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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아빌라의 데레사

 

 

      아빌라의 레사

 

 

 

 

 

 

 아빌라의 데레사는 행동파이자 열정가로서 이상과 현실의 아름다운 조화를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관상과 활동의 조화 일치 이뤄

‘맨발의 가르멜회’ 창립한 개혁가

교회박사이며 기도신학의 권위자

 

 

“거의 2천년동안 성교회 품에 축적된 모든 지혜와 지식과 기도와 신비적인 사실들에 관한 체험을 보관하고 있는 웅장한 저장고.”

 

여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찬사와 함께 성 베르나르도, 성 보나벤투라, 성 이냐시오 로욜라, 십자가의 성 요한 등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의 최고봉을 이루는 것으로 꼽히는 성인이 아빌라의 데레사( Teresa de Avila, 1515~1582)다.

 

가르멜 수도원 개혁가, 신비가, 교회학자로 알려진 데레사는 ‘수도적 관상 생활과 사도적 활동의 조화와 일치’라는 그만의 독특한 영성 사상을 보여주었고 ‘맨발의 가르멜회’(discalceati) 창립 등에서 볼 수 있듯 개혁 정신의 소유자였다. 또 행동파이자 열정가로서 현실성을 잃지 않은, 이상과 현실의 아름다운 조화를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무엇보다 ‘아빌라의 데레사’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는 바로 ‘기도’다. 그는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기도 체험과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완벽한 묘사로 학계뿐 아니라 교도권으로부터 기도 신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껏 기도 생활의 귀감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에서 9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데레사는 할아버지 때 유다교에서 개종한, 열심한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순교자전 읽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7살 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읽고 감동, 자신도 순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가출을 감행할 만큼 남다른 면이 있었다.

 

교육을 위해 14세 때 아우구스티노 수녀회에 맡겨진 데레사는 19세 때 아빌라의 강생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 수련기를 밟았다. 이후 20년 동안은 신체적 시련은 있었으나 평범한 수도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40세에 이르러 내적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된 데레사는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불가사의한 신비적 현상들도 체험하게 된다. 또 이때부터 데레사가 느낀 것은 가르멜회의 개혁과 초창기 그 정신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많은 반대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562년 4명의 수녀들과 함께 가르멜의 초기 규칙대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고자 ‘맨발의 가르멜회’(discalceati)를 시작했다.

 

아빌라에 성요셉 수도원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이때부터 카스티야 지방과 안달루시아 지방에 개혁 가르멜 수도원을 17개나 건립했다.

 

수도원을 새로 세우는 것 뿐만 아니라 초기 가르멜회의 규칙인 엄격한 청빈 고행 기도의 삶을 전파한 데레사는 남자 수도원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그의 표어는 ‘활동하고 고통당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의 개혁에 반감을 가진 완화 가르멜회(신발의 가르멜회)와의 충돌로 톨레도로 추방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지만 결국 영적 지도자 도밍고 바네스 신부 등과 종교 개혁에 힘썼던 예수회 신부들의 도움으로 맨발 가르멜회는 완화 가르멜회로부터 분리돼 독립 수도회로 교황의 인정을 받게 됐다.

 

데레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고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세계로 몰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자아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영혼의 여정을 ‘묵상의 기도, 고요의 기도, 합일의 기도’로 묘사했으며 이러한 가르침 등을 통해 사람들이 물질생활의 풍요로 인해 퇴폐와 타락에 빠져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런 면에서 스페인 가톨릭 정신의 발로로 생겨난 ‘신비주의 문학의 거성’이라는 명칭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신앙심과 도덕적 윤리관을 불어 넣는데 힘썼던 그의 노력과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바쁜 와중에도 데레사는 많은 편지와 글을 썼다. ‘완덕의 길’ ‘영혼의 성’ 등이 대표적인데 특히 ‘영혼의 성’은 그의 대표작이면서 또한 세계 종교 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외에도 ‘고백록’처럼 자신의 영혼 상태를 이야기 하며 자신이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을 설명한 ‘천주 자비의 글’ 등의 작품이 있으며 400여통의 편지를 모은 ‘서간집’과 후렴구를 지닌 민요적 성가 형식의 시들이 전해진다.

 

문장 역시 정감 어린 필치와 명쾌한 표현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는데 캐나다 시인 오 하간 박사는 ‘그녀는 글을 쓴 여인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 존중되고 있는 그의 글은 ‘초자연적 체험들에 대한 설명과 열매들’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는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세밀하면서도 단순하게 설명해 주었으며 복잡하고 신비스러운 것들을 단순한 대화문 형태로 설명해 주었고 또 그리스도교 전통의 여러 신비가들이 가르친 내용들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명백하게 알려주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깊이 동참하기를 원했다.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라고 기구하며 고통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임종전 “내 영혼아! 아무것도 근심 말고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하느님만이 변함이 없으시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얻는 사람은 그 외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며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1582년 66세 나이로 “주님 저는 성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던 데레사는 1614년 시복되었고 1622년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05년 11월 6일,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