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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6.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의 생애] - 36. 최후의 만찬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들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잊을 수가 없으며, 죽음에 있어서도 어떤 것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있다. 따라서 현충일은 조국의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유란 법정상 속물이 아니라 생활이다.
자유란 한 번 받으면 오래된 그림처럼 아무런 노력없이 계속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양육되고 보호되며 보전되어야 하듯이, 자유 또한 각 세대마다 다시 쟁취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죽기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생명에로의 부르심에 대한 훼방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주님께서 태어나실 때에도, 주님의 어머니는 그가 죽으러 왔다는 것을 상기하였다. 지금까지 세상의 그 어떤 어머니도 아기가 갓 태어나자마자 죽음이 그 음흉한 손길을 내뻗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주님께서 아직 갓난 애기였을 때 시므온 노인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그분은 "반대의 표징" 이 될 것이며 고의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반대를 불러 일으킬 표지라고 말했다. "반대를 받는다" 는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시므온의 팔이 사라지고 십자가의 팔이 대신해서 주님을 죽음으로 감싸는 것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주님께서 두 살도 채 되기 전에, 헤로데 왕은 천둥처럼 지축을 흔드는 기마병을 보내어, 번개처럼 번득이는 칼날로 아직 왕관의 무게를 지탱하지도 못할 만큼 약한 갓난 왕의 목을 치고자 하였다.

주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사망 기념일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은 인간이시며 또 하느님이셨으며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마다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정확한 당신 사망 기념일을 설정하시어 사람들의 우연한 기억에 맡겨두지 말아야 하지 않으셨을까? 바로 그 날을 주님은 최후만찬을 거행하는 밤에 제정하셨다. 우리의 추도기념일은 죽음을 예견한 병사들이 세운 것이 아니다. 주님의 추도 기념일은 주님께서 병사들처럼 죽어 묻히시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기 때문에 제정한 것이며, 이 사실은 중요하다. 주님의 추도기념은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 될 것이며,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영적인 자유를 기념하는 희생된 어린 양의 기념일이 될 것이다. 특히 주님의 추도기념일은 신약의 기념일이 될 것이다.

계약이나 성약은 협약이나 맹약, 동맹이며 성서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약속을 말한다. 최후만찬 때 주님은 신약, 즉 계약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계약은 구약과의 관계에서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과 맺으실 계약은 중개자인 모세를 통해 이뤄졌다. 계약은 피로써 체결되었는데 피는 생명의 상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피를 섞거나 같은 핏 속에 손을 넣는 자들은 동일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이 충실히 계약을 지킨다면 축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다. 구약의 주요 단계로는 후손을 약속한 아브라함과의 계약과 다윗과의 계약과 왕권의 약속, 그리고 모세와 맺은 계약을 들 수 있으며, 모세와의 계약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 주시고 당신의 제관왕국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 권능과 사랑을 보여 주셨다. 히브리인들이 에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모세는 새로운 의식에 대해 지시를 받았다.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신 후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빨리 풀어주게 하시려고 각 이집트 집안의 장남들을 쳐 죽이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 양을 봉헌하고 솔가지 같은 것으로 그 피를 찍어 문간에 피로 표시를 함으로써 그러한 재앙을 피했다. 하느님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 따라서 어린 양은 목숨을 노리는 천사가 Pesach, 즉 건너감을 말하며, 그것은 안전을 보장해준 "통과"였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 의식을 해마다 계속 거행하도록 명하셨다.
출애굽기가 언급하고 있는 살해된 파스카 양의 의식이 있은 후 하느님께서는 모세와의 계약을 이행하시어, 이스라엘을 한 국가로 만드셨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탄생한 것이다. 계약은 여러 가지 희생제사로 해결되었다. 모세는 열두 기둥으로 된 제단을 세웠다. 모세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 반은 제단에 붓고, 나머지 반은 열 두 지파와 백성들에게 부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려 주며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와 계약을 맺으시는 피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계약의 조문이다." 하고 선언하였다. (출애굽기 24, 8)

피를 제단에 부은 것은 계약의 한쪽 당사자인 하느님을 상징하고 열 두 지파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것은 상대편 당사자를 나타내며, 둘 다 똑같은 피를 나눈 자가 되어 성사적 일치를 이룬다.
이러한 이스라엘과의 계약은 하느님께서 좀 더 완벽한 계시를 해주심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귀양살이를 한 것은 이스라엘이 계약을 지키지 않은 벌이라고 나중에 예언자들은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옛 계약을 갱신하였듯이 만민을 참여 시키는 새로운 계약(신약)이 올 것이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이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 31, 33)

최후만찬과 십자가형은 과월절 동안에 일어났으며 모세가 구약을 중개했듯이 이 동안에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은 신약을 중개했다. 모세가 동물의 피로 구약을 인준하였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진짜 파스카의 어린 양이신 당신의 피로 신약을 인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오 26, 28)

이제 당신께서 높이 들어올려질 시간이 다가와 스물 네 시간도 못되 당신 자신을 넘겨 주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열 두 제자를 당신 주위에 불러 모으셨다. 주님은 엄숙한 자세로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주님의 희생 죽음으로 인준된 신약이 당신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선언하셨다. 이렇게 해서 모세나 메시아 이전의 모든 희생제사는 폐기되고 완성되었다. 구약에서와 같이 아버지께 봉헌된 제물을 삼키기 위해 창조된 불이 내려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불은 주님의 부활의 영광과 성령강림의 불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죽음은 주님께서 오신 이유이기에 주님은 사도들과 그 후대들을 위해 당신의 구원의 기념행위를 제정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구원을 약속하셨다.

또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루가 22, 19)
주님께서 "이는 내 몸을 나타내고 상징한다" 고 하시지 않고 "이는 내 몸이다" 고 하셨으며, 이 몸은 수난을 당하실 때 부서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당신 손에 포도주를 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오 26, 28)

다음 날 오후에 당하시게 될 죽음을 주님은 상징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그들 앞에 보여 주셨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몸에서 피가 다 빠져 나감으로써 돌아가실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빵과 포도주를 함께 축성하지 않고 따로 축성하심으로써 피와 몸이 분리되어 돌아가시게 됨을 보여 주셨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주님은 다음 날 십자가 위에서 사제와 동시에 제물이 되신 것처럼 지금도 사제와 희생제물이 되신다. 구약시대나 이교도들 사이에서는 염소나 양과 같은 희생물은 그러한 희생물을 봉헌하는 사제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지금의 성체성사 행위와 십자가에서 사제로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따라서 주님은 스스로가 희생제물이시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예언자 말라기의 말이 성취된다.

나의 이름은 해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내 이름은 뭇 민족 사이에서 크게 떨치고 있다.(말라기 1, 11)

이어서 주님은 당신 죽음을 계속 기념하도록 명하셨다.
또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루가 22, 19)

반복하라!  쇄신하라!  세상의 죄를 위해 봉헌된 제사를 세기를 통해 내려 오면서 계속하라!
왜 주님은 기념의 요소로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셨을까? 먼저 빵과 포도주처럼 일치를 잘 나타내주는 두 가지 실체를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빵은 수많은 밀알로 만들어져 있고 포도주는 수많은 포도알로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두 번째로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두 가지 실체도 빵과 포도주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되는 것도 없다. 밀은 혹독한 겨울을 지나야 하며 갈바리아 산과 같은 멧돌 아래서 부숴져야하고 빵이 되기 전에 정화의 불을 견뎌야만 한다. 포도는 게쎄마니와 같은 포도압축기에 들어가 포도주가 되기 위해 으깨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을 상징하며 구원의 조건이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죽지 않으면 당신 안에서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로는 자연 속에서 그 어느 두 실체도 빵과 포도주보다 인간을 양육하는데 더 전통을 가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빵과 포도주를 제단에 봉헌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을 때 그것은 인간의 살과 피가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손에 드시고 그것을 당신 자신으로 변화시키셨다.

그러나 주님의 추도기념은 제자들이 아니라 당신께서 직접 제정하셨으며, 죽음에 의해 정복되시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부활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구속적 죽음을 고대하신 것처럼 세상이 완성될 때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회고하기를 바라셨다. 멋대로 당신 기념을 제정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주님은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당신의 구속적 죽음을 기념하고 선포하도록 명하셨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것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기념을 앞으로 공표하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은 십자가를 고대하는 것이었으며, 사도들이 하던 일이나 그 이후로 미사중에 계속되어 온 일은 주님의 구속적 죽음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성 바오로가 말한 대로 그들은 세상을 심판하시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빵을 쪼개시어 당신의 육체가 부숴짐을 보여 주셨으며 당신께서 자유로운 의지로 희생물이 되셨음을 보여 주셨다. 사형집행자들이 멋대로 포악하게 당신 몸을 부수기 전에 주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넘겨주시어 당신 몸을 부수셨다.

나중에 사도들과 교회가 이러한 기념을 반복할 때,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성목요일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유일한 십자가상의 구원행위라는 제사를 주셨다. 그러나 주님은 새로운 당신의 현존양식을 주셨다. 그것은 새로운 제사가 아니다. 제사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당신 제사를 바치셨다. 부활과 승천 후에 신적인 명령에 따라 스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통해서나 사도들에 의존하여 천상 아버지께 제사를 바치실 것이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를 기념할 때에는 시간상으로는 새로운 순간에 드리는 것이요, 공간적으로는 새롭게 현존시키는 것이다. 주님의 명에 따라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갈바리아 산의 피와 제사로 아버지께 드리신 것을 피흘리지 않고 나타낼 것이다.

빵을 당신 몸으로 변화시키시고 포도주를 당신 피로 변화시키신 후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코 14, 22)

그러한 친교를 통해 사도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봉헌되었다. 모든 사랑은 일치를 갈망한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랑의 최고 정점은 부부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듯이, 신적인 차원에서의 최고의 사랑은 친교를 통해 영혼과 그리스도가 일치하는 것이다. 나중에 사도들과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기념을 새롭게 하며 주님을 먹고 마실 때의 그 몸과 피는 그전에 자기들 앞에 살아계시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간구하시는 영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탁월하고 영원한 십자가의 구원은 천상 그리스도에 의해 시간의 흐름속에서 적용되고 현실화된다.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 몸과 피로 변화시키시고 사도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을 때, 음식과 음료가 육체에 베풀어 주는 일은 인간의 영혼을 위해 하신 것이다. 식물이 스스로 희생하여 뿌리부터 뽑히지 않으면 인간을 먹여 살리거나 인간과 친교를 나눌 수 없다. 더 높은 존재와 친교를 나누기 전에 가장 낮은 존재의 희생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주님의 죽음이 신비롭게 제시되고 나서 친교가 이뤄졌다. 더 낮은 존재가 더 높은 존재로 변화된다. 화학적인 것이 식물로 변하고 식물은 동물로 변하며, 화학적인 것과 식물, 동물은 사람으로 변화되고, 인간은 친교에 의해 그리스도로 변화된다. 부처의 제자들은 그의 생명으로부터 아무런 힘도 얻지 못하며 오직 그의 경전에서 힘을 얻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은, 영광 중에 살고 계시며 제자들에게 당신 희생의 은총을 쏟아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생명만큼 중요하지 않다.

주님의 일생을 통해 지속적으로 울리는 유일한 음조는 당신의 죽음과 영광이었다. 바로 죽음과 영광을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주님께서는, 죽을 때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것, 즉 당신 자신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오로지 신적인 지혜만이 그러한 기념물을 생각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그러한 일을 맡겨두었더라면 당신 구원의 드라마가 엉망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하느님의 길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어 보이는 주님의 죽음을 사람들은 두 가지로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적 죽음을 링컨의 암살처럼 역사상 한 번 일어난 드라마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주님의 죽음은 구원이 아니라 한 인간의 비극적 종말에 불과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있으며 주님께서 명하고 지시하신 기념행위를 통해 십자가의 공덕을 쏟아 부어주심과 주님의 부활을 잊고 있다. 이런 경우에 주님의 죽음은 현충일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주님의 죽음을 한번 일어난 드라마지만 그 세부사항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만 가끔 기억해야 할 그런 드라마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그들은 당시에 살았던 드라마 비평가들에게 돌아가 그들의 이야기, 즉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를 읽을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기록한 것처럼, 주님의 죽음을 문학적으로 상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주님의 죽음을 보통 사람의 죽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누구한테도 당신 구원에 대해 기록하라고 하시지 않았지만, 최후만찬 때 주신 명에 따라 당신 죽음을 갱신하고 적용하고, 기념하며, 계속 이어가도록 사도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위대한 갈바리아 산의 드라마가 한번만 행해지지 않고 당신이 원하신 모든 세대에 행해지기를 바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구원에 대해 읽는 독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갈바리아 산의 재현 속에서 주님의 몸은 피와 더불어 그들의 몸과 피를 봉헌하며,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다" 고 하신 주님과 함께 말하며, 은총에 따라 살기 위해 보다 비천한 본성에 대해 죽으며, 가족관계나 직업, 의무, 신체적 용모나 재능과 같은 인생의 외형이나 종류에 개의치 않고 그들의 지성과 의지와 실체, 즉 참된 자아가 그리스도로 변화될 것이다. 그들을 내려다 보시는 천상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 안에 있는 그들을 보실 것이며 그들의 제사가 아들의 제사와 하나가 되어 있으며 그들의 극기가 아들의 죽음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아시기에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아들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6. 최후의 만찬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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