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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7. 종들의 종

[그리스도의 생애] - 37. 종들의 종


오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발을 닦는 의식이 두 번 벌어진다. 수난 전 토요일, 회개하는 마리아가 주 구세주의 발에 기름을 발라 드렸으며, 그 다음 주 목요일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주님께는 불결한 점이란 전혀 없었기에 나르도 향유로 당신 발을 발라드렸지만, 제자들의 발에는 세속의 먼지가 너무 많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그 발은 씻어주어야만 했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요한 13, 1)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만물을 당신 손안에 맡겨 주시고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던 순간을 언뜻 회상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갈 때다. 주님의 전교활동의 전반부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 함께 보내셨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실 것이다.

떠날 때는 언제나 애정이 불붙기 마련이다. 남편이 아내를 놔두고 먼 여행을 떠날 때는 집안에 계속 있을 때보다는 훨씬 자상한 열성을 보여준다. 종종 주님은 제자들을 "나의 형제", "나의 양", "나의 친구", "나의 것"이라고 부르셨지만, 지금은 극히 친밀한 관계를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을 "당신 자신의 것" 이라고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곧 떠나시지만 당신 사도들은 남아서 당신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너무도 컸기에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막 열리는 모든 하늘의 영광도 그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어린 사랑을 전혀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들은 서로 더 다투었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 하는 것을 보시고(루가 22, 24)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기념물을 주시고자하며 당신의 사랑스런 마음이 유다의 배신으로 고통을 당하게 될 바로 그 시간에, 그들은 서열에 대해 헛된 논쟁을 벌인 것을 보면 그들이 주님의 희생을 우습게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십자가를 기대하고 있는 데 그들은 십자가가 자기 희생이 아닌 것처럼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야심에 눈이 어두워 사람은 권력을 행사해야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며 지배에 대한 주님의 모든 교훈을 망각했다. 이방인들은 그러한 것을 위대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타인에 대한 무한한 봉사를 위대함으로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 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루가 22, 25-27)

주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사도들이 왕이라고 인정하셨다. 주님께서는 상류계급을 갈망하는 그들의 본능을 부인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위대한 자가 가장 비천한 자가 되는 겸손한 귀족계급이 되기를 바래야할 것이다. 이러한 교훈을 그들에게 철저히 심어주기 위해 주님께서는 당신이 이 식탁의 주인이요, 스승이시지만 모든 우월감을 모두 떨쳐 버리시고 그들 가운데 비천한 자로 자리하고 계심을 상기시켜 주셨다. 여러 차례 주님은 당신이 봉사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봉사를 하러 왔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짐을 대신 져주기 위하여, 특히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이사야가 예언한 "고통받는 종" 이 되셨다. 그들을 종으로 삼으시겠다고 이전에 하신 말씀을 주님은 이제 모범을 보이시어 강력하게 뒷받침하신다.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요한 13, 4)

주님의 세부적인 모든 행위가 매우 인상적이다. 일곱 가지의 두드러진 행동이 언급되고 있다. 즉 일어서서, 옷을 옆에 놓아 두시고, 수건을 집어서 허리에 차시고, 물을 부우시고,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어떤 왕이 먼 지방에서 돌아 오기 바로 전에 신하 한 명에게 겸손하게 봉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서울로 다시 돌아가니까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낮추는 자는 들어 올림을 받으리라" 는 교훈으로, 바리사이와 세리의 이야기와 같은 비유를 통하여, 어린 아이를 당신 팔에 안으시던 모범을 통하여,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 낮추심으로 겸손을 가르치셨다.

이 장면은 주님의 육화를 요약하고 있다. 아버지와 친밀한 본성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천상 잔치에서 일어나시어 주님께서는 당신 영광의 옷을 옆에 벗어 놓으시고, 당신 신성을 마리아께서 취하신 인성의 수건으로 두루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흘리신 당신 피인 재생의 대야물을 부으시고, 당신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공덕을 통하여 당신 제자들과 신도들의 영혼을 씻어 주기 시작하셨다. 성 바오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비 2, 6-8)

제자들은 움직일 줄 모르며 놀라움에 넋을 잃고 있었다. 여기서와 같이 신인(神人)께서 겸손을 보여 주실 때 겸손을 통해서만이 인간이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들의 마음속 깊이 사랑이 없었다면 각자 대야에서 발을 빼냈을 것이다. 이렇게 침묵 중에 겸손하게 계속 발을 닦아 주시다가, 마침내 주께서 베드로에게 오셨다. 그때 베드로는 가치가 전도되고 있음을 마음 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주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요한 13, 6)

베드로는 십자가가 요구하는 굴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위해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러한 굴종의 모순에 대해 항의하였다. 똑같은 마음의 상태를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론 베드로는 주님의 지배권을 순수하게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 영광은 고통이 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처럼 자신있는 사람이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교훈은 자기도 아직 뭔가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회개의 눈물로 자기 뺨을 적실 때가 있는데 베드로도 몇 시간만 있으면 회개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으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게 할 때에야 그러한 눈물은 흘러내릴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너는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 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 7)

십자가의 철저한 굴종이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은사로 영광스럽게 되고 나서야 베드로는 이러한 사랑과 겸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드로가 전에는 십자가를 비난하더니, 지금은 십자가로 인도하는 굴종의 본보기를 비난한다. 여러 가지 신비는 미래에 밝혀질 것이며, 현재로써는 일부밖에 알 수 없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어린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무한하신 하느님의 행위를 어찌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겸손한 사람은 기다릴 것이며, 기다린다는 것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행위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설명해 주시지 않고 당신 명에 따르라고만 하셨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 명에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나중에는 모든 것이 밝혀지리라고 약속하셨다. 베드로가 빛을 따르자 그 빛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만약 그 빛에 등을 돌렸더라면 어둠은 점점 더 커졌을 것이다. 아기가 칭얼대도 어머니가 아기의 얼굴을 씻어 주듯이 베드로는 여전히 반대하지만 스승께서는 깨끗하게 씻어주셨다. 어머니는 아기가 자기가 하는 일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사랑의 일을 마무리 짓는다. 나무는 다듬어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땅은 쟁기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베드로는 이와 같은 엄청난 종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말하였다.

베드로가 "안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사양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하셨다.(요한 13, 8)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참된 겸손은 당신의 굴종을 반대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깨우쳐 주셨다.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이미 자신을 낮추시어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주고자 하셨는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께서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주시는데 반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육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굴종에 반대한다는 구실로 내적인 구원의 필요성을 무시하고 잇다. 주님께서 기저귀를 채운 채 구유에 뉘어 있는 것보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 수건을 허리에 차는 것이 더 큰 모욕일까?

이어서 주님께서는 당신과 친교를 맺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발을 닦는 것보다도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씻겨져야 한다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정화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제외되 버린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희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스승과 결별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발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 전체로 주님께 헌신하였기 때문에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실망하였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님, 그러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요한 13, 9)

더러운 것은 발뿐만이 아니었으며 손으로 행한 일들과 머리로 생각한 것들까지도 정화가 필요하였다. 죄란 하찮은 것이며 죄의식은 비정상적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보다는 무죄하신 분 앞에서 베드로는 사실상 "부정한 자 올시다! 부정한 자 올시다! 고 외친 것이다.

주님께서 발을 다 씻어 주시고 나서 옷을 입으시고 자리에 앉아 가르치셨다. 주님이시고 스승이신 당신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목숨까지 버리셨으므로 제자들인 그들도 똑같이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고 나서 겉옷을 입고 다시 식탁에 돌아 와 앉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을 수 없고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이제 너희는 이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실천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다."(요한 13, 12-17)

주님께서는 유다의 발까지 씻어 주셨다. 주님께서는 하인의 직분을 수행하셨지만 여전히 "스승이시요, 주님" 이시다. 천사가 "구세주" 라는 뜻으로 붙여준 이름인데도 사도들은 한번도 주님을 예수라고 부르지 않았다. 주님께서 당신 전교활동에 필요한 성소자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부탁하셨을 때, "추수의 주님"께 부탁하라고 말씀하셨다.
성지주일에 나귀를 데려 오라고 하셨을 때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 고 말씀하시며 그러한 요구가 당연함을 보여 주시고, 다락방을 쓰시고자 하셨을 때도 그럴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분은 "주님"이셨다. 사도들도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불렀다. 베드로가 물 속에 빠질 때 "주님" 이라고 불렀으며,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 인들을 파멸시키고자 했을 때도 그랬고, 이제 몇 분 후에 "주님, 그게 접니까?" 하고 물을 때도 "주님" 이라고 부를 것이며, 부활주일에는 "주께서 부활하셨다." 고 말할 것이다. 토마는 나중에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부를 것이며, 요한도 바닷가에서 주님을 알아보았을 때 "주님" 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가 주님을 묘사할 때는 항상 "예수"라고 한다. 예로써 "예수께서는 악마에게서 유혹을 받으셨다." 고 하거나 "예수께서 가르치셨다" 고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복음서가 사용한 이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사업을 성취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 너무도 거룩하게 된 그 이름이었다. 그 이후로 주님의 이름은 "예수의 거룩한 이름" 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필립비 2, 10)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7. 종들의 종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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