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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9. 신적인 애인의 작별인사

[그리스도의 생애] - 39. 신적인 애인의 작별인사


일단 배반자 때문에 받고 있던 제약이 풀리자 스승의 말씀이 한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더욱이 주님을 팔아넘기기 위해서 유다가 떠남으로써 십자가는 주님이 감지할만큼 가까이 와있었다.
주님은 이제 십자가 나무를 지고 계시는 것처럼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만일 당신의 죽음이 영광을 돌려드린다면 그것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당신의 말씀이나, 기적, 병자의 치유로서 성취되지 않았던 뭔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음이 틀림없다.

일생 내내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인류에게 전달코자 노력하셨으나, 설화석고 병이 부숴지듯이 당신 몸이 부숴지고 나서야 당신 사랑의 향기가 우주 전체에 스며들 게 되었다. 주님은 당신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 십자가로부터 하느님의 연민의 정과 용서가 발산한다는 새로운 의미를 당신 죽음에 부여하셨다.이제 주님은 임종하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말하듯이, 그리고 돌아가시는 주님께서 당신 하인들에게 말씀하시듯, 두가지 방법으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 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 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대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 33)

여기서 주님께서는 당신 주변에 모여 있는 자들에게 애정깊은 어조로 말씀하시며 유치한 질문에 하나하나 답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희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어린이와 같은 단계였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이 현재 갈 수 없는 여행길을 간단히 비유로 말씀하신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 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 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대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 33)

주님께서 영광의 구름에 둘러싸여 하늘로 승천하시는 것을 보게 될 때에야 주님과 함께 갈 수 없는 이유를 그들은 알 게 될 것이다. 나중에는 그들도 주님의 뒤를 따르겠지만 먼저 갈바리아 산과 성령강림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의 생애를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 베드로의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13, 36)

호기심에서 한 말이긴 하지만 베드로의 멋있는 성격이 드러난다. 베드로는 스승과의 이별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 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 36)

베드로는 아직 부활을 더 깊이 깨닫기에는 부적절하다. 구세주의 때는 왔지만 베드로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거룩한 변모의 산 위에서 베드로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영광을 얻기를 바랬듯이, 지금은 십자가 없이 하늘에서 스승이신 주님과 함께 있고자 한다. 베드로는 나중에 당신을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답변을 자기의 용기와 충실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질문을 하면서 자신의 용기를 과시했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 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장담하자(요한 13, 37)

이 당시의 베드로의 감정은 스승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를 기회가 왔을 때 베드로는 갈바리아 산에 있으려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를 기회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고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요한 13, 38)

주님의 전능하신 마음은 당신이 바위라고 하신 자의 타락을 생생하게 그려보이셨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후에 베드로는 주님을 따를 것이다. 이런 사실의 의미가 아름다운 전설 속에 보존되어 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네로의 박해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베드로는 아피아 도중에서 주님을 만나서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고 대답하셨다.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가서 현재 성 베드로 대성전이 있는 자리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 성심께서는 그 어두운 시간을 넘어서 당신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성령안에서 하나가 될 날을 내다보셨다. 미래에 대해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순간이 한순간이라도 있었더라면 그것은 지금 현재의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과 사도들이 성체성사를 통하여 일치를 이루는 것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포도나무와 줄기라는 비유를 통해 이 주제를 다시 다루실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치는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있던 그런 일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 시간 이내에 그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완성되는 일치이다. 주님께서 이용하신 포도 나무의 비유는 구약성서에 흔히 나오는 비유이다. 이스라엘은 에집트에서 옮겨 온 포도나무라고 불리웠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선택된 포도나무를 심으셨다고 말하고, 예레미야와 호세아는 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탄식하며 불평을 털어놓는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준 만나와 비교하면 당신을 "참된 빵" 이라고 하셨으며, 초막 명절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비교하여 자신을 "참된 빛" 이라고 하셨으며, 손으로 지은 성전과 비교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성전" 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지금은 이스라엘 포도나무와 비교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 1)

당신 자신과 새로운 이스라엘인 당신 제자들의 일치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일치하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며,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똑같은 수액과 은총이 그들로부터 흘러 나올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 5)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 말라 죽은 가지나 마찬가지다. 포도가지에 포도송이가 달리지만 포도가지가 포도송이를 맺게 한 것은 아니다. 주님만이 포도송이를 열리게 하신다. 주님은 죽음을 맞이하러 가시면서 당신은 살아계시며 그들도 당신 안에 살 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십자가 저 넘어를 내다 보시고 당신께로부터 그들의 생명력과 에너지가 흘러 나오며, 그들 서로의 관계는 기계적이 아니라 유기적이라고 단언하셨다. 주님께서는 외적으로는 당신과 하나가 되겠다고 고백하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자들을 내다보셨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아버지의 정화가 - 이를 주님께서는 칼로 자르거나 다듬은 것으로 표현하겠다 - 더 필요한 자들도 내다 보셨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요한 15, 2)

새로운 공동체의 이상은 성화이며, 칼을 쥐고 계시는 분은 천상 아버지시다. 쓸모없는 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지를 치는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단련이요, 완성이다. 이 쓸모없는 자들은 포도나무에서 제거된다. 주님께서 처음에 사도들을 부르셨을 때 당신 때문에 받아야할 모든 고통을 그들에게 일깨워주셨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 나가시면서, 매일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이전에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단순히 주님의 가르침을 안다고 해서 주님과의 일치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불경스러운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신적인 것들을 배양함으로써만이 주님과 일치가 이뤄지는 것이다.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 6)

자신과 주님의 일치를 강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극기의 결과의 하나는 기쁨일 것이다. 자아부정은 슬픔이 아니라 행복을 가져온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 11)

주님께서는 유다가 입맞추기까지의 몇 시간 동안의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표현하신 기쁨은 고통을 예상하며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인류를 위해 철저하고 완벽하게 순종하는데서 나오는 기쁨이다. 친구에게 값진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인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아버지의 계명으로서 당신의 계명을 지킨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자기 희생의 기쁨은 그들의 기쁨이 될 것이다. 순수히 세속적인 왕국을 기대하던 꿈이 무너져 버린 것을 보고 슬픔에 잠겨 있는 사도들은 기쁨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헤아릴 수 없었다. 나중에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실 때에야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성령 강림 직후 그리스도를 단죄했던 바로 그 의회 앞에 섰을 때 포도나무와 하나가 되기 위해 가지인 자기들이 다듬어 지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기쁨에 가득찰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의회를 물러나왔다.(사도행전 5, 41)

기쁨과 더불어 주님과 일치할 때 얻게 되는 두 번째 결과는 사랑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모든 가지는 포도나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랑은 가지들끼리의 정상적인 관계다. 주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베드로는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물으면서 사랑에 제한을 둔 적이 있다. 일곱 번 용서를 해야할까? 주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이며 수학적인 계산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 서로의 사랑에 있어서 한계가 있어서는 안된다. 아니면 주님의 사랑에 한계가 있었느냐고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셨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었다.여기서 다시 한번 주님께서는 당신이 오신 목적, 즉 구원에 대해 말씀하신다. 십자가가 최우선적이다. 주님께서 당신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십자가를 스스로 지는 자발성이 강조 되고 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목숨을 앗아 가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은 태양의 열과 같다. 태양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는 따뜻하고 행복할 것이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라 하더라도 그 빛은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을 통해서만 주님은 사랑을 보여 주실 수 있으셨다. 주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목숨을 바치는 한 사람의 죽음이나, 조국을 위해 몸바치는 병사의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그 사람은 어찌됐든 종국에는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희생이라 하더라도 갚아야할 빚을 미리 갚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에는 전혀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대신 목숨을 바치는 자들을 "친구" 라고 부르셨지만, 우정이란 하느님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으로서 적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나중에 주님께서 오직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잘 표현했다.

죄인들은 다른 사람이 받을 벌을 대신 받음으로써 서로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벌만이 아니라 죄까지도 마치 당신의 것인양 대신 짊어지셨다. 더구나 주님께서 맞이하시려는 이 죽음은 당신 때문에 죽는 순교자의 죽음과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은 주님의 죽음을 본받으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정해주는 사람 하나도 없이 당신을 조롱하는 군중들 틈에 쌓여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는 것 그리고 죽어야될 필요가 없는데 죽는다는 것은 바로 사랑의 극치이다. 사도들은 그러한 사랑의 심오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베드로는 후에 자기 양들이 로마 박해 때 죽음을 당하러 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며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영예로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 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Ⅰ베드로 2, 19-21)

요한도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댄 채로 그날 밤 들은 것을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요한 Ⅰ서 3, 16)

세상의 미움

주님께서는 당신과 당신 사도들과의 일치에 대해 말씀을 다하신 후, 논리적으로 뒤따르는 다음 주제, 즉 당신의 성령과 당신 생명을 함께 나누지 않는 자들과의 차이에 대해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시자마자 나타날 당신 제자들과 세속간의 대립과 긴장상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구적이며 피할 수 없는 긴장상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믿지 않고 사악한 다수의 무리들과 포도나뭇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이 주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자들 간의 차이를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물리적인 우주나 세계가 아니라 선의 세력에 항거하는 악의 세력의 총체인 정신, 즉 시대정신(Zeigeist)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진복팔단을 말씀하시자마자 바로 세상과 대립하게 되었으며 십자가의 길이 이미 준비되었다. 이제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참으로 당신 제자일진대 그들도 십자가를 지게될 것이라고 주의해주셨다. 십자가가 없다면 주님께 속한 자로서의 지워지지 않는 표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은 너희를 한 집안 식구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 18-19)

주님은 세상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도중에 일곱 번 "미움" 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이 말은 세상의 고집과 증오를 엄중히 증거하는 것이다. 세상은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지만, 세상의 규범과 관습과 사고방식을 보전하기 위해 경건한 자들이나 신적인 자들을 미워해야만 한다. 만일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태양숭배나 동양의 어떤 종파에 가담한다면 그렇게 미움을 받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세상은 자기 편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엄격하게 계명을 지키며 그리스도를 따르면 미움을 받게 될까? 물론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선택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사도들은 이러한 미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은 고통을 받지 않았으며 자기들의 생업인 고기잡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 보내시자 악의에 찬 세상의 미움을 완전히 느끼게 되었다. 최후 만찬 때 이 말씀을 들은 야고보는 후에 체험과 지식을 통해 그 말씀을 반복할 것이다.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느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야고보 4, 4)

요한도 세상이 그리스도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줄 것이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 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요한 1서 2, 15)

주님께서는 세상이 당신을 미워한 것처럼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하인은 종보다 결코 더 위대할 수 없다. 사도들은 당신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내 제자라 해서 이렇게 대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고 있다.(요한 15, 21)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회개시킬 수 있다고는 말씀 하시지 않았다. 대중들은 주님보다는 세속의 정신을 더 많이 따를 것이다. 주님의 생명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주님의 운명을 같이 나눈다는 것이다. 세상이 주님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 악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죄가 없고 선하기 때문이다. 선은 미움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미움이 스스로 드러나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한 사람의 생애가 순수하고 거룩하면 거룩할수록 악의와 미움을 더 많이 받게 된다. 평범한 것만이 살아 남는다. 아직도 악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무죄한 자는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병든 눈이 빛을 두려워하듯이, 악한 양심은 자기를 비난하는 선을 두려워 한다. 세상의 미움은 순수하지도 무죄하지도 않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번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내가 일찍이 아무도 하지 못한 일들을 그들 앞에서 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그들은 나와 또 나의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이리하여 그들의 율법서에 '그들은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이루어졌다."(요한 15, 22-25)

그들이 주님을 미워한 것은 곧 아버지를 미워한 것이었다. 악은 혼자 독립해 존재하지 못하고 항상 선에 기생한다. 순수한 미움은 선과의 접촉에서만 유래한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지옥이 시작하지만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는 어느 면에서 당신 복음은 인간들이 그것을 고의적으로 배척함에 따라 오히려 인간의 죄를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역사를 통해 죄와 악은 항상 있어 왔다. 카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박해했으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었지만 이 모든 악은 주님께서 당하실 엄청난 악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죄를 범한 자들은 그 죄에 따라 벌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는데, 이제는 빛을 거슬러 죄를 범한 정도에 따라 벌이 결정될 것이라고 덧붙이신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새로운 척도를 가져 오셨다. 가파르나움은 왕중의 왕이시요, 만민의 주님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최후 심판 날 가파르나움보다도 소돔과 고모라가 훨씬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 대한 적의는 주님께서 살아계실 동안만이나 사도들이 살아있을 동안만이 아니라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죽었을 때 아무도 주먹을 불끈 쥐고 그의 무덤을 내려치려하지 않았다. 폭군에 대한 증오는 폭군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어느 누구도 부처를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증오는 계속 살아 있다. 주님은 "마찬가지로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경고는 사전에 준비를 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너희를 회당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요한 16, 2)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비판하다가 나중에는 주님의 제자들을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개종하기 전에 바오로가 했던 것처럼, 그들은 신앙심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마태오는 이디오피아에서 칼로 순교를 당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 거리를 끌려다니다 죽음을 맞이했고, 루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브나무에 교수형을 받았으며,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매달려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했으며, 소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져 아래에서 매맞아 죽었다. 필립보는 프리지아에서 기둥에 목매달려 죽었으며, 바르톨로메오는 산채로 껍질이 베껴져 죽었으며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까지 박해자들에게 설교를 하였으며, 토마는 창에 찔려 죽었으며, 마지아는 먼저 돌로 맞다가 참수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그들은 최후만찬 석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분명히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요한 16, 4)

주님께서 번민하시던 밤에 구세주의 관심을 끄는 두 번째 주제는 성령이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새로운 영이 세상에 주어질거라고 오래 전에 예언하였다.<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키엘 36, 26-27)

아담의 육체가 빚어졌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다. 세키나(Shekinah)와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에 깃들기 전에 이스라엘의 초막과 성전을 완성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께서 인간안에 머무시기 전에 인간은 새롭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에제키엘의 예언은 성취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요한 세례자는 그리스도에 대해 두 가지를 예언하였다. 첫째 주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 둘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피를 흘리시는 것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고, 성령의 은사는 당신께 순종하며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께서 주님 위에 내려 오셨다. 주님은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전에 고통을 당하셔야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수난이 시작하던 밤에 성령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하실 때, 주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이 예배할 때가 왔다고 하셨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요한 4, 23)

"성령으로" 라는 주님의 말씀은 외적인 의식과 그와 대조되는 내적이며 감성적인 종교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연적인 정신과 그와 대조되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고양된 예배와의 차이를 의미하였다. "진리로"라는 말은 "성실하고 정직하다" 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다. 나중에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몸과 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암시하신 바는 성령을 주시기 전에 당신께서 먼저 하늘로 올라가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며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요한 6, 63-64)

주님께서는 다음 날 당신이 돌아가실 것이며 다시는 육안으로 당신을 보지 못할거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사도들이 영광을 받으신 그 분을 육안으로 보게 될 부활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가야만 한다. 주님을 못보게 되면 육체를 지니고 계신 주님보다 더 큰 축복을 보상받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그들을 안심시키신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는 짧은 기간동안에 그들이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 16)

이제 주님께서는 사도들의 정신 수준으로 내려오신다. 사도들의 주된 관심사는 주님께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간만 지나면 이 말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체포되신 후 사도들은 그동안 잠시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신 이 말씀은 곧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뜻이기에 사도들은 심한 동요를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얼마 안가서'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하고 말하였다.(요한 16, 18)

주님은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자함을 알고 계셨다. 그들의 슬픔과 놀라움은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이 지상에 메시아 왕국을 수립하리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이 무너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사도들은 슬픔에 빠질 것이지만 그 시간은 주님께서 죽음을 지배하는 능력을 보여 주시고 아버지께로 가실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님은 사도들을 안심시키셨다. 주님께서 당신 때를 맞이하시면 그들은 슬퍼할 것이다. 주님의 적들은 기뻐할 것이다. 세상은 주님을 영원히 없애 버렸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께서 뽑으신 자들의 슬픔은, 십자가가 영광을 선행해야 하기 때문에,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그들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어머니가 되는 고통과 기쁨의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 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지금은 너희도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 21-22)

지혜로운 섭리에 의해 어머니의 해산의 고통은 아이를 보는 기쁨에 의해 사라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의 선구자이다. 주님과 영광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과 함께 고통을 나눠야 한다. 현재는 더 이상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지만, 그들의 기쁨은 영적인 자극을 통해 이뤄지며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사도들이 받게 될 이 궁극적인 기쁨의 본질을 구세주께서는 당신이 보내실 위로자 또는 협조자라는 말로 설명해주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 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 오겠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 16-20)

다른 위로자 또는 "사도에게 친구가 되어 줄 다른 분" 이 올 것이다. "다른" 이란 말은 본질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위격이 구별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그들의 위로자셨으며, 그들 곁에 계셨으며, 그들과 하나가 되셨으며 당신을 통해 사도들은 용기와 힘을 얻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떠나신다니 그들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느님과 함께 옹호자를 그들에게 약속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느님과 함께 옹호자가 되실 것이며, 땅에서는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하느님을 변호하고 그들의 옹호자가 되실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신적인 비밀은 그들이 지금은 당신을 잃어 버리지만 곧 성령께서 오시는 더 큰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에 대해 이중적인 계시를 해주셨다. 즉 아들은 사람들 가운데 살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원모습을 상기 시켜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며, 아울러 인간들이 회복되어야 할 본 모습이라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보내시며, 성령은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의 몸을 성전으로 만드신다.

주님께서 떠나시는 게 좋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만이 성령께서 오시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께서 사도들 가운데 그대로 남아 계신다면 주님은 본받아야할 본보기밖에 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떠나시어 성령을 보내시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아야할 참된 생명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 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 7)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 주의 인성이 영광중에 하늘로 돌아가셔야 했다. 주님께서 가시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 될 것이다. 첫 인간의 타락으로 그 후손들이 타락하게 되었듯이, 인자의 승천으로 당신께 접목된 모든 이들이 승천하게 될 것이다. 주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은 하느님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주님께서 가시지 않았더라면, 다시 말해서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냥 그대로 유대인일 것이며, 이교도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 놓여 있을 것이며, 모든 사람이 죄와 죽음의 지배를 그대로 받고 있을 것이다. 영적인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것을 제거해야만 한다. 주님께서 계속 지상에 남아계신다면 한정된 지역에만 계시게 되었을 것이다.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주님은 당신과 하나가 될 모든 사람들 가운데 계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신체적으로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은 밖에서 안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셨지만, 성령을 보내시면 내부에서 밖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실 것이다. 주님의 능력을 가진 자들은 지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중적으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처음은 아버지로부터 받고 다음은 성령으로부터 받으실 것이며, 처음에는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다음에는 땅 위에서 받으실 것이다. 처음은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며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나에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 14-15)

주님께서는 당신 인성이 성부 우편에 앉을 때 영광을 받게 되지만, 이러한 천상의 영적인 영광은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사도들 안에 거하시며 활동하심으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계시하셔야 비로소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육체를 보고 알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필요한 조건은 순종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 15-16)

그리스도께서는 30년동안 천상 아버지와 양부 요셉과 어머니에게 순종하신 후에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후에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두 번째 행위는 신적인 "필연성"에 따라 십자가를 지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에게 순종함으로써 성령을 보내셨듯이 당신 신도들은 당신께 순종함으로써 성령을 받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지시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안에 머무르셨다. 출애굽기 마지막 두 장을 보면 모든 것이 주님께서 명하신대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이 18번이나 나온다. 이제 주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성령의 성전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시면서 당신 계명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똑같은 조건을 설정하셨다.

베드로는 자신이 오순절 직후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말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려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사도행전 2, 33)

성령께서는 옛 진리를 상기시킴으로써 새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쳐주실 것이며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면서 옛 진리를 상기시켜 줄 것이라고 주님은 이어  설명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진리는 미숙한 상태로써 아직 완전하지 못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셨을 때 놀라울 정도로 기억이 새로워지고 예비지식을 초월하는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구약이 밝히 드러났듯이,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의 생애가 밝히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을 강화시키는 역할은 그리스도께서 교사로서 계몽해주시는 역할과 직접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순수한 복음의 형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성서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사도들을 통해 당신 진리가 밝혀지고 발전하며 전개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려주셨던 것처럼 성령은 아들을 알려 주실 것이며, 아들이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려드렸듯이 성령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 드릴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내려 오신 후에라야 사도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것들을 기억하고 십자가와 구원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낙원 동산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하나는 신적인 생명의 나무였고 또 하나는 선악을 아는 나무였다. 하느님의 계획은 사람이 생명의 나무를 먹고 영원히 살도록 생명의 나무와의 친교를 통해 당신과 함께 남아있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사탄은 인간에게 평화를 얻는 길은 선악을 아는 나무를 통해 얻게 된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안에 악이 있으면 그 악이 자기를 차지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선악을 아는 잘못된 길에 들어섬으로써 인간은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생명의 나무가 다시 갈바리아 산 위에 세워져 다시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제 생명의 나무는 선악을 아는 나무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진리자체의 나무가 되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으로부터 나온 진리의 성령은 진리를 영혼 안에 들여보내서 실제로 머물 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연적인 진리는 영혼의 표면에 머물지만 신적인 진리는 영혼 깊숙이 파고 든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들을 알아야만 하며, 아들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을 모셔야만 한다. 성령은 이렇게 말씀한 아들을 계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

만일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 교사뿐이었다면 인간은 오래 전에 거룩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도 성현들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시대까지 인류에게는 수 많은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인간의 정신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도 안되며 진리의 성령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적인 진리들은 그러한 진리를 생활함으로써만이 알 수 있게 되며 신적인 진리들은 성령 안에서 삶으로써만이 생활할 수 있다.

성령을 약속하실 때 주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네 가지 진리를 단언하셨다. 첫째,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 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말씀이요, 하느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영원으로부터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주님은 "내가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당신의 신성을 인간에게 계시하심과 당신의 육화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나는 세상을 떠난다"는 말씀은 세상이 당신을 배척함과 당신의 고통과 수난,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제 주님은 사도들에게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고 하셨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로부터 주님의 부활과, 아버지의 영광으로 승천, 주의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주님은 계속해서 자세히 설명하신다.

성령의 삼중(三重)사명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요한 16, 8)

위의 성서 구절은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게 될 삼중적인 승리-물리적 승리가 아닌 도덕적 승리-를 그리고 있다. 한편에는 신적인 진리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그릇된 세상의 정신이 있다. 성령의 사명은 세 가지 영역에서 세상이 그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즉 죄에 대한 세상의 관점, 정의에 대한 세상의 관점, 심판에 관한 세상의 관점이 그 것이다.

그분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며 (요한 16, 9)

성령이 첫 번째로 지적하시며 보여 주시는 것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진리다. 죄는 법을 어겼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사랑하는 자에게 악이 행해진 것을 볼 때 비로소 악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형을 낳은 불신은 본질적으로 죄다. 죄란 완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진리를 믿게 하는 길은 대중적인 호소를 하는 것이지만, 성령은 그들의 죄를 지적해주심으로써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신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는 원칙적으로 죄로부터 구해주시는 구원자요, 구세주시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성령의 직무는 세상이 주님을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세상에 죄를 지적해 줄 것이다. 믿지 않거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죄로부터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신성에 대한 적대감이 확연히 드러난다. 사람들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자체가 감춰져 있는 죄를 드러내준다. 성령 외에 인간에게 죄를 지적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양심도 때로는 질식할 수가 있기 때문에 죄를 지적해 줄 수 없고, 여론이라고 하는 것도 때때로 죄를 정당화시켜주기 때문에 죄를 지적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밝혀주시는 가장 큰 죄는 무절제나 탐욕, 육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죄인이 구원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뉘우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의 성령이시다.

구세주를 배척하는 것은 선보다 악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십자가형은 각자 자기 생애의 역사를 자기의 구원으로 이해하던가 아니면 자신의 파멸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자서전이다. 죄를 심리학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의 과장으로 보일 뿐이다. 사막의 모래나 동물의 피나 물이 인간을 정화시킬 수는 있지만, 일단 무한히 거룩한 분의 눈에 죄가 띄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러한 비극적인 공포에 대처할 수 있고 상응할 수 있다.

두 번째 성령의 고발은 정의와 관련되어 있다.
내가 아버지께 돌아 가고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가르치실 것이고 (요한 16, 10)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아버지께 승천하는 것이 마음의 올바름과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지 처음에는 지나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죄에 관한 말씀을 덧붙이신다. 세상은 죄를 법을 어긴 행위로만 볼 뿐 불신앙으로는 보지 않는 것처럼 정의도 박애의 행위로 볼 뿐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의 우편에서 얻게 되는 의로움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일단 주님께서 승천하시면 성령께서는 세상이 주님을 죄수요 악한으로 생각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보여 주실 것이다. 승천은 세상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뒤바꾸어 놓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당신 우편에 들어 올리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비난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주님을 배척함으로써 세상은 불의를 저지른 것이다.

일단 자신의 죄를 확신하면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죄에서 구해 주셨음을 확신하면 그리스도가 자신의 정의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인이 아닌 사람에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성전 앞에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정의를 확신하였으며, 주님을 사형에 처한 성전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정의를 확신하였다. 성금요일은 그리스도에게 죄가 있다고 보고 그리스도를 재판한 자들을 옳다고 보는 것 같았지만 오순절과 성령 강림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의롭다고 보고 그분을 재판할 자들을 죄인으로 판단할 것이다. 주님을 거부한 자들에게 의로움은 어느 날 엄청난 정의로 나타날 것이고,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생명과 하나가 된 죄인들에게 의로움은 자비로 나타날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요한 16, 11)

마지막 세 번째 지적사항은 심판과 관계있다. 죄와 정의가 충돌하였을 때, 죄를 파멸시키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심판을 받는 자는 제상을 지배하는 자로서 사탄, 즉 세상의 왕이다. 세상의 왕이 심판을 받은 것은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고작해야 육체를 지닌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기 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악은 다시는 절대 승리할 수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후 하느님의 정의를 대하였으며, 그 죄에 대한 심판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었다. 대홍수로 인류의 죄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직면하게 되었으며 홍수로 심판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에도 이러한 출애굽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뤄졌다. 그러므로 이제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주님의 생애와 죽음과 그리고 악을 쳐이긴 궁극적인 승리에 내재해있는 심판을 깊이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눈으로 볼 때는 죄가 없어 보이겠지만 주님에 의해 시각이 정화된 자들의 눈에는 세상은 유죄로 보일 것이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완성된 대 (大) 드라머의 참된 본질을 사람들에게 밝혀주실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9. 신적인 애인의 작별인사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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