해방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사람들의 동의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베드로가 걸어 나와 단호하게 결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마태오 16, 16)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인간들에게 계시하기 위해 사명을 띄워 보내셨으며 모든 예언과 율법을 성취하는 참된 메시아라고 고백했다. 주님은 영원으로부터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시간 속에서 태어나신 사람의 아들, 즉,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이런 사실을 혼자 힘으로 안 것이 아니며 어떤 자연적인 연구나 분별력을 통해서도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알 수 없다고 그에게 알려 주셨다.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마태오 16, 17)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사도로 불리기 전의 이름으로 그를 먼저 부르시고, 그 다음에는 당신께서 지어주신 바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그를 부르셨다. 주님께서 그를 바위라고 부르신 것은 바로 이 바위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이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이인칭 단수로 부르신 것은 베드로가 교회 안에서 수위권을 갖게 되는 것은 베드로가 신성을 고백했기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마태오 16, 18-20)

지옥이나 오류나 악의 문이 결코 당신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신 후 주님께서 다가오는 당신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발표하셨다.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 죽음에 대해 의미한 암시를 여러 차례 주셨지만, 사도들은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메시야가 고통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얼른 깨닫지 못하였다.
사도들은 주님이 성전을 정화시킬 때 당신이 하느님의 성전이요 이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으켜 세워진 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인자가 십자가 위에 매달리실 것이라는 예언으로 이해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당신께서 사도단의 으뜸으로 선택하신 이 사람이 당신의 신성을 고백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과 사도들이 얻게 될 영광의 길은 고통과 죽음으로 통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 주셨다. (마태오 16, 21)

주님은 사도들이 당신을 인간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때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하느님으로 인정을 받으시자 당신 죽음에 대해 노골적으로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 죽음이 죄를 보상하는 희생으로 올바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지배하던 신비스러운 "필연성"이 다시 나타난다. 이 필연성은 주님을 묶고 있는 강한 밧줄로서 아버지께 대한 순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서로 얽혀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구원하시기 때문에 죽으셔야만 한다. 여기서 "필연성"은 죽음만이 아니라 삼일후에 이루어질 당신 부활에 대해서 즉시 언급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긍정과 주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칭호 가운데서 가장 높은 칭호를 받으시고 당신의 고양된 지위에 대한 고백이 이루어지자마자 주님은 당신이 받으실 극도의 모욕을 예언하셨다. 이 예언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즉 그들 앞에 나타나신 사람의 아들과 방금 고백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 동시에 관련되어 있다.

자기가 받은 권한으로 득의 양양한 베드로는 주님을 곁으로 끌어당기며 질책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리었다. (마태오 16, 22)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받아들였지만 고통당하시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위가 걸림돌이 되 버렸다. 베드로는 지금 이 순간 반쪽 그리스도만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즉 신적인 그리스도만을 원하고 구세주 그리스도는 원치 않고 있다. 그러나 반쪽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베드로는 베들레헴에서 그 영광이 선포된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만, 십자가 위에서 죄 때문에 희생되실, 보름달에 돌아가실 그리스도는 원치 않았다.

만약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일진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고 베드로는 생각했다. 유혹의 산에서 사탄은 빵을 주고 과학적인 기적을 행하며 독재자가 되어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버리라고 유혹하였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탄은 유혹을 할 때마다 "만약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라고 하면서 "만약" 이란 말을 서두에 꺼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하게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했다. 이렇게 베드로와 사탄은 다른 점도 있지만 같은 점도 있다. 베드로와 사탄은 모두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버리도록, 따라서 구속을 포기하도록 유혹하였다. 구원을 반대하는 것은 사탄의 정신이며, 십자가 없이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 사탄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사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 보시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마태오 16, 23)

방심하는 순간에 사탄이 베드로의 마음 속에 파고 들어 왔으며 베드로는 갈바리아 산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었다. 베드로는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주님의 눈에는 그러한 생각은 인간적이며 세속적이며 심지어는 사탄의 생각으로 보였다. 베드로는 누구든 신적인 조명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 게 되지만, 베드로는 누구든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알아볼 수 있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신적인 비추임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인도주의적 윤리 교사로 삼고자 했으나 사탄도 같은 생각이었다.

베드로는 주님의 꾸지람을 결코 잊지 않았다. 몇 년 후에 베드로는 자기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했던 것처럼 고통 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걸림돌에 대한 생각을 여전히 마음에 간직한 채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이 돌이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며 (Ⅰ베드로 2, 7)

사도들이 베드로를 그들의 능란한 대변자로 삼고 있었다는 것과 스승의 고통에 대한 말을 듣고 모두 똑같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베드로를 꾸짖으신 후,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군중들에게도 당신 말씀을 주의깊게 들으라고 명하신 사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앞으로 당신을 따르겠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세가지 조건을 나열하신다.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르코 8, 34)

십자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이제는 십자가를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귀표로 삼으신다. 주님은 그리스도교를 쉽게 믿을 수 있는 종교로 제시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은 당신을 닮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끊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고통과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스스로 희생의 선구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고 고통의 사람으로서 주님이 걸은 길을 열성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어떤 제자라도 주님께서 이행하시지 않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먼저 십자가를 지셨다. 주님과 함께 기꺼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자들만이 주님의 죽으심의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십자가를 진 자만이 참으로 주님을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고통을 받느냐 안받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숭고한 삶을 위해 희생하느냐 아니면 저속한 삶을 위해 희생하느냐가 문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살 것이다. (루가 9, 24)

만일 물질적이며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삶을 아끼고 쾌락을 추구한다면, 영적인 숭고한 삶을 잃어 버리겠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 영적인 숭고한 삶을 선택한다면 저속한 세속적인 삶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며 극기하여야만 한다. 십자가 없이도 자연덕은 있을 수 있겠지만 십자가가 없으면 덕은 결코 성장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은 교환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설명하셨다. 교환이란 사는 데 없어도 되는 것과 사는 데 꼭 있어야 할 것을 뜻한다. 인간은 백원짜리 동전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백원짜리 동전으로 살 수 있는 빵이 없으면 못산다. 그래서 인간은 동전과 빵을 교환한다. 희생이란 마치 손해를 보는 것처럼 뭔가를 "포기하다" 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교환인 것이다. 즉 세속적인 가치를 숭고한 기쁨과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영혼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마르코 8, 36-37)

주님께서 패배와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이 주님에 대해 부끄러워하자 주님은 당신이나 당신 말씀을 부끄러워 하거나 박해를 받을 때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경고하신다. 만일 주님께서 단순한 일개 교사로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그들의 주님이시요 구세주라고 부끄러움 없이 공공연히 고백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셨더라면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 되었을 것이다. 주님이 단순한 교사일뿐이라면 주님의 가르침을 하나나 둘 입에 담는 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인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용감히 고백하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신다.

"절개없고 죄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르코 8, 38)

두 번째 언쟁 ; 가파르나움

주님께서 당신 수난을 두 번째로 공공연하게 발표하신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와 소년으로부터 마귀를 쫓아내신 후에 이루어졌다. 주님과 사도들은 가파르나움으로 향했다. 주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가파르나움으로 향했다. 주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시는 도중에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을 보고 사도들은 매우 흥분한 상태에 있었다.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9, 44)

사도들은 십자가에 대해 엄격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능력을 세속적인 왕권과 인간적인 통치를 얻을 수 있는 희망으로 바꿔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구원을 도외시한 이러한 종교적 흥분을 주님께서는 불쾌하게 생각하셨다.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9, 44)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마르코 9, 30)

주님께서는 갈바리아 산에 대한 예언을 분명하게 반복해 말씀하심으로써 갈바리아 산의 사건이 실제로 벌어질 때 제자들의 신앙이 약해지거나 주님을 버리지 않도록 하셨다. 또한 이러한 선언을 되풀이 하심으로써 주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가시는 것은 마지못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희생으로 나가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주님께서 당신 죽음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을 제자들은 혐오하였으며, 주님 말씀을 주의해 듣고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 말씀의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은 알아 들을 수도 없었고 또 그렇다고 또 감히 물어 볼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루가 9, 45)

주님의 죽음과 영광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이 두 번째 언쟁을 야기시켰다. 가파르나움으로 가는 도중, 주님이 듣지 않는데서 제자들은 서로 논쟁을 벌였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났다. (루가 9, 46)

주님께서 당신 죽음에 대해 그들에게 심어 준 인상이 얼마나 피상적이었으면 제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 왕국이라는 정치, 경제적인 구조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까 서로 다투었을까! 스승이신 주님의 입에서 당신의 수난에 대해 들었건만 제자들은 지금 자리 다툼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베드로가 높은 직책을 맡게 됨으로써 그러한 논쟁이 더 가열되었을 것이다. 또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이 영광스러운 변모를 볼 수 있는 증인으로 뽑혔다는 사실도 그들의 심사를 건드렸을 것이다. 하여튼 주님께서 십자가를 드러내 보여주실 때마다 그러했듯이 제자들은 이번에도 언쟁을 벌였다.

난국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주님께서 왕국을 세우시리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야심으로 불타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훤히 알고 계셨다. 가파르나움에서 언제나 자기들을 환대해주던 - 아마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다 - 집에 들어갔을 때,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마르코 9, 32)

길에서는 큰 소리로 떠들던 입들이 주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다 아시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제 말이 없다. 그들이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거의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셨을 때 그들이 목격한 능력이 충만한 주님이 왜 그렇게 무력하게 보이셔야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주님은 아무 때나 피할 수 있는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시려 하는가? 이것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신비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믿지 않는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여전히 걸림돌로 남아 있다. 성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Ⅰ고린토 1, 23-24)

자연적이며 세속적인 인간은 주님을 교회 잔디밭 위에 꽂아 게시할 수 있는 도덕성을 주러 오신 분으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속죄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으로 받아들이려면 보다 높은 지혜가 필요하다. 성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Ⅰ고린토 2, 14)

이번에는 제자들의 잘못된 우월의식을 교정해주기 위해 주님께서는 아주 엄숙하게 한 어린이를 불러 자기앞에 세우셨다.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 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신 다음 (마르코 9, 35)

사도들은 주님의 왕국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제 그들의 야심에 대해 답변하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마태오 18, 3-4)

제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자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의 왕국에도 귀족계급이 있지만 이 세상의 지위와는 정반대다. 주님의 왕국에서는 내려감으로써 올라 가고 쇠퇴함으로써 커지는 것이다. 주님은 봉사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패배를 당하심으로써 몸소 굴종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품에 안고 있는 어린이를 보고 배우도록 그들에게 명하셨다.

가장 위대한 자는 가장 낮은 자요 가장 낮은 자는 가장 위대한자다. 명예와 위신은 식탁 머리에 앉아 있는 자가 아니라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하인들의 발을 씻어주는 자의 것이다. 하느님이신 주님이 사람이 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상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배워야 할 비할 데 없는 겸손의 행위였다. 우선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도리를 배울 수 없다면 어린이한테서 배워야 한다.

세 번째 언쟁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세 번째 확실한 예언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에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다. 주님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셨으며 확고한 의지와 결의가 너무도 역력히 얼굴에 나타났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것을 못알아 볼리 없었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길이었다. 그 때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셨고 그것을 본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가는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있었다. 예수께서 다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장차 당하실 일들을 일러 주셨다. (마르코 10, 22)

스승께서는 사도들을 훨씬 앞질러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고 계셨다. 사도들이 뒤에 쳐져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십자가를 향해 급하게 나아가시는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한 가지 생각은 자발적으로 희생을 당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계획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필히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다른 한편 사도들은 주님께서 능력을 발휘하시어 당신 백성을 정치적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기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높은 자리 하나쯤 배정해 줄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과감하게 예루살렘에 들어가려하심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왕좌를 꿈꾸고 있었으나 주님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셨다.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주님은 사도들을 옆으로 불러 세우셨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길이었다. 그 때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셨고 그것을 본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가는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있었다. 예수께서 다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장차 당하실 일들을 일러 주셨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코 10, 32-34)

다시 한번 주님은 수난의 쓸개를 부활의 꿀로 포장하신다. 갈바리아 산은 주님께서 피할 수 없으므로 순교자로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주님 앞에 놓여 있는 무엇이 아니었다. 악이 덧씌우는 고통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인간적으로는 피하고 싶었으나 그러나 결코 거기에 넘어가지 않으셨다. 배가 파도에 들까부릴 때에도 중심을 유지하듯이 주님의 인성은 좌우로 흔들렸을지라도 그것을 밑받치고 있는 것은 확고 불변한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동시에 죄에 대한 화해를 의미하는 대리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는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루가 18, 34)

죽음과 바람과 바다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계시며 바리사이인들의 말문을 막으신 지성을 갖추고 계신 주님께서 당신의 적들을 막을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을 어떻게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실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그들의 걱정이었다.

지난 두 차례의 경우와 똑같이,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다시 말씀하시자 사도들 사이에 새로운 언쟁이 벌어졌다. 이미 전면에 부상한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의 무례함을 보고 화를 내며 그들을 파멸시킬 것을 주님께 요구했던 두 형제들이 이제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부탁한다. 그들은 오만불손하게도,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자마자, 주님께 그들의 허영심의 도구가 되어주도록 부탁했다.

그들은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마르코 10, 37)

주님께서는 요청을 들어 허락해주실 수 있는 왕이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음을 볼 때 그리스도의 권한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왕국에 대한 개념은 세속적인 것이었다. 세속적인 왕국에서는 가문의 영향력과 개인의 승진이 중요시 되고 있다. 야고보와 요한도 하느님 나라를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자기들의 출세도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코 10, 38)

하느님의 왕국에서 고관직을 얻는 것은 총애를 받아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하나가 됨으로써 얻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영광을 얻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면 사도들도 영광을 얻기 위해 죽어야만 할 것이다. 주님께서 악을 이기기 위해 쓴 잔을 마셔야만 하셨다면, 사도들도 그 잔을 마셔야만 한다. 여기서 "잔" 이라는 말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 의해서 당신께 쏟아 부어질 패배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피의 세례를 통해 주님은 완전히 피 속에 잠기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정화와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잔을 마시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야고보와 요한은 "마실 수 있다"고 답변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시겠다고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신앙이 성취되리라고 예언하셨다. 야고보는 헤로데에 의해 살해됨으로 첫 번째로 그리스도의 피의 세례에 동참하게 된다. 요한도 고통을 당했다. 요한은 오랫동안 박해와 유형의 생활을 하였다. 요한은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졌으나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으며 파트모스에서 늙은 나이로 죽었다. 야고보는 주의 잔을 마심으로써 피를 흘린 모든 피의 순교자들의 주보성인이 되었다. 요한은 육체적인 고통은 당하였지만 자연사한 무혈 순교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 말다툼이 시작된다.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화를 냈다. (마르코 10, 41)

그들은 모두 똑같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화가 났다. 주님께서는 다른 열 명의 사도들을 당신께로 불러 모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훈계를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밖의 열 명이 훈계를 들을 차례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훈계하신 첫 번째 내용은 가파르나움에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훈계하신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것은 겸손하라는 훈계였다. 이제 그들이 배우게 되는 것은 당신 왕국에서 어떻게 하면 탁월한 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탁월성의 의미다. 주님께서는 세속권력가의 독재주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당신 왕국의 차이를 말씀하신다. 세속왕국에서는 왕이나 귀족, 왕자, 대통령과 같은 지배자들은 봉사를 받는다. 주님의 왕국에서는 봉사와 섬김의 특권이 귀족계급의 특징이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마르코 10, 42-45)

주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낮고 미천한 자들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높이 들어올림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 비록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왕들로 간주하셨지만 사도들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사도들이 본받기를 바라시는 겸손의 본보기로서 당신 삶을 보여 주시며 도덕적인 계명을 주셨다. 전체적인 진리는 주님께서는 봉사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사실 주님은 왕이시며 왕국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왕국은 세속의 왕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확보해야 한다.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과 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지배권의 직접적인 관계를 소개하셨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마르코 10, 45)

다른데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주님은 인간적인 탄생이 당신의 위격적 실존의 시작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표현을 쓰신다. 주님은 인간들이 연민과 자비심으로 당신이 봉사하시는 것을 보기 훨씬 전부터 봉사를 시작하셨다. 주님의 봉사는 주님께서 천상의 영광을 스스로 벗어 던지시고 마리아의 베틀에서 짜여진 육체를 입으셨을 때 시작되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몸값을 지불하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일 주님이 단순한 목수의 아들이었다면 당신이 봉사하러 왔다고 하는 말은 어리석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봉사하는 일이 그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하인이 된다거나 하느님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 아니라 겸손인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해야 되는데 그것은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값은 죽음" 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무런 빚진 것이 없으면 몸값은 무의미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느 밝은 여름날 흡족한 마음으로 부두가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자기 앞에 있는 부두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세 번째 물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부두 뒤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외친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이러한 전체적인 진행과정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부두 위에 있는 사람은 조금도 위험하지 않으며 구조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물에 빠져 익사하고 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그 죽음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죄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노예상태가 없었더라면 몸값에 대한 협상이 없을 것이다.

많은 개인들은 집단의 잘못과 오류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예로써 정부가 부패했을 때 개인들은 자기도 그 일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흔히 부인한다. 사람들이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죄인들과의 모든 관계를 더 강력하게 부인한다. 그들은 거의 자기들의 책임을 자기들이 지은 죄와 정비례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은 자기들은 사회의 부패에 대해 책임이 없기 때문에 사회의 부패에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아주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사실 그와는 정반대다. 죄가 없으면 없을수록 사회적 죄에 대한 각성과 책임 의식이 더 커지는 것이다. 참으로 선한 사람은 세상이 이렇게된 것은 자기가 좀 더 선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의식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무거운 짐에 억눌려 번민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 큰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너무도 생생하게 파고들어 다른 사람의 고통이 바로 내 고통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그분만이 장님에게 지팡이가 되고자 하시며, 세상에 유일하게 건강한 그분만이 병자를 돌봐주기 바라신다.

육체적인 고통에 해당하는 것은 도덕적인 악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죄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악을 짊어지신다. 보다 건강한 사람이 병자를 더 잘 돌봐줄 수 있는 것처럼,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더 효과적인 보속을 할 수 있다. 애인은 가능하다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대신 떠맡으려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도덕적 악을 당신의 것인양 떠맡으신다. 주님은 인간이시기에 세상의 악을 같이 나누어 지시며, 또한 하느님이시기에 세상의 악을 구하실 수 있으시다.

주님께서 언쟁을 벌이고 있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갈바리아 산은 당신의 일생의 과업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계획을 앞당겨 망치는 비극적인 것도 아니며, 적대 세력이 주님을 인도하는 불길한 종말도 아니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의를 위해 죽는 순교자나 영광스러운 대의를 위해 죽는 애국자와 같은 식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일생의 목적은 죄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부여받으신 신적인 "필수과업" 이었다. 주님의 죽음은 악에 대한 대가로 바쳐질 것이다. 인간이 단지 착오에만 빠진거라면 주님께서는 인생의 온갖 안락함을 누리는 교사가 되셨을지 모르며, 고통의 이치를 가르치신 후 푹신한 침대에서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에 빠져 있기에, 주께서는 구세주가 되시며, 구원의 열매를 나누어 갖도록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주님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0. 초막명절에 체포를 시도하다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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