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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3. 인자(人子)

[그리스도의 생애] - 23. 인자(人子)


주님께서는 자신을 묘사하는데 그 어느 이름보다도 "인자"라는 호칭을 자주 쓰셨다.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을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으며, 주님 자신이 최소한 여든 번쯤 사용하셨다. 주님은 자신을 "한 사람의 인자" 라고 하시지 않고 "인자" 라고 부르셨다. 영원하면서도 동시에 일시적인 주님의 실존이 인자 속에 자리하고 있다. 니고데모와 말씀을 나누실 때 주님은 당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하느님이심을 지시해주셨다.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일이 없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 13.16)

주님의 신성과 위격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인성에 대해 "인자" 가 말씀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 라고 처음으로 언급하신 것이 제자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였을 때였다는 사실로부터 입증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인 당신께 가당치 않는 모습으로 인간이 되셨다. 이렇게 인성을 취하신 것은 모욕이요, 비웃는 것이며 박탈당하는 것이요, 주님의 영광을 버리는 행위였다. 주님은 당신의 신적인 영광을 근본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육체적인 조건을 갖춘 생명을 갖게 되셨다. 주님의 고통과 죽음은 이러한 굴종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주님은 하느님이시기에 고통을 당하실 수 없지만, 인간이시기에 고통을 당하실 수 있었다.

주님은 자주 인자와 하느님의 아들을 구별하셨다. 주님께서는 적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요한 8, 23)

"인자" 라는 호칭은 주님께서 마지막날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예언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다른 때는 이 호칭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해야 할 주님의 메시아적인 사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호칭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훨씬 자주 가리키고 있다. 인자라는 호칭 속에는 구세주로서의 당신 사명과 하느님으로서 약한 인간 육신을 취하신 치욕이 숨겨져 있다.

왕이 암행행차할 때 다른 이름을 취하듯이 하느님의 아들은 "인자" 라는 다른 이름을 취하셨으며, 그것은 당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취하신 새로운 신분을 보다 훌륭하게 나타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기에 "인자" 라는 칭호는 인간의 운명인 수치와 굴욕과 슬픔을 나타낸다. 이 칭호는 영원으로부터의 주님의 실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주님이 어떤 존재가 되셨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인자" 또는 "고통의 사나이" 가 예언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마르코 9, 11)

이 이름은 모욕일 뿐만 아니라 죄많은 인류와 하나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이 이름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셨다. 영광을 받으신 "부활과 생명"의 입술은 다시는 "인자" 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인류와 하나이셨음을 뒤에 버리셨다.

주님의 현재의 미천한 신분이 주님께서 강조하고자 하신 것이라는 사실이 주님께서 인간의 불행과 슬픔과 하나가 되셨다는데서 확실해졌다. 인간이 집이 없으면 주님도 집이 없으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8, 20)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진리는 당신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며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은 "인자" 라는 이름을 결코 그러한 진리의 원천으로서 사용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가져오신 진리는 신적인 진리로서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당신의 신성과 관련해서는 "인자" 라는 말을 피하셨다. 주님의 신성은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요한 8, 55)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 1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요한 6, 32)

마지막 때가 되어 세계를 심판하고 양과 염소를 갈라세우며 덕과 악의 저울을 들고 각 영혼을 저울질 할 때 이러한 특권과 권한은 "인자" 로서 고통을 받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서는 죽도록까지 순명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그를 심판관으로 들어 올리셨다. "인자" 로서 인간의 속을 훤히 아시기에 주님은 인간을 가장 정확히 심판하실 수가 있다.

아버지께서는 또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는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요한 5, 27)

"인자"는 당신이 인류와 하나임을 나타내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이 죄를 빼고는 모든 점에 있어서 인간과 똑 같다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청중들에게 유죄판결해 보라고 도전하신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모두 "인자"인 그분의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잔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오며, 굶주림과 목마름을 참으시고, 고뇌를 겪으시고 피땀을 흘리셨으며, 심지어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시기까지 하였으며,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대지를 소유한 자본가들이 주님께 자기 지방을 떠나라고 했을 때 화를 내지 않으셨으며, 술꾼이라거나 탐식가라는 허위 비난을 감내하셨으며, 적들이 주님께 돌맹이를 던지고자 했을 때 부드럽게 살짝 피하셨으며, 특히 걱정, 불안, 두려움, 정신적 고뇌, 열병, 굶주림, 목마름 그리고 수난을 받으실 때의 고통을 감내하셨으니,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자"를 본받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인 것은 그 무엇도 주님께 생소한 것이 없다.

가정에는 시련이 있으며, 주님은 가정에서 생활하심으로써 이러한 시련을 성화시키셨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하는 노동과 일은 인간의 운명이기에, "인자" 이신 그분은 목수가 되었다. 죄로 인해 인간이 겪게 되는 어떤 고통도 인간과 하나가 되신 주님이 겪지 않으신 것이 없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오 8, 17)

이사야는 이미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그대로 떠맡으심을 예언하였다. 비록 주님께서 병드셨다는 증거가 복음서에는 없지만 죄가 당신의 것인양 느끼셨을 때 당신의 병인 것처럼 느끼신 예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병을 고치실 때 주님은 당신 능력의 원천인 하늘을 우러러 본후 "한숨"을 짓거나 "신음소리"를 내신 적이 가끔 있었다. 인간의 질병에 대해 주님께서 그렇게 마음 아파하신 것은 귀먹고 말 못하는 것, 나병, 광기는 그러한 병을 앓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미치고 있는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죽음이 그러한 질병의 원인인 죄를 없애 주실 것이기 때문에 (비록 최종적인 질병과 오류로부터의 해방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주님은 병을 고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처럼 쉽다고 말씀하셨다.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 가라' 하고 말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마태오 9, 5)

주님께서 탄식하신 것은 "인간이 물려받은 모든 질병"을 보고 마음이 아프신 대사제는 당신이셨기 때문이다. 눈물! 주님께서는 세 번 우셨는데, 인간은 울기 때문이다. 오빠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마리아와 같이 다른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셨을 때, 주님은 당신의 슬픔처럼 느끼셨다.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 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요한 11, 33)

라자로의 죽음과 장례를 통하여 주님은 첫 번째 사람부터 끝사람까지 긴 애도자의 행렬을 보았으며 그 긴 행렬의 이유를 알고 계셨다. 그것은 아담의 죄와 더불어 어떻게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며칠 이내에 당신은 제2의 아담, 즉 "인자" 로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음에게 죽음을 안겨주실 것을 알고 계셨다. 영신적인 건강을 회복시키는데는 주님의 생명이 필요하듯이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도 주님의 뭔가가 필요하였다. 첫 번째 예로써 인자이신 주님은 에너지가 당신에게서 빠져나가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처럼 느끼셨다. 여인이 당신 옷자락을 만졌을 때 복음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 서서 군중을 둘러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코 5, 30)

비록 주님은 죄나 질병에 조금도 감염되시지 않았지만,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의 고통을 짊어지고 할수만 있다면 그 고통을 대신 떠맡으려는 것처럼 주님은 그 모든 질병과 죄를 짊어지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기 가족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에 대해 가지고 계신 대표성을 갖고 있지 않다. 첫째 아담이 모든 인간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주님은 새로운 아담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용서와 생명을 갖다 주실 것이다.

끝으로 "인자" 라는 칭호는 주님께서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 만을 대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대표하신 다는 뜻이다. 주님과 인류와의 관계는 아담과 인류와의 관계와 유사하다. 인류에게는 조상이 둘이다. 즉, 아담과, 새로운 아담 그리스도다. "인자" 는 어떤 특정한 사람 또는 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모범인간 즉 보편적 인간이시다. 하느님은 인류 안에 들어오시기로 하였으며 이를 완벽하게 묘사하는 표현은 Homo Factus Ent(사람이 되셨도다) 이다.

주님은 인간이 되셨으며 인성의 동참자가 되셨다. 주님은 공동 인류의 실재 속에 들어 오셨으며, 당신의 신성한 위력 속에 인성을 취하셨다. 신들이 인간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들의 본성과 아주 닮은 점을 보며 매우 만족해할 거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인간에 대한 경멸의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 신성의 표현이 "너무 화려해서 예배할 수가 없다" 라고 그리스 인들은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그 반대가 사실이었다.

"그분은 당신이 만드신 인간 안에 들어 오셨다." 성화(聖化)시키는 자인 주님께서 성화하는 자들과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데 두 당사자간의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어떤 방도가 필요하다. 둘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필요하다. 자기 형제들과 닮은 사람이 닮지 않은 사람보다 형제들에게 더 큰 세력을 떨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성화자가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죄많은 당신 형제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주님께서는 상실해 버린 이상적 인간 특성을 당신의 삶 속에 재구현시키시고 그러한 이상적 인간 특성을 인간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심어주심으로써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실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인간은 우리 뼈에서 뼈를 취하고 우리 살에서 살을 취한 이상적인 사람이 되어야 했으며, 이 사람이 곧 "인자"였다. 그분은 모든 사회적 특권을 박탈당하시고, 서민들의 수준으로까지 내려가시어, 비천한 무리들 가운데서 탁월한 이상을 제시하며 사람들 틈에서 사셔야만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인자는 인간을 가엾이 여길 줄 아는 연민의 정이 넘치는 대사제가 되시고 하느님 앞에서 인류의 참된 대표자가 되신다. 주님께서 당신이 대표하는 자들과 가까이 하면 하실수록 당신 직무에 훨씬 더 부합하시게 된다. 무지한 자와 오류를 범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주님께서는 병약함을 체험하시고 고통받는 인간들과 닮게 되셨다.

만일 주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뽑히지 않으셨다면 인간을 위한 대사제가 되시지 못했을 것이며 인간을 위해 중재하시지도 못하고 아버지께 인간의 죄를 갚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인자"라는 칭호는 인류와 형제임을 잘 나타내준다. 인간은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는 한 형제가 될 수 없으며, 하느님에게 아들이 없으시다면 하느님은 아버지가 아니시다. 하느님의 부성(父性)이 없는 인간의 형제관계를 믿는다면 인간은 사생아 족속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만으로는 "인자" 의 칭호를 충분히 설명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인자는 기꺼이 인간의 운명을 함께 하셨을 뿐만 아니라 - 심지어는 필연적으로도 - 그렇게 하기를 열망하셨다. 동정적인 사랑으로 인자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 오셨으며, 당연히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인자의 사랑은 마치 애국자가 조국을 위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어머니는 병든 자녀를 위해서 그리고 그 자녀와 함께 고통을 당하신다. 인자가 사람이 되심으로 이 어둡고 죄많은 불쌍한 세상을 찾아 오신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하나가 되신 것은 당신의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궁핍과 불행과 재난과 심지어는 죄까지도 떠맡는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셨기에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밖에 더 중요한 것이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일 이러한 고통이 어떤 가치를 지니려면 인자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봉헌할 희생물이 있어야 하며 인자의 희생물은 효력을 발휘하는데 필요한 속성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 봉헌물은 완벽하고 영원히 유효하여야 한다. 따라서 인자도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셔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죄많은 인간의 배상과 구속은 하느님이 보실 때 가치가 없을 것이다. 동정심만으로는 하느님과 죄인들의 일치가 이뤄지지 않는다.

직무에 대한 신적인 임명이 있어야 한다. 신적인 "필연"에 의해서, 인자는 사제일 뿐만 아니라 희생물이시기도 하다. 인자는 자신을 희생하여 죄를 없애신다. 사제로서의 인자는 인류의 대표자가 되시고, 희생물로서의 인자는 인류의 대리자가 되신다. 인자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물로서 자신을 봉헌하였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며 헌신하는 완벽한 본보기이며, 하느님은 인간의 제물이 아니라 "인자" 즉 원형인간 또는 모본인간 (Archetypal or Pattern Man)이 대표하는 인류의 제물을 받아들이셨다. 죄를 대신 짊어졌다고 해서 인자와 천상 아버지의 관계가 전혀 변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는 실상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만 죄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운명적으로 죄를 지신 분이 되셨다. 이에 성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살해된 어린양" 이라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 마귀나 그리스도의 적들이나 심지어는 사도들까지도 - 그리스도를 "인자" 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에게 붙여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특별한 의미, 즉 영원한 아버지의 외아들"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몸소 지으시고 홀로 자신에게만 적용시키신 "인자" 라는 이 칭호도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인류의 대표자가 되지 못했다. "하느님의 아들" 은 인류에게 생소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류의 창조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자" 는 죄를 빼고는 인류와 하나가 되신 분이다. 인자는 인간이기에 죽을 수가 있었다. 죽는다는 것은 치욕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신께 영광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당신의 성자에게 유별난 사랑을 보여 주시어 그에게 인자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볼 수 있게 해주셨다. 이 세상 조상들의 족보는 사실 별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인자가 갈바리아 산위에 심으신 하느님 자녀들의 족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3. 인자(人子)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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