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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8. 유 다

[그리스도의 생애] - 38. 유 다


어느 날 가리옷(Kerioth)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훌륭한 남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찬미" 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것을 축하해 주기 위해 선물들을 가져왔다. 거기서 별로 멀지 않은 베들레헴에서는 또 한 아기가 태어났다.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이 아이에게 선물을 가져왔다.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로 베들레헴의 아이가 가리옷의 아이를 만났다. 주님께서는 유다를 사도로 부르셨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갈릴래아 출신들인데 유다만이 유대아 출신이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리능력 때문에 유다는 다른 갈릴래아 출신 사도들보다 사도단의 경리에 자연히 더 적임자였을 것이다. 천부적 재능에 맞는 일을 맡기게 되면 배반이나 불만을 가급적 억제할 수 있다. 동시에 인생의 유혹은 대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뛰어난 재능에서 나온다.
외적인 실패에 앞서 먼저 내적인 결함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유다에게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실패는 기록에 나타나는 바에 의해 볼 때 탐욕의 죄였다. 유다에게 있어서 탐욕은 근본적인 죄였으며 이 죄에서, 더러운 샘에서 뿜어 나오듯 너무도 큰 죄가 유발되어 나온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마태오 26, 24)

유다의 생애를 피상적으로 읽게 되면 최후만찬의 밤에 배반이 시작되었다고 보게되지만, 사실 유다의 배반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주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선포하셨을 때였다. 유다의 배반을 처음 알 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최후만찬 때 당신 죽음의 기념물을 설정하시던 때가 아니라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죽음의 기념물을 약속하시던 때였다. 신적인 생명이 인간의 음식이 되는 사건 속에 유다의 배신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 삽입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 이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6, 65)

시계 바늘은 이미 당신 죽음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이후로 주님은 당신을 배반할 자의 존재를 용인하셨다. 생명의 빵에 대한 선포가 유다가 환멸을 느끼게 될 계기가 되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왕국은 유다가 바라던 왕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음 날 주님께서 왕이 되시기를 거부하고 산으로 혼자 피해가신 것을 유다가 알았을 때 그의 불만은 엄청나게 고조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6일 전에 베다니아에서 성대한 만찬이 있었는데 마르타가 시중을 들었으며, 라자로도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보다도 주님의 죽음이 얼마나 임박했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장사를 대비해서 주님께 기름을 발라드렸다. 유다는 기름을 쏟아 붓는 것을 보고 즉시 돈으로 계산했다. 이 주간은 값을 매기는 주간이었다. 왜냐하면 며칠 후에 그는 주님의 목숨을 은전 서른 냥에 흥정하기 때문이다. 유다는 예수께 부은 기름을 근 일년간의 임금으로 계산하였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평균 임금은 그 당시에 하루에 한 데나리온이었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이 향유를 팔았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요한 12, 4-5)

질투심을 평범한 사람들이 천재에게 바치는 찬사처럼 묘사하여 왔던 것처럼 혹평가들은 실패자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다는 지나친 물질주의자여서 행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떤 봉헌물은 너무도 신성한 것이어서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탐욕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배반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흔히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은 탐욕에서 나온다. 유다는 자기가 스승을 곧 배반하리라는 것만을 알고 있었으며, 마리아는 주님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유다는 그처럼 값진 향료를 낭비한다고 화를 내는 척 했지만 요한은 그의 발언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요한 12, 6)

마리아는 열심한 마음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은 자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유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죽음을 몰고 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다의 돈 상자와 마리아의 나르도 향액 상자, 삼십 은전과 이백 냥 은전, 참된 관후함과 가난한 자에 대한 위선자적 관심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유다는 온 세기를 통해 그리스도교 의식의 장식물에 대해 반대하며, 하느님께 최상의 황금과 보석을 바칠 때는 -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재산을 탐하기 때문에 - 가난한 자들에게 약간을 떼어 놓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대변자가 되었다. 혹시 유다가 은전 이백 냥을 가졌다 하더라도 가난한 자들에게는 주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무덤을 향해 나아가신다. 다시는 당신의 몸에 기름을 발라 드릴 기회는 없을 것이지만, 가난한 자들을 봉사할 기회는 많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희생제사를 대비해서 당신께 기름을 바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죽음에 대해 다시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을 때, 유다는 그리스도와 관련되는 일을 하되 빨리 해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반란이 일어날 때는 뭔가 건져야만 한다.

그 때에 열 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 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 주었다.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 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마태오 26, 14-16)

팔백 년 전에 즈가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그 장사꾼들에게 품삯을 주고 싶으면 주고, 말 테면 말라고 했더니, 그들은 은 삼십 세겔을 품삯으로 내놓았다.(즈가리야 11, 12)

희생제물을 구입하기 위해 마련되어 있는 성전 돈으로 주님의 몸값을 치루었다는 것은 아주 상징적이지만, 종의 신분을 취하신 그분이 노예의 몸값으로 팔리셨다는 것은 더욱 상징적인 것이다.

마침내 과월절 명절 때, 제자들의 야심을 꾸짖으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겸손을 가르치신 후 주님께서는 배반을 알려주셨다. 생명의 빵을 약속하시던 드라마의 첫 장면이 배신의 시작이었듯이, 이제 이층 방과 당신 몸인 빵을 주시는 장면은 배신의 종말을 나타낸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당신 사도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배반자가 그들 가운데 있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너희도 그처럼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3, 10)

사도로 뽑히는 것과, 구원이 의무를 준수하여 구원에로 선택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주님의 무리 가운데 이단이나 분열, 타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사도들이 알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시편 40편을 인용하시어 그것이 예언의 성취임을 가르쳐 주신다.

이것은 너희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뽑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와 함께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고 한 성경 말씀은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미리 이 일을 일러 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내가 누구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3, 18-19)

위 글은 아키토펠의 손에서 다윗이 고생한 것을 말하고 있으며, 아키토펠의 불충실은 다윗의 왕손이 겪게 될 고통의 전표(前表)로서 계시되고 있다. 두 가지 경우 다 신체의 가장 낮은 부분인 발꿈치가 부상을 입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창세기에서는 뱀, 즉 마귀의 머리를 여인의 자손의 발뒤꿈치가 부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지금은 마귀가 발꿈치를 이용하여 여인의 후손인 주님께 상처를 입혀 복수를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때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마태오 10, 36)

자기 식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사람만이 그날 밤 구세주께서 느끼신 슬픔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을 행하려는 자나 파괴를 일삼는 자들과 "내통"하려는 자들에게는 훌륭한 모범이나 충고, 우정, 영감도 모두 쓸모가 없다. 주님의 슬픔에 대해 사용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가 유다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유다가 자유롭게 선택한 파멸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몹시 번민하시며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 하고 내놓고 말씀하셨다.(요한 13, 21)

너희들 가운데" 라는 말은 주님께서 발을 씻어주신 자요, 성령께서 오신 후 전세계에 당신 교회를 전파하는 사도직무에로 주님께서 부르신 자요, 그가 옆에 있는 것을 주님께서 너무도 인내롭게 참으셨기에 사도들 중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자였다.

제자들은 누구를 가리켜서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서로 쳐다보았다.(요한 13, 22)

유다는 아주 영리하게도 자신의 간악함과 탐욕을 다른 열 한 명이 모르게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의 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시려고 다른 사도들과 똑같이 자애로운 사랑으로 유다를 대해주셨음이 틀림없다.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이 평화의 왕자를 저 버린 것을 알 게 된 것보다 사도들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마태오 26, 22)

사도들 가운데서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지 않은 자는 아마도 요한이었을 것이다. 그 때 요한은 주님의 성스러운 가슴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런 사실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언제나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 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도 자기는 배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한에게 "누가 배신자냐?" 고 주님께 물어보게 했다. 주님께서 질문을 받으시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빵을 적셔서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가 그 빵을 받아 먹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 갔다. 그 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요한 13, 26-27)

과월절 식사 전반부 중에는 주님과 유다가 똑같은 포도주와 과일 그릇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주님께서 배반의 상징으로 빵을 선택하신 것을 보고 아마 유다는 가파르나움에서 약속하신 바 있는 생명의 빵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주님은 대노하시며 유다를 내쫓으셔야 마땅했을 것으로 보이나, 마지막으로 한번 더 유다를 구하고자 주님은 우정의 빵을 이용하신다.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그 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오 26, 21-25)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무죄를 장담할 수 없기에 모두 "혹시 제가 아닙니까?"하고 묻는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에게 신비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 마음 속에 꽈리를 틀고 잠들어 있는 뱀이 있어서 언제 그 독으로 이웃이나 하느님까지도 깨물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가 배반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자기가 배반자가 아니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유다의 경우, 주님께서 배신을 알고 있다고 밝혀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악을 행하고자 이미 마음이 굳어 있었다. 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그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사악하게 자기 계획을 마무리 짓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앞에 적나라하게 놓여 있는 죄를 보고 무서움에 질려 등을 돌린다. 그들은 "난봉을 부리는 행위"를 욕정이나 부도덕성이라고 하면 아마도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다는 자신의 배신을 혹독하게 명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니체의 말대로 "악이여, 그대는 나의 선이어라" 고 말한거나 다름없었다. 주님께서는 유다에게 신호를 보내셨다. "제가 아닙니까?" 하고 사도들의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빵을 적셔서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가 그 빵을 받아 먹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 갔다. 그 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요한 13, 26-27)

유다는 나중에 보여주는 뉘우침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롭게 악을 행했다. 그리스도 역시 그의 배신을 자유롭게 당신 십자가의 조건으로 삼으셨다. 사악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거슬리는 것처럼 보이며 인생의 양탄자를 짜는데 다른 데로 빗나간 실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모두 어떻게든 하느님의 계획에 잘 부합된다. 거센 바람이 시커먼 하늘에서 불어닥치면, 어디에선가는 그 바람을 이용하여 항해를 하고, 인간에게 유익하게 이용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은 실제로 우정의 동작을 보여주셨다. 빵 조각을 나누어 주는 것은 동방의 관습이기도 하였으며 오래된 그리스의 관습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예로써, 식탁에 앉은 옆사람에게 빵조각을 주는 것은 호의의 표시라고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나중에 게쎄마니 동산에서 하시듯이 유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두셨다.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 두셨지만 유다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탄이 끼어 들어갔다.
유다가 그 빵을 먹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 갔다. 그 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요한 13, 27)

사탄은 자발적으로 원하는 희생물만 차지할 수 있다. 희생제물이 보여 주는 자비와 우정의 표시를 보아서라도 유다는 회개를 했어야 했다. 후에 삼십 은전으로 그의 손이 얼얼해지듯이, 빵이 그의 입술을 얼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몇 분 전에 하느님의 아들이 손으로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이제 주님은 그 손으로 유다의 입술에 빵조각을 넣어 주신다. 몇 시간 후면 유다의 입술은 최후의 배신 행위로 주님의 입술에 키스할 것이다. 당신에게 닥치게 될 모든 일을 알고 계시던 신적인 중개자는 갈바리아 산의 비극의 커튼을 더 활짝 열라고 유다에게 명하셨다. 유다에게 그가 하게 될 일을 빨리 이행하라고 명하셨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제 희생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배반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배반자가 유다라는 사실을 사도들에게 감추셨다. 추문을 - 심지어는 사실이 아닌 것도 - 퍼뜨리기 좋아하는 세속적인 태도와는 완전히 반대로 여기서는 확실한 사실까지도 감추고 있다. 유다가 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다른 사도들은 그가 자선을 베풀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요한 13, 28)

그러나 유다는 사러 간 것이 아니라 팔러 나갔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금고를 맡고 있는 부자에게 봉사를 하려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유다의 사악한 의도를 알고 계셨지만, 당신은 치욕만을 참아받으실 것이기에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여러 경우에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의 결과를 모르시는 것처럼 행동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라자로의 결과를 모르시는 것처럼 행동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라자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시리란 것을 알고 계셨는데, 그 때도 우셨다. 그리고 누가 당신을 믿지 않고 누가 배반할지 알고 계셨지만 주님의 성심은 그 때문에 변하지는 않으셨다. 유다는 최후의 호소를 거절하였으며 그 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절망밖에 없었다.

유다가 밖에 나간 것은 "밤이었다" 이런 표현은 어둠의 행실을 묘사하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세상의 빛을 멀리 떠나는 것이 아마도 속편했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기쁨이나 슬픈 감정과 일치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우울한 기분을 느낄 때 하늘로 구름이 끼어 침침하다. 자연은 유다의 악한 행실에 잘 부합되었다. 유다는 밖에 나가서 하느님의 미소짓는 태양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지옥같은 밤의 어두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도 대낮이 밤처럼 어두워질 것이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요한 13, 31)

주님의 죽음은 순교도 아니고 치욕도 아니며 배신의 피할 수 없는 결과도 아니다. 아버지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당신 아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당신이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다시 하늘이 열리며 거룩한 변모가 이뤄진 산 위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그러나 지금 당신 영혼이 슬픔을 직면하며 당신 육체가 채찍질을 당신 정신이 정의의 왜곡을, 당신 의지가 선의 곡해를 직면하고 있는 이 때에 아들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아들은 부활과 승천을 통해 아버지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8. 유 다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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