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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1. 무죄한 주님만이 단죄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 - 21. 무죄한 주님만이 단죄하실 수 있다


주님을 체포하려고 시도하던 다음 날 결백 자체이신 주님이 죄인을 단죄하기를 거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정의와 자비가 뒤엉킨 딜레마였으며 육화(肉化)의 핵심을 차지하는 딜레마였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다면 어찌 죄인을 용서하지 않으시겠는가? 만일 하느님께서 정의로우시다면 죄인들을 벌하시거나 그 죄에 걸맞는 보속을 시키시지 않겠는가?
거룩함 자체이시기에 주님은 죄를 미워하셔야만 되고 그렇지 않다면 주님은 선(善)이 아니실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맘 좋은 할아버지처럼 자녀들이 계명을 거스리는 것쯤 눈감아 주셔야 하지 않을까?
하여튼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답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밤, 성서는 전체 내용 가운데서 극히 생생하게 대조를 이루는 사건 하나를 밝혀주고 있다. 그 사건은 두 문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하루 종일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복음서는 격렬하게 주님을 성토하며 괴롭히던 주님의 적들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하고 핀잔을 주었다. (요한 7, 52)

그러나 주님에 대해서는 이렇게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 갔고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요한 8, 1)

성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 친구건 적이건 상관없이 - 주님만 빼놓고 모두 집이 있었다. 진실로 주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9, 58)

예루살렘을 아무리 뒤져봐도 집도 가정도 없는 사람은 예수님 뿐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이웃들과 상의를 할 때, 주님은 올리브동산에 오르시어 인간이 아니라 아버지와 상의를 하셨다. 주님께서는 얼마 안 있어 이 동산이 성스러운 은신처가 되어 이곳에서 악의 세력과 처절한 투쟁을 벌이시며 피땀을 많이 흘리게 되실 것을 알고 계셨다. 밤동안 주님께서는, 성장의 고통 속에서 너무도 비틀리고 옹이투성이가 되어 마치 주님이 겪으시게 될 고통스러운 수난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해묵은 올리브 나무 숲아래 잔디위에 누워 동양식으로 주무셨다.

때는 초막절이었기에 사방에서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흥분상태와 열성적인 기도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심신의 이완을 몰고 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기 저기서 방자하고 부도덕한 일들이 곧잘 벌어지는 것도 당연하였다. 결국 그런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주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시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들킨 여인을 주님께 데려 왔다. 그들은 메시아와 논쟁을 벌여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지라 한판의 승부를 위해서는 한 여인의 수치심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물론 여인의 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건을 고발하는 자들의 야비하고 상스러운 태도를 보건데 이 사건은 용서해 줄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요한 8, 4)

현장에서 잡다니! 그들의 말투를 뜯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야비하며 남의 일을 염탐하기 좋아하고 속속들이 썩어빠졌는가를 알 수 있다. 고발자들은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실 때 군중들 가운데 그녀를 데려왔다. 이 여인을 현장에서 잡은 "그녀보다 더 거룩한" 자들은 이 여자를 공개적으로 구경시켜야 된다고 생각해서 주님의 말씀을 방해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죄를 이웃들 앞에서 표제로 삼아 들춰내는 인간의 본성은 야비한 것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면 똥 묻은 개는 자기가 깨끗한 줄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추문을 들을 때 가장 기뻐하지만 너그러운 사람들은 그들의 추문을 덮어 주려하며 독실한 신앙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법이다. 야비하고 타락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춰내는데 빠르다. 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남을 깍아내리는 것이 그 지름길인양 착각하고 있다. 사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악덕을 혼자만 비밀로 하고자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악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선량한 사람으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그들을 질타한다. 사람들의 허물을 알고자 하면 그 사람들이 남에 대해서 어떤 욕을 자주하는지 들어보기만 하면 된다.

그 당시에는 추문을 싣는 신문은 없었지만 남의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녀를 군중들이 다 볼 수 있는데로 끌고 온 것은 그녀를 공개석상에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야유하는 군중들이 그녀를 앞으로 떼밀었으며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베일로 머리를 가렸다. 벌벌 떠는 죄인을 끌고 와 동양의 여인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럽게 뭇사람의 호기심에 찬 시선을 받게 하고 그들은 겸손한척 하면서 주님께 말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 8, 4-5)

모세법에는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는 그들의 말은 옳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짓 존경심을 본능적으로 간파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그들의 음흉한 계략을 감추기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한편 주님은 당신 앞에 벌어진 사건에 멈칫하실 수밖에 없었다.

당신께서는 결혼의 신성함을 가르치셨는데 이 여인이 그 가르침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사건을 통해 오로지 당신을 물고 늘어질 꼬투리를 잡고자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주님은 그들이 당신께 대한 미움의 소극적인 수단으로 그녀를 이용하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죄에 대해 의분을 느끼거나 하느님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선동하여 주님께 반대하도록 만들고자 그녀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주님께 그녀를 데려 온 것은 이중적인 계략이 담겨 있었다. 우선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갈등이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로마인들은 정복자였으므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은 그들만 가지고 있었다. 또 한편 모세법에 따르면 간음하다 들킨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만 하였다. 여기에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진퇴양난에 빠뜨린 딜레마가 있었다.

만약에 주께서 이 여인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돌려 보낸다면 그것은 모세법을 거스리는 것이 되며, 만일 모세법을 존중하여 간음한 죄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로마법을 파기하도록 조장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됐든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세법을 어겼다고 반대할 것이고 로마법정은 로마법을 어겼다고 유죄판결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세의 이단자가 아니면 로마의 반역자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 속에는 또 하나의 계략이 숨겨 있었다. 주님은 이 여인을 죽이라고 하시든가 아니면 풀어주셔야만 하였다. 만일 죽이라고 하신다면 그들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비난할 것이다. 주님은 스스로를 자비롭다고 하셨으며,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죄녀로 하여금 식사 중에 당신 발을 씻게 허락해주셨다. 그런데 이여인을 처벌한다면, 더 이상 주님은 당신이 "죄인의 친구"라고 말씀하지 못하실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9, 10)

다른 한편 이 여자를 풀어주신다면 당신이 완성하러 오신 성스러운 모세법을 주님께서 스스로 짓밟는 꼴이 될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5, 17)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대문에, 모세법은 두 말할 여지없이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 법을 어기신다면 당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모세법은 이런 자를 돌로 쳐 죽여야 된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어떤 판결을 내리겠소?"

이런 질문은 단순한 인간으로서는 풀기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주님은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이시다. 이미 육화를 통해서 정의와 자비를 조화시키신 주님께서는 몸을 굽혀 땅에다 뭔가를 쓰시면서 이제 정의와 자비의 조화를 좀더 확대 적용하신다. 주님이 글씨를 쓰신 것은 주님의 생애 가운데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주님께서 무슨 글을 쓰신지 아무도 모른다. 복음서는 간단하게 이렇게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요한 8, 6)

그들은 모세법에 호소하였으나 주님도 모세법에 호소하실 것이다. 모세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누가 이 법을 썼으며 누구의 손가락으로 썼을까? 출애굽기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다.

모세는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돌아 서서 산에서 내려 왔다. 그 두판 양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새겨져 있었는데,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었다. 그 판에 새겨진 글자도 하느님께서 손수 새기신 것이었다. 백성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말하였다. "진지에서 들려 오는 저 소리를 들으니 전쟁이 터졌나 봅니다." 모세가 말을 받았다. (출애굽기 32, 15-17)

그들이 주님께 율법을 상기시켜 주었으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께서 율법을 쓰셨음을 일깨워주셨다. 상징적인 의미로 볼 때 돌 석판으로 된 성전 마루바닥에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손가락이 시나이 산에서는 석판에다 계명을 쓰셨다. 자기들 앞에 서 계신 모세법을 주신 분을 알아 볼 눈이 그들에게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꼬투리를 잡는데 너무나 혈안이 되어 있어 글씨에는 관심도 없었고 계속 질문 공세를 폈다. 이제 주님은 독안에든 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요한 8, 7-8)

모세는 부정한 죄에 대해 사형에 처하라는 율법을 석판에 썼으며, 주님께서는 모세법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보다 상위의 율법을 선언하심으로써 그것을 완성하실 것이다. 즉, 죄없는 자만이 판단할 수 있다는 새로운 율법이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배심원을 소집하신다. 무죄한 자만이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양심을 보시고,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단을 중요시 하신다. 마음 속에 죄가 있는 자는 판단을 유보해야만 한다.

낡고 녹슨 어떤 방패가 어느 날 기도하였다. "오 태양이시여, 저를 비춰주소서",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였다. "먼저, 네 자신을 깨끗하게 닦아라." 그렇다면 이 여인이 죄인의 심판을 받아야하겠는가? 무죄한 자만이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엄숙한 주장이었다. 이 세상에 무죄한 자가 정말로 있다면 그의 자비심은 그의 정의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물론 재판석에 앉은 판관이 자기도 죄가 있으면서 범죄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적인 자격을 가지고 재판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처한 이 고발자들은 모세법을 옹호하거나 수행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미 말씀하신 내용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셨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 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뺄 수 있지 않겠느냐?" (마태오 7, 1-5)

주님께서 땅에 글씨를 쓰고 계실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돌맹이를 손에 들고 형을 집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각 사람은 옆 사람이 들고 있는 돌맹이를 빼앗아 양 손에 돌맹이를 들고 어느 것이 더 무거운지 비교해보고 가벼운 것은 옆 사람에게 주고 자기는 더 무거운 돌로 이 여인을 치려고 하였다. 이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른 죄는 있어도 그녀와 같은 간음죄는 범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죄 때문에 어떤 죄는 면하게 된다. 어떤 병이 다른 병 때문에 치료되는 것처럼, 어떤 죄에 빠진 사람은 다른 죄를 짓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종종 거짓말을 할지 언정 도둑놈은 아닐 수도 있다. 유다이스 가리옷과 같은 도둑이 꼭 간음죄인이 되어야 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유다를 항상 그런 식으로 그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과 인색 권력욕의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죄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들은 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죄들은 더더욱 가증스러운 것들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죄들은 사람들을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의 저속한 죄는 사회 복지시설이나 감옥과 같은 사회적부담을 안겨주며 뭇 사람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고위 공직자의 부패나 매국적 행위, 대학에서 그릇된 사상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고급스런 죄들은 사면을 받거나 눈감아 주거나 심지어는 덕목으로 칭송을 받기도 한다.

여기서 주님은 고급스러운 죄들을 사회가 비난하는 죄들보다 훨씬 가증스러운 것으로 보신다고 넌지시 암시하신다. 주님은 사회가 단죄한 자들을 결코 단죄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들은 벌써 단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죄인임을 거부하는 자들은 분명히 단죄하셨다.

주님은 노인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람씩 차례로 올려다 보셨다. 그것은 최후 심판을 예고해 주는, 조용히 속 마음을 꿰뚫어 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서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요한 8, 9)

나이가 많을수록 더 많은 죄를 지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 스스로를 단죄하게 만드셨다. 아마 주님께서 어떤 노인을 쳐다보시자 그의 양심에 "도둑"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라 돌을 떨어뜨리고 도망쳐 버렸을 것이다. 그보다 나이가 적은 어떤 사람은 마음 속에 살인자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냥 떠나갔으며 한 사람 한 사람 다떠나고 젊은이 한 사람만 남았다. 구세주께서 마지막 남은 이 젊은이를 쳐다보시자 그의 양심에 걸리는 것은 "간음자" 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돌맹이를 떨어뜨리고 도망가자 이젠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주님께서 몸을 굽히고 다시 글을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모세법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주님도 모세법을 이용하실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쓴 첫 번째 석판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하느님은 두 번째 석판에다 다시 써주셨으며 이 석판은 계약의 궤에 보관되고 자비좌 위에 안치되어 무죄한 피를 그위에 뿌렸다. 이와 똑같이 이제 모세법은 피, 즉 어린 양이신 주님의 피를 뿌림으로써 완전하게 될 것이다.

여인을 변호해줌으로써 그리스도는 스스로 죄인의 친구이심을 입증해 보여 주셨다. 물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에 한해서다. 주님은 당신 말씀대로 사랑의 본질을 구성하는 위대한 마음과 측량할 수 없는 자비를 발견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나서야 하셨다. 그들은 비록 죄인들이지만 그들의 사랑 때문에 결코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는 법이 없는 오만하고 시건방진자들보다 훨씬 나은 자들이다. 주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보다는 창녀를, 대사제보다는 회개하는 강도를, 모범적인 형보다는 방탕한 아우를 들어 높여주기 위해 오셨다.

교회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렇게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기꾼과 엉터리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교회가 얼마나 거룩해야 들어오겠느냐?" 만일 그들이 원하는 만큼 교회가 거룩하다면 그들은 결코 교회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불교나 유교와 같은 동양의 모든 종교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종의 정화의식을 거쳐야만 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소개하신 종교에서는 죄를 인정한다는 것이 주님께 나갈 수 있는 조건이다. "성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지만 병든 자는 의사가 필요하다. "홀로 서있는 여인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8, 10)

모세법의 국법에 의하면 형을 집행하기 전에 범죄에 대해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 이 두 증인은 형을 집행할 때 보조자의 역할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범죄에 대해 증인을 서줄 모세법의 지지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주님께서 그녀를 "여인" 이라고 부르신 점을 주목해보라. 주님께서는 다른 여러 가지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실 수도 있었지만 이 여인으로 하여금 당신과 일치하여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는 세상의 모든 여인의 대표자로 삼으셨다. 주님의 첫 번째 질문 속에는 장난기 어린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여인이여,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주님은 그녀 혼자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그녀를 고발한 자들을 모두 물리치셨다. 그러한 고독 속에서 주님은 물으신다.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그녀가 대답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돌로 칠 자가 아무도 없다면 주님도 돌로 치지 않으실 것이다. 심판관이신 주님께 온 이 여인은 주님이 구세주이심을 알 게 되었다. 고발자들은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나 그녀는 주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자기보다 무한히 우월하신 분 앞에 서 있음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그녀의 믿음은 옳았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녀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8, 11)

그러나 왜 주님께서는 그녀를 단죄하시지 않으실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녀를 대신해서 단죄를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무죄함은 죄인을 위해 고통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정의가 살아나고, 주님의 죽음의 공로가 그녀에게도 미칠 것이기에 자비가 살아나게 된다. 정의가 먼저고 그 다음이 자비다. 먼저 보상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 용서가 이루어진다. 주님은 죄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돌로 쳐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유일한 분이셨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가볍게 보시지 않았다. 당신 스스로 그 죄의 짐을 지셨기 때문이다. 용서란 대가를 요구하며,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질 언덕 위에서 용서의 완전한 대가가 바쳐질 것이며, 정의가 보상되며, 자비가 널리 펼쳐질 것이다. 죄의 노예살이로부터의 이러한 해방을 주님은 자유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요한 8, 36)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1. 무죄한 주님만이 단죄하실 수 있다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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