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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스크랩] IV. 기도를 실천함, pratiquer l’oraison -D. 기도의 어려움les difficult`es de la pri`ere

 

 

 

 

 

 

        예수의 데레사의 꽃송이

                            선문집 (選文集)

 

                                                                  글: 박 병해/ 스테파노신부님

 

 

 

                  IV. 기도를 실천함, pratiquer loraison

          D. 기도의 어려움

              les difficult'es de la pri'ere /

 

 

 

         1. 분심. /Distractions

                    영혼의 성 제 4 궁 방 1장 7-9

 

                 [7] 이 점을 들어 다른 책에서 상당히 길게 말해두었으므로 여기서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로서 여러분이 알아두었으면 하는 것은, 이 길에서 많은 진보를 얻고 우리의 소망인 궁 방들로 올라가기 위하여 중요한 일은, 많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사랑을 더욱 더 일깨워주는 그것을 하십시오. 아마도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맛이 더한 데 있지 않고 오직 더한 결심에 있습니다.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결심,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고, 당신 아드님의 크신 영광과 성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랑의 표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은 다른 것을 생각서는 안 된다든지, 조금만 마음이 헷갈려도 다 틀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8] 나 역시 그런 시끌시끌한 생각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4 년 전에야 비로소 그 생각 아니 쉽게 말해서 상상 은 오성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신학자에게 물어보아도 역시 그렇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여간 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내가 그전에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오성은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능력 중의 하나인데 어찌 그리 침착하지 못한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상상은 곧잘 날기가 일쑤여서 하느님만이 그것을 당신이 우리를 매어두실 그때 매어두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마치 육체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이고 합니다.

아무튼 나는 영혼의 모든 능력이 하느님께 쏠려서 당신 안에 집중되어 있는 것만 같은데, 한편 또 상상은 걷잡을 수 없이 야단스러운 사실에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9] 아 주님!, 이 길에 있어서 무식한 탓으로 우리가 치르게 되는 고생을 살펴주소서. 무식한 탓으로 저지른, 불행은 우리가 당신만을 생각할 줄 알면 그만이다 하는 데서 오고, 또 아는 이들에게 물어보지도 않으며, 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고생만 실컷 하게 되어 좋은 것도 나쁜 양 크나큰 잘못으로 간주합니다. 기도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은 이런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더욱이 지식이 없는 그들 대부분은 마음 속의 고민을 못 이겨내어 우울증에 걸리고, 건강을 잃고, 나아가서는 기도 마저 아주 집어치우게 됩니다. 더 말할 것 없이 자기 안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보십시오, 삽시간에 전속력을 내어서 옮겨지는 천체의 움직임을 우리 힘으로 걷잡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상상을 멈추게 할 힘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영혼의 모든 능력이 상상과 함께 옮겨지는 줄로 여겨서 하느님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잘못 써졌다, 허사가 되었다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상이 궁성 밖에서 갖은 맹수와 독충에 시달리면서 그 시달림으로 공로를 쌓아가는 동안, 영혼은 보다 높은 궁방에서 주님과 아기자기하게 지내는지도 모를 링입니다. 그러기에 함부로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기도를 놓아버리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악마가 노리는 바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불안과 고민은 모두 다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2.  메마름 /Sécheresses 

              영혼의 성 3 궁방 1장 6.7.9.

 

                [6] 아 예수님, 이렇게 큰 은혜를 싫다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이 말 못 할 고생을 치른 끝에 누가 이런 은혜를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 모두가 그 은혜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영혼을 몽땅 차지하기 위해서는 말보다도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어는 청년에게 완전한자가 되고 싶으냐?”고 말씀하셨을 그때처럼 말입니다.나는 이 궁방들에 대한 말을 하면서부터 그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우리가 그 청년과 똑 같은 데가 있고, 기도생활에서 흔히 대단한 권태기가 오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으나 대개는 여기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착한 영혼들이 아무런 자기의 잘못이 없이 당하는 그 쓰라린 고통이 아닙니다.

 

– 주께서는 항상 그런 고통으로 영혼들에게 큰 이익을 주십니다. – 우울증이나 다른 병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모든 일을 주님의 판단에 맡겨드려야 할 우리가 아닙니까 아무튼 영혼이 메마르게 된 이유는 내가 이미 말한 거기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보십시오, 이 궁방에 있는 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죄를 짓지 않으려 하고, 거의가 소죄마저 알고 짓는 일이 없고, 시간과 재산을 유익하게 사용합니다. 이들은 사실 임금님의 신하들이고 스스로 신하임을 자부하는 만큼, 임금님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있는 것을 그냥 참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임금도 아무리 그 신하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저마다 지 밑에까지 들어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들어가십시오, 따님들이여,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십시오, 자질구레한 여러분의 일들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 바에야 그만한 일쯤 마땅히 해야 되고 그보다 더한 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신하가 되는 것만으로 넉넉합니다. 지나친 욕심일랑 부리지 마십시오.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임금님의 지 밑에 들어간 성인들을 보십시오. 그분들과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당치도 않은 것을 주시라고 빌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처럼 주님께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설사 당신을 많이 섬겨드렸다 해도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7]. 아, 겸손, 겸손,웬일인지 나는 영혼이 메마르다. 메마르다 하는 사람들은 이 겸손이 모자라서 그런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나는 위에서 말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시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성이 모자라는 데서 오는 것 보다 훨씬 더한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우리는 자신들을 시험해봅시다. 아니면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도록 내맡깁시다. 우리는 시련의 의미를 알고 싶어하는 때가 적지만 주께서는 그 묘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럼, 이제 자리가 딱 잡힌 영혼들에게로 주의를 돌려, 그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이내 우리는 엄위 하신 하느님께 대하여 원망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자 되기 위하여 마땅히 할 일을 주께서 말씀하실 때 마치 복음서의 청년처럼(마태 19,22 참조) 슬퍼하면서 등을 돌린다면 주님한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바치는 사랑에 따라서 갚음을 주시는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의 상상대로 만들어낼 성질의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자매들은 주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아쉬워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의지의 결정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8]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수도 복을 입었고, 그것도 우리가 자진해서 그랬고, 이 세상의 모든 것, 즉 우리가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버렸다. – 비록 그것이 성 베드로의 그물 같은 것에 불과할망정 있는 데로 바치는 것이 다 바치는 셈이니 그러니 우리 할 일은 다 하였다고…. 물론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항상 거기에 꾸준하고, 생각만이라도 첫 궁방들의 길짐승 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면 말입니다. 일체를 버리고 이러한 이탈 속에서 한결같이 살기만 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바라는 바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이게 귀띔해드리는 말을 똑똑히 들어두십시오. 그것은 성 바울로, 아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루가 17,10 참조) 스스로를 쓸데없는 종으로 아는 것, 그리고 많이 받은 자인만큼 우리 주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아무런 의무가 없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대자재비하신 하느님…우리를 위하여 몸소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창조해주시고, 우리의 존재를 이어주시는 그 하느님을 위하여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새삼스럽게 무슨 은혜나 호강을 더 바랑 것 없이, 도리어 우리를 섬기신 것으로 보아서 당신께 빚진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것만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섬기신다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사실 당신이 이 세상에 게실 때 하신 모든 일이 섬기시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9] 따님들이여!, 나는 더 이상 밝혀 보일 재주가 없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여기 지적할 몇 가지 점을 명심하여두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깨우쳐주시면, 영혼의 메마름에 서 불안은커녕, – 악마는 이것을 노립니다 도리어 겸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주십시오. 영혼이 정말 겸손하다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로를 아니 주신다 하더라도 평화와 순종을 주셔서 위로 속에 사는 이들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책을 읽어서 아시지만, 그런 위로의 맛은 주님께서 아주 악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사람들은 정녕 그 위로를 메마름 속에 사는 이들의 용기와 바꾸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십자가보다도 편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 시오니 우리를 시험하소서, 이에 우리가 자신을 알 수 있으리 이다.

 

 

          

                  3, 고 민 / Angoisses     

                    영혼의 성 제 6 궁 방 1장 10-13

 

                  [10] 결국 이러한 역경 속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천만 뜻밖에도 하느님은 디민 말씀 한마디, 아니면 예상 할 수 없던 단 한 가지의 어느 일로서 지금까지 있었던 그 모든 것을 씻은 듯이 싹 가시게 하시고, 그 영혼 안에는 언제 구름이 끼었었느냐는 듯이, 태양이 눈부시게 찬란하고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찾아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영혼은 마치 아슬아슬한 전투에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우리 주님을 찬미하게 되는데, 승리를 위하여 싸워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요, 영혼이 자기 스스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방어할 무기는 모조리 원수의 수중에 들어있는 성싶었기에, 그는 자기의 비참을 깊이 깨닫고 아울러 주께서 우리를 놓아버리신다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치는 것입니다.

 

                  [11] 그는 이 사실을 알아들으려고 구태여 캐고 따지고 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봅니다. 이미 겪은 체험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보아왔고, 따라서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얼마나 비참한 것임을 깨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일은 은총이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 것,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 은총이 없이 될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이 은총은 아주 깊숙이 숨어 있어서, 그 당사자의 생각으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불티만큼도 없는 듯 느껴지고, 언제 한 번 그런 사랑을 가져본 적이라곤 전혀 없는 듯이 생각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슨 좋은 일을 했다거나 무슨 은혜를 하느님께 받았다 해도 모든 것은 한낱 꿈과 착각으로만 비칠 따름이며, 오직 거리낌 없이 보이는 것은 자기가 지은 죄악들뿐인 것입니다.

 

                  [12] 아, 예수님! 이렇듯 버려진 영혼,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그 영혼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오니 까?

자매들이여, 혹시 여러분도 이런 처지에 놓여 있게 되거든, 돈 많고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 경우 별도리가 있으려니 하고 생각 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형수에게 이 세상의 즐거움이란 즐거움을 모조리 보여준다 하더라도 괴로움을 덜어주기는커녕, 도리어 한결 키워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이 세상 것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 뜻하시는 바로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임금님이심을 그리고 우리 자신이 처절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려 는 것입니다.

 

                   [13] 그럼 몇 날 명칭을 두고 이런 상태에 있는 저 가엾은 영혼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기도를 드려도 하나마나 입니다. 기도의 뜻이 마음 속에 파고들지 못하고, 입으로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가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런 때일수록 묵상기도가 되지 않는 까닭은 이미 정신 능력이 모두 다 무능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무엇보다도 해로운 것은 고독입니다. 누구와 같이 있기도 말하기도 싫은 것이 또 하나의 큰 고통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딴에는 있는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불쾌하고 언짢은 기색이 밝게 드러나서 남들의 눈에까지 띄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그 당사자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을 어떻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과 압박감이기 때문에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제일 좋은 방법이 있다면 고통을 없앨 방도는 모르므로, 그걸 없애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있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이웃 사랑하는 일, 그것도 드러나는 일에 힘쓰는 것과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희망을 거는 사람을 저버리실 리가 만무합니다. 당신은 영원토록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자서전 12장 참조.

마태 19,16-22

 

출처 : IV. 기도를 실천함, pratiquer l’oraison -D. 기도의 어려움les difficult`es de la pri`ere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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